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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

고구려에서의 초기 발전 : 5나의 형성 고구려에서의 초기 발전 : 5나의 형성 1. 초기 고구려의 5나... 고구려는 압록강 중부에서 거주하던 맥족을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등장 시기는 위만조선이 철기를 가지고 고조선의 실권을 장악할 무렵부터 소집단의 씨족공동체적 유제를 간직한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선진 사회인 중국, 고조선으로부터 철기를 도입한 듯 싶은데, 이 철기를 사용하면서 사회가 분화되고 점차 정치집단이 확대되는 듯 보입니다. 고구려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동북아시아에 공백기가 찾아오면서 발전합니다. 고구려 집단이 발전하게 된 시기는 대락 기원후부터 2세기 말 경인데, 그 특징은 동북아시아의 공백기를 대체하려던 세력을 몰아내면서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고구려 집단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을 축출하면서부터입니다... 더보기
신라 유리왕 대의 신라 관등 유리왕대 신라관등 유리왕(儒理王) 9년에 17 등급의 관위를 설치하였으니, 1은 이벌찬(伊伐瑗), 2는 이척찬(伊尺瑗), 3은 잡찬(?瑗), 4는 파진찬(波珍瑗), 5는 대아찬(大阿瑗)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이벌찬까지는 오직 진골만이 받을 수 있고 다른 신분[他宗]은 안된다. 6은 아찬(阿瑗)이라고 하는데 중아찬(重阿瑗)에서 사중아찬(四重阿瑗)까지 있다. 7은 일길찬(一吉瑗), 8은 사찬(沙瑗), 9는 급벌찬(級伐瑗)이다. 10은 대나마(大奈麻)라 하는데 중나마(重奈麻)에서 구중나마(九重奈麻)까지 있고, 11은 나마(奈麻)라 하여 중나마(重奈麻)부터 칠중나마(七重奈麻)까지 둔다. 12는 대사(大舍)라 하고, 13은 사지(舍知)라 하며, 14는 길사(吉士), 15는 대오(大烏), 16은 소오(小烏), 17.. 더보기
고구려 초기의 왕권 강화 과정 고구려 초기의 왕권 강화 12월, 왕이 질산의 북쪽에서 사냥을 하면서 닷새가 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대부인 협부가 간하되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기어 백성들이 아직 안심하지 못하고 사니 마땅히 나라 일에 마음을 부지런히 쓰실 때 입니다. 그런데 이는 생각지 아니하고 사냥에만 몰두하시니, 만일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운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서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됩니다.'고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협부의 벼슬을 빼앗고 관아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더니, 협부가 분하게 여겨 남쪽의 한(韓)으로 달아났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 3월 고위 관리인 구도, 일구, 분구 등 3인을 내쫓아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이 3인은 비류부의 장이었는데, 그 바.. 더보기
백제의 건국 설화(삼국사기 편) 백제의 건국 설화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로서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이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시집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잇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라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더보기
이규보의 동명왕편 - 유리의 태자등극 이규보의 동명왕편 - 유리의 태자 등극 유리는 소년 시절에 남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참새잡이로 일을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있음을 보고는 쏘아 구멍을 냈다. 부인이 노하여 퍼붓기를 라고 하였다. 유리는 크게 부끄럽게 여기여 진흙 탄환을 쏘아 맞혀 동이 구멍을 막으니 전처럼 되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묻기를 라고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가 어리므로 장난삼아 고 대답하였다. 유리는 울며 하고는 마침내 자살하려 하였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말리며 라고 말하였다. 유리가 대답하기를 라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더보기
유리왕 이야기, 황조가 - 삼국사기 - 유리왕 이야기 유리왕 3년 가을인 7월에 짓고 떨어진 궁[이궁,별궁]을 맡으니 이다. 겨울인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이 다시 장가 들으니 두 여자다. {아가씨}로써 계시니 하나는 가로되 였다. 사람이라고 불린 여자이니라. 또 하나는 가로되 였다. 사람이라 불린 여자였다. (두 여자가 사랑을 다투어 서로 화합하지 못하였다) 두 여자가 다투어 사랑하지 않는 바 서로 화하도록 왕이 맡았다. 에 만드니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궁으로 각각 있게 하였다. 후에 왕이 밭을 짐지어 맡으니 이다. (가서) 칠일간 아니 돌아오니 두 여자 {아가씨}가 다투어 싸웠다. 가 욕하여 를 가로되 "너는 집안의 비천한 첩이다. 어찌 무례가 심한가?"하였다. 는 부끄러워 하여 망망히 돌아갔다. 왕이 듣고 뒤이어 쫓아갔다. 는.. 더보기
광개토대왕비문(수정본)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참조 : http://myhome.naver.com/sial/sss.htm 제 1부. 오직 옛날 시조는 추모왕이시니 창업의 기초를 닦으셨느니라.. 출생하여 스스로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라 하였다. 어머니는 하백녀이다. 랑부란(사내부족 아이)이 내려와 세상에 태어나니 성스러움이 있었다. 0000 이름을 駕(가)라 하였다. 순행하여 돌아다니다 남쪽 아래의 길에서 부여 엄리에서 큰 물(홍수)로 말미암아 왕으로 임하였다. 나루에서 말씀하여 가로되 “나는 바로 임금이니 하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하백녀이고 郞 부족의 추모왕이라 한다. 나를 건너가게 이어 주시오.” 거북이 떠올라 소리를 쳐 응하는 즉 허락하였음이다. 쭈욱 이어서 건널 수 있도록 거북은 떠 있었다. 그리하여 뒷날 비류곡을 건널 수 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