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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고려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고려

  고려 조상은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일찌기 하백의 딸을 얻어서 방 안에 가둬 두었다. 그러나 태양 빛이 마냥 그녀를 따라다니더니 이 태양 기운이 감동되어 태기가 있기 시작하여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다. 이 알을 깨치고 한 남자가 나왔는데, 이 사람의 이름을 주몽이라 했다.

  부여 조정의 신하들은 이 주몽이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죽이기를 청했지만 왕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주몽은 차츰 자라자 왕이 사냥하러 갈 때 따라가면 언제나 짐승을 많이 잡는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께 청하여 또 죽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그 어머니가 알고 주몽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하여 주몽은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큰 물을 만났는데 물이 깊어서 건너갈 수가 없었다.

  주몽은 말했다. [나는 하백의 외손이요, 태양의 아들이다. 이제 어려운 일을 만나 도망하는데 쫓아오는 군사가 급히 따라오니 어떻게 건넌단 말이냐.]

  말을 마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수없이 물 위로 뛰어올라 금시에 다리를 만들어 주몽이 건널 수가 있었다. 주몽이 다리를 건너가자 물고기들은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다라오던 군사들은 건널 수가 없어 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주몽이 나라를 세우자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로 성을 삼았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왕위를 이었고, 그 손자 막래때에 이르러서는 군사를 일으켜 부여를 삼켰고, 그 자손 위궁에 이르러서는 위나라 정시년중에 서안평을 침입해 들어왔다. 이에 무구검이 이를 막아서 깨쳤다.

  위궁의 현손의 아들은 소열제인데 모용씨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 때 모용씨는 드디어 그 도읍에 들어가서 궁실을 불 태우고 크게 약탈해 가지고 돌아왔다.

  소열제의 후손들은 백제에게 죽었고, 그 증손 연이 후위와 사신을 통했다. 연의 육대손 탕은 주나라에 있어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자 무제는 탕을 배하여 상개부요동군공 요동왕을 삼았다.

  고조가 왕위를 계승해 받자 탕은 다시 사신을 보내 대궐에 들어와 뵙자 대장군을 제수했고 다시 고려왕을 봉했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 나라는 동쪽과 서쪽의 거리는 이천여 리나 되고, 남쪽과 북쪽의 거리는 천여 리가 된다.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이것은 또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동서로 육리가 되는데, 산을 따라 꾸불어졌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해 있다.

  거기에는 다시 국내성과 한성이 있어 모두 도읍한 곳이니 이것을 그 나라에서는 세 서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신라와 항상 서로 침입해서 전쟁이 쉴 사이가 없었다.

  관리의 이름은 태대형, 차대형, 차소형, 차대로, 차의후사, 차오졸, 차태대사자, 차대사자, 차소사자, 차누사, 차의속, 차선인 등 이십등급이 있다. 이외에 다시 내평, 외평, 오부누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가죽으로 만든 관을 쓰고, 벼슬한 사람은 관 위에 새깃을 꼽는다. 또 노ㅠ은 벼슬을 해서 귀한 사람은 관에 자주빛 비단을 대고 거기에 또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한다.

  옷은 소매와 옷깃이 크고 바지통도 넓다. 흰 가죽으로 만든 띠를 띠고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들은 저고리나 치마에 선을 두른다.

  병기는 중국과 대략 같고,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사냥을 하는데 이 대 왕이 친히 참석한다.

  사람 하나에 세금으로 내는 포목이 다섯 필이고 곡식이 닷 섬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사람은 삼년에 한 번 세금을 내는데, 이것은 열 사람이 세포 한 필과 벼 한 섬씩을 낸다. 그 다음은 칠두이고, 아주 하등은 오두를 낸다. 반역을 한 자는 기둥나무에 매달고 불로 지져 죽이며, 또 그 위에 그 집 재산을 몰수한다. 도둑질을 한 자는 훔친 물건의 십배를 물린다. 이렇게 형벌이 엄한 때문에 죄를 범하는 자가 드물다.

  음악으로는 오현금과 쟁, 필률, 횡취소, 고 등속이 있고, 이 악기들에 다시 노를 불어서 곡조를 만든다.

