은, 주, 춘추전국시대의 지역 구조와 중화사상의 출현 배경
1. 은나라의 영역 구조 은나라 시대의 씨족 공동체적인 원시 사회에서는 지역 사회 구조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3층적인 구조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국사나 중국사에서 고대를 논할 때, 흔히 말하는 <중층적 구조>나 <부체제>가 바로 은, 주 시대의 기본 구조입니다. 은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땅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왕의 땅이라는 왕토 사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 토지 구성을 보면, 국왕은 자신의 본거지만 직할지로 가지고 있을 뿐, 실제 나머지 땅들은 각 부족장들이 독자적으로 영토를 구성하는 구조입니다. 서양으로 보면 그리스의 <폴리스>같은 도시국가 구조이고, 한국사로 보면 각 부족들이 모여 합의하는 <연맹왕국> 성격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은의 중층적이고 3층적인 구조를 보면 대읍(은왕 직할지) - 족읍(방백, 각 부족의 땅) - 소읍(종족단위의 마을)로 구성된 3층 구조입니다. 2. 서주 시대 초기 봉건제도에서의 지역 구조 이러한 구조는 서주시대에 <봉건제>성립과 함께 약간 바뀝니다. 봉건제도를 실시한 목적 중의 하나가 은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족읍을 주왕조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은왕조는 멸망했지만, 실제 은 왕조의 세력은 은 왕조와 연합하고 있던 각 부족의 족장세력들(족읍의 군장)들이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봉건제도는 소국의 군장들(족읍의 독자적 지배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혈연적인 관계를 매개로 하여 토지를 분봉하는 형식으로 그 독자적 지배를 인정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 주나라 초기의 새로운 족읍 체제를 한번 볼까요? 은대부터 내려오는 읍은 새 제후가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경우 옛 거주자는 새로운 봉건제후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독자적인 옛 은의 영역에 주 왕실의 혈연성을 가진 제후를 파견하여 그 영역을 은이 아닌, 주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 왕실이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된 제후가 그 영역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직까지 중국 사회는 중앙집권화 할 만큼 민족적 동질성이나 고유 문화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중화>라는 개념이 있긴 하나 이것은 외부 적을 상대할 때 이야기이고, 각 부족은 아직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중화>라는 중국중심의 공통 개념은 춘추전국시대를 넘어가야 완전히 확립됩니다. 주가 새롭게 개척하여 영역을 넓힌 새로운 족읍은 국가가 지정한 주왕실의 혈연 제후에게 분봉되어 그가 옛 은나라의 씨족 사회 지배자처럼 군림하면서 지배합니다. 이렇게 하면, 은주 교체로 인한 사회혼란을 줄이면서 효율적으로 은의 옛 부족국가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국의 지배층은 인, 피지배층(정복민)은 민으로 구별함으로서 국의 구성원간에 계층적인 구별을 합니다. 지배층은 파견된 제후를 중심으로 민(정복민)과 전(토지)를 지배하며, 민은 직접생산자로서 국인의 소유물로 간주됩니다. 민(民)은 이 당시에는 정복된 노예라는 개념이 강한 단어이나, 훗날에는 지배자 밑에 존재하는 백성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사용됩니다. 즉, 이 당시의 민은 인(人,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사람 대우를 받는 지배층 밑에서 존재하는 노예같은 민(民, 피지배층)이므로 당시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는 규정하는 학설이 다수설입니다. 3. 서주 시대 중기 - 춘추시대의 지역 변화 춘추 시대에는 대읍-족읍-소읍이라는 3층적 구조와 인, 민 이라는 지배관계에 변화가 옵니다. 이것은 춘추시대의 혼란기에 국, 도, 비라는 새로운 지역 개념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춘추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주왕실의 약화와 각 봉건제후들의 독자성 강화입니다. 봉건제후들은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문만 가졌을 뿐, 실제로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자국의 방어 태세를 위한 새로운 지역 개념을 제시합니다. 주왕실은 왕기(대읍)을 지키며 존재하지만, 제후들은 각각 족읍을 국(國) 이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또 제후들은 자신이 가진 국의 일부를 가신인 경, 대부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것이 도(都)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지배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비(卑)라고 합니다. 국, 도에는 각각 지배층인 인과 피지배층인 민이 삽니다. 즉, 은, 주 시대와 같은 중층적 구조이나, 달라진 점은 제후들이 성장하여 족읍을 국으로 바꾼 것이지요. 당시 왕과 제후는 동족의 대표자 성격으로 절대적인 권한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왕은 제후의 독립지역은 국을 넘보기 어려웠고, 제후는 자신의 영토에 거주하는 지배층인 인들에게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한국사 초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귀족회의 체제나 연맹왕국 수준의 체제와 비슷합니다. 즉, 왕이 국의 민을 지배할 수 없고, 제후는 도의 민을 지배할 수 없는 각각의 독자적인 구조이지요. 고구려에서 지배층인 계루부 왕이 소노부의 종묘사직을 인정한 것처럼, 춘추시대에도 각각의 분봉자들의 영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중국사에서는 이 시대에는 아직도 봉건제도의 역할이 유지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방>이라는 것도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읍에 속하지도 않고 수렵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이민족의 땅을 말하는데, 이들은 중국의 국가들과 상당히 많은 충돌을 했습니다. 중원의 국들은 이러한 방들을 <오랑캐>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의 땅인 국과 구분하기 위해 <방>이라 칭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대한 문명의 한 가운데라는 뜻으로 <중화>라고 부르고, 이민족들은 <변방>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4. 춘추- 전국시대의 국, 도, 비의 변화 춘추시대 중기를 넘어가면서 제후의 영토 확대로 국, 도, 비의 개념이 완전히 바뀝니다. 원래 주왕실이 분봉한 땅을 의미한던 국(國)은 이제 제후가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집안이라는 뜻의 국가(國家)로 바뀝니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국, 국가라는 영토 개념은 여기에서 출현된 것입니다. 원래 제후가 경, 대부에게 다시 나눠준 땅인 도(都)는 성곽으로 둘러싸고, 종묘사직을 설치하여 경, 대부의 독자적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중기 이후의 도는 성곽으로 둘러쌓인 으뜸머리의 도라는 뜻의 수도(首都)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국가의 수도(서울)을 뜻합니다. 그리고 비(卑)는 비루한 백성들이 사는 피지배계급의 땅이라는 뜻에서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각각 국가, 수도,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용어로 변환되는 것이며, 이렇게 국가, 수도, 변경을 갖춘 통일국가가 바로 <중화제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진은 너무 단명한 까닭에 다음 한나라 시기에 이러한 중화제국이라는 보편적 이념을 유교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이 한나라가 바로 <중화>를 대표하는 민족국가로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중국인을 <한족>이라고 부르고 중국말은 <한자>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한나라가 과거 모든 사상적 체계를 차분히 완성하여 동아시아 문화의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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