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민영익

(근현대사 8) 1884. 갑신정변의 원인과 그 결과는? 1884. 갑신정변이 일어나다! 1. 1880년대 이후 개화파의 분위기 오늘 다룰 내용은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1884년에 일어난 사건이지요. 갑신정변은 개화기의 모든 정황과 동 떨어져 단독 사건으로는 볼 수 없는 사건입니다. 개화기의 큰 흐름 속에서 척사와 개화라는 양대 기류가 정면 충돌한 사건이지요. 따라서 갑신정변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전 포스트에서 다룬 조선책략, 위정척사, 임오군란, 개화파의 흐름 등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럼 간략하게 그 흐름만 다시 짚어볼까요? 1880년 개화의 지침서인 조선책략이 들어온 이후, 조선 사회는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위정척사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이 운동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 개화를 추구하는 민씨 정권 타도 운동으로 까지 발전하려는 분위기였죠.. 더보기
통리기무아문의 조직표 한국사 사전 통리기무아문의 조직표 통리기무아문의 조직표 통리기무아문은 강화도 조약 이후 밀려오는 외국 문물을 효율적으로 받아들고, 국제적인 행정기구를 마련하기 위해 온건파 개화지식인들과 민씨 정권이 추진한 정부개편안입니다. 이것은 청나라의 총리기무아문을 모방한 관제였습니다. 1880년 설치된 이 기구는 기존의 의정부-6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별도의 정 1품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것이죠. 이 기구는 군사권과 행정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초행정부적 기관으로 엄청난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권한이 강대해지면서 군국기무를 담당하는 부서(통리군국사무아문), 외교통상기무를 담당하는 부서(통리교섭통상아문)으로 분리하였습니다. 통리기무아문은 12개의 속사로 구성되었는데,.. 더보기
우정국 정변 우정국 정변 갑신(1884) 9월 다케조에 신이치가 부임지인 조선에 왔다. 이때 중국와 프랑스는 안넘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일본 공사는 김옥균 등을 꾀어 말하기를 하니 매일 밤 모여서 은밀한 화합을 가지고 일본군을 의탁하여 청국인을 방어하며 자객을 양성하여 청당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로부터 군함을 파송하여 후원해준다는 밀약까지 받았다. - 박은식, 한국통사 - 같은 해 10월 17일 우정국이 낙성되고 홍영식이 총판이 되매, 연회를 베풀고 대관들과 각국 공사, 영사들을 초청하였다. 이에 육조판서와 내아문, 외아문 독판, 전후좌우 네 영사, 그리고 미국 공사 푸트, 영국 영사 애스톤, 청국 영사 진수당 등이 모두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일본 공사는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며 서기 시마무.. 더보기
임오군란 관련 사료 임오군란 관련 사료 임오년(1882) 6월 초 9일, 한성 영군들이 큰 소란을 피웠다. 갑술년(1874) 이후 궁궐, 경비가 다하여 기강이 없으며 호조와 선혜청 창고도 바닥나 한성 관리들은 봉급을 못 받았으며, 오영 병사들도 가끔 결식을 하여 급기야 5영을 2영으로 줄이고 노병과 약졸들을 쫒아냈는데, 내쫓긴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팔을 끼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 때 군량이 지급되지 않은 지 이미 반년이 지난 데다가 호남세선 몇 척이 도착하여, 한성 창고를 열어 군량을 먼저 지급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 때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의 하인이 선혜청 고지기가 되어 군량을 내주었다. 하인이 쌀을 벼껍질과 바꾸어 이익을 챙기자 많은 백성들이 크게 노하여 하인을 때려눕혔다.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 포도청..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