  해마다 정월 초생이면 패수 위에 모여서 놀이를 하는데, 왕이 요여를 타고 우의를 갖추고서 이것을 구경한다. 이 놀이가 끝나면 왕이 옷을 물 속에 넣는데, 사람들이 좌우로 나뉘어서 두 부를 만들어 물 속에 있는 돌을 가지고 서로 던지면서 떠들고 쫓아다니다가 이렇게 몇 번을 하고 그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걸터앉기를 좋아하고, 또 깨끗한 것을 사랑하며 어른 앞에서는 기어서 가는 것이 공경하는 뜻이요, 절을 할 때에는 한 쪽 다리를 뒤로 꿇고 섰을 때는 모두 팔짱을 끼며, 길을 갈 때는 반드시 손을 흔든다. 성질들은 음흉한 사람이 많고 아비와 자식이 한 냇물에서 목욕하며, 또 한 방에서 잔다. 부인은 음란한 짓을 많이 해서 그들의 풍속에는 노는 여자가 많다.

  혼인을 할 사람이 있을 때는 저희끼리 좋으면 당장 혼인을 하고, 남자의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이요, 재물을 보내는 예법은 없다. 만일 혼인에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긴다.

  죽은 사람은 집 안에 빈소를 만들어 놓았다가 삼년이 지난 뒤에 길일을 가려서 장사를 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죽었을 때는 모두 삼년복을 입고, 형제 간에는 석 달을 입는다. 초종을 치를 때는 모두 곡하고 울지만, 장사를 치르고 나면 북을 치고 춤 추면서 풍류를 아뢰어서 죽은 이를 보내는 예를 베푼다. 매장이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에 입던 옷과 수레와 말을 가져다가 무덤 곁에 두어 두면 장례에 온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가져 간다. 이 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공경하며, 음사가 많다.

  개황 초년에는 자못 사신을 보내어 조정에 들어오더니 진을 평정한 뒤로는 탕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다스리고 양식을 저축하여 나라를 지키고 적을 막을 계책을 했다.

