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진서 사이전 부여전 편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여 리 밖에 있다. 남쪽으로는 선비와 연접되어 있고, 북쪽에는 약수라는 물이 있다. 땅은 삼천 리가 되고 호수는 팔만이나 있다. 여기에는 성읍과 궁실이 있고, 땅은 오곡을 심어 먹기에 알맞다. 그 곳 사람들은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모여앉을 때는 읍하고 서로 양보하는 예의가 마치 중국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들은 출입할 때면 비단이나 모직 담요를 몸에 두르고 금은으로 허리에 장식을 만들어 찬다. 그들의 법률은 사람을 죽인 자는 그 사람을 죽이고 그 집을 몰수한다. 도둑질을 한 자는 한 사람 때문에 열 두 사람을 책망한다.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또 여자가 질투를 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모두 죽인다. 만일 군사를 일으킬 일이 있으면 소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럴 때면 소의 발톱을 모아서 전쟁의 길하고 흉할 것을 미리 판단한다. 즉 소의 발톱이 째졌으면 흉하다는 것이고 발톱이 합해졌으면 길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산 사람을 거기에 순장한다. 장사를 지내는 데에는 관은 있어도 곽은 없다. 거상을 할 때에는 남녀가 모두 흰 옷을 입고, 여자는 얼굴에 흰 수건을 가리며 옥으로 된 패물을 떼놓고 차지 않는다. 좋은 말과 초놜과 아름다운 구슬이 나는데 구슬의 크기는 대추만큼씩하다. 그 나라는 매우 부요해서 선대 이래로 남에게 파멸당해 본 일이 없다. 그 왕의 인을 보면, 예왕지인이라고 새겼다. 나라 안에 고예성이 있는데, 이것은 본래 예맥의 성이다. 한나라 무제 때에는 자주 와서 조공을 했다. 태강 육년에 모용외에게 나라가 격파되자 그 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도망해 와서 살았다. 이에 중국에서는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부여왕은 대마다 충성하고 효도하는 마음을 지키더니 이제 나쁜 오랑캐에게 멸망했으니 내 몹시 이를 안타까이 여긴다. 지금이라도 그 남아 있는 사람 중에서 나라를 회복할 만한 자가 있으면, 내 마땅히 그를 도와서 나라를 세우도록 하겠다] 했다. 이 조서를 받고 유사가 아뢰기를, [호동안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서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했다. 이에 선우영을 파면시키고 하감으로 대신 교위를 삼았다. 이듬해에 부여후왕 의라가 사신을 보내어 하감을 와서 보고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해 주기를 청했다. 이에 하감은 독우 가침에게 군사를 주어 의라에게 보내 주도록 했다. 가침이 군사를 데리고 돌아오는데, 모용외의 군사가 또 종로에서 길을 막고 싸운다. 그러나 가침은 모용외의 군사와 싸워 이를 크게 격퇴시켰다. 이리하여 모용외의 무리는 물러가고 의라는 자기 나라를 회복할 수가 있었다. 그런 후에도 모용외는 번번히 사람을 잡아다가 중국에 갖다 판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불쌍히 여겨 또 조서를 내려 이들을 도로 돌려 보내게 하고 이로부터는 부여 포로를 매매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晉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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