  십년에 천자가 탕에게 새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이 하늘의 명령을 받아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을 사랑하고 길러, 왕을 바닷가에 있게 하고 조정의 감화를 널리 드날려서 머리는 둥글고 발은 모져서 각각 그 뜻을 다하도록 했었다. 이에 왕도 매양 사신을 보내서 해마다 조공을 바쳐 비록 번신이라고 일컬으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성과 절조는 다하지 못한 바 있다. 왕이 이미 남의 신하노릇을 할 바에는 모름지기 짐의 덕에 일치되게 하여 말갈ㅇ르 쫓아 몰아세우고 글안을 굳게 금지시켜 모든 번신이 이마를 조아리고 나의 심부름꾼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하게 여기고 정이 깊은 사람을 해치려 하는가. 태부의 공인들은 그 수효가 적지 않으니 왕은 반드시 이를 잘 보살피어 스스로 일을 알아 보고해야 할 것인데, 지난해에는 비밀히 재물을 가지고 이익으로 소인ㅇ르 움직여서 사사로이 활 쏘는 사람을 시켜 변두리 나라에 도망쳐 숨게 하였으니 이 어찌 병기를 수리해서 올바르지 못한 뜻을 품고 밖의 소문을 두려워하여 짐짓 비밀히 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 때에 사신을 명하여 왕 등의 번신들을 위로하여 본래 저들의 뜻을 묻고 저들의 계교를 가르치려 했었는데, 왕은 빈 집에 앉아서 엄하게 방비하고 지키는 것만 더하여 그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영구히 듣고 보는 것이 없게 했으니 이것은 무슨 고약한 마음이 있어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관청을 통제하여 그들이 살피지 못하게 한 것인가. 또 자주 기병을 보내서 변방 사람을 죽이고, 여러 번 간사한 꾀 있는 사람을 맞아다가 요망한 말과 행동을 하였으니, 이는 마음이 온당치 못한 데에 있는 것이로다. 짐은 창생에게 대하여 모두 적자같이 알아서 왕에게 집을 주고 왕에게 관작을 주어 깊은 은혜와 남다른 덕택이 멀고 가까운 곳에 일일이 나타났는데도 왕은 오로지 이를 믿지 않고 항상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품어 일찌기 사자를 보내어 비밀히 소식을 탐지했으니 순결한 신하의 의리가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이는 대개 짐이 가르치고 인도한 것이 분명한 것이어서 왕의 허물은 하나같이 너그럽게 용서하는 바이니, 오늘 이후로는 반드시 이를 고쳐서 번신으로서으 ㅣ절도를 지키고 조정의 법을 받들어 스스로 너의 번국으로서 감화되고 딴 나라를 허물하지 말 것이니 이렇게 하면 길이 부귀를 누려 실로 짐의 마음에 기쁘겠노라. 저 한 나라는 비록 땅은 좁고 사람은 적으나 그래도 이 하늘 아래에 있어 모두 짐의 신하이니 이제 만일 왕을 내쫓는대도 그대로 비워 둘 수는 없는 터이고, 마침내는 다시 관속을 가려서 그 곳에 나가 백성들을 안무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만일 왕이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꾸어 천자의 법을 쫓는다면 이는 곧 짐의 어진 신하이어서 어찌 수고롭게 따로 사람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에 제왕이 법을 만들 적에 어진 것과 믿음으로 우두머리를 삼아서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악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다. 이리하여 천하 안이 모두 짐의 뜻을 들어 오는데, 왕이 만일 죄가 없는데도 짐이 갑자기 군사를 내서 친다면 그 나머지 딴 번국들은 짐을 무엇이라 하겠느냐. 그러니 왕은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짐의 이 뜻을 받아들이고 절대로 딴 의혹을 가져 다시는 다른 계획을 품지 말라. 저번에 진숙보대가 강음에 있어서 백성들을 잔혹하게 해쳐 우리 나라 사람들을 놀래어 움직이고 우리 나라 변방 국경ㅇ르 침략하기로 짐은 전후에 이를 경계하고 신칙하하여 십년 동안을 지내 왔다. 그러나 저들은 장강이 형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한 모퉁이의 무리들을 모아서 어둡고 미치광스럽고 교만하여 짐의 말을 듣지 않았었다. 이에 짐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 흉악한 무리들을 쳐서 없애게 했더니 왕래한 지 불과 한 달 만이요, 또 군사도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건만 적들을 모두 사로잡아 하루아침에 맑게 소탕해서 원근이 모두 편안해지고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었다. 이제 왕이 탄식하고 한하여 홀로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을 들으니 내쫓고 올려 스는 것은 유사가 맡아 할 일이다. 왕을 죄 준대도 진처럼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요, 왕을 상 준대도 진처럼 두어 두지는 못할 일이다. 그런데 화를 즐겨하고 어지러운 것을 좋아하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 왕은 생각하기에 요수가 넓다 하나 장강과 비교해서 어떠하며, 고려 사람이 많다고 하나 진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짐이 만일 백성을 사랑해 기를 생각을 갖지 않고, 왕의 먼젓번 과실만 책망한다면 한 장군을 명하면 될 것인데 어찌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는가. 짐이 이렇듯 은근하게 타일러서 왕이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왕은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했다.

  탕이 이 글을 보고 황공히 여겨 장차 표문을 받들어 사례하려 하더니 마침 병이 있어 죽었다. 그 아들 원이 왕위를 계승해 서자 고조는 사신을 보내어 원으로 상개부의동삼사를 삼고, 습작해서 요동군공을 삼고 옷 한 벌을 하사했다.

  이에 원은 표문을 올려 은혜를 사례하고 아울러 상서로운 일이 있기를 하례하고, 또 왕을 봉하여 고조를 삼고 원으로 왕을 삼아 주기를 청했다.

  이듬해에 원은 말갈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입하니, 영주총관 위충이 이를 쳐서 쫓았다.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을 명하여 원수를 삼아 수륙 군사를 합쳐 이를 치게 하고, 한편 조서를 내려 원의 작위를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이 때 군량이 제대로 운반되지 못하여 육군이 모두 굶주린 데다가 군사들이 임투관에 나가자 다시 역질을 만나 군사들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므로 요수에 이르러 군사를 머무르고 있었다. 이 때 원도 역시 황급히 여기고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려, [요동분토신 원]이라고 했다. 고조는 이에 군사를 물리고 처음과 똑같이 대접하고 원도 역시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

  양제가 왕위를 계승하자 천하가 모두 융성하여 고창왕, 돌궐계인 가한이 모두 친히 대궐에 나와 물건을 바쳤다. 이에 원을 불러 조정에 들어오라 했더니, 원은 번신의 예를 오랫동안 궐한 것을 두렵게 여겼다. 대업 칠년에 제는 장차 원의 죄를 치고자 수레가 요수를 건너 요동성에 그쳐서 영을 치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전진시키고자 해서 각각 성 밑에 둔 치고 있었다.

  이 때 고려에서도 군사를 내어 나와 막았으나, 전세가 이롭지 못했으므로 모두 성 안에서 굳게 지키고 있었다. 이에 군사를 물리고 처음과 똑같이 대접하고 원도 역시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

  양제가 왕위를 계승하자 천하가 모두 융성하여 고창왕, 돌궐계인 가한이 모두 친히 대궐에 나와 물건을 바쳤다. 이에 원을 불러 조정에 들어오라 했더니, 원은 번신의 예를 오랫동안 궐한 것을 두렵게 여겼다. 대업 칠년에 제는 장차 원의 죄를 치고자 수레가 요수를 건너 요동성에 그쳐서 영을 치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전진시키고자 해서 각각 성 밑에 둔 치고 있었다.

  이 때 고려에서도 군사를 내어 나와 막았으나, 전세가 이롭지 못했으므로 모두 성 안에서 굳게 지키고 있었다. 이에 제는 모든 군사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는 한편 또 여러 장수들에게 일러 고려 군사들이 만일 항복하거든 곧 무마해서 받아들이고 맘대로 ㄱ누사를 내어 치지 못하게 했다.

  성이 장차 함락되게 되자 적들이 갑자기 항복하기를 청한다. 여러 장수들은 제의 뜻을 받들지도 못하고 맘대로 할 수가 없어서 먼저 사람을 시켜 제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가 도착했을 때는 적들은 또 수비를 갖추어 경우에 따라 나와 막아서, 이렇게 하기를 두세 차례나 했지만 제는 그래도 그들을 믿고 있었다. 이 까닭에 먹을 것이 다 되고 군사들도 피로하여 더 계속해 주문할 수가 없어 모든 군사들이 견디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회군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 얻은 것은 오직 요수 서쪽에서 적의 무려라를 함락시켜 여기에 요동군과 통정진을 두고 돌아왔다. 구년에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할제 모든 군중에 조칙을 내려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일렀다.

  모든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차니 적의 세력이 날로 줄어 들었다. 그러나 이 때 마침 양현감이 난을 일으켜 반한다는 글이 이르렀다. 제는 이 글을 보고 깜짝 놀라 즉일로 팔군을 모두 퇴병하고 말았다.

  이 때 병무시랑 곡사정이 도망해서 고려로 들어갔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그 사실을 낱낱이 알았다. 그리하여 모두 날카롭게 추격해 와서 중국 군사가 크게 패했다. 십년에 또 천하의 군사를 내어 고려를 쳤더니, 마침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흩어지므로 군사가 있는 곳을 서로 알 수가 없어 모두 공격할 기회를 잃은 채 요수에 이르렀다.

  한편 고려도 역시 군사들이 피로해서 사신을 보내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곡사정을 보내서 속죄하자 제도 이를 허락하고 군사를 회원진에 주둔시켜 그들의 항복을 받고 포로들을 경사로 돌려 보냈다. 한편 고려의 사신을 시켜 친히 태묘에 고하고 그들을 붙들어 둔 채 원을 불러 조정에 들어오라 했으나, 원은 종시 오지 않았다. 이에 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하여 엄하게 장비를 갖추게 하고 다시 공격할 게획을 세웠다. 그러나 마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드디어 이기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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