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수서 동이전 백제
백제의 조상은 고려국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에게 부리는 종 하나가 있었다. 이 종이 졸지에 태기가 있자 왕은 죽이려 했다. 그러나 종은 말하기를, [마치 닭의 새끼 같은 물건이 와서 저의 몸에 스치더니 이내 태기가 있는 것입니다] 한다. 이 말을 듣고 왕은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뒤에 드디어 한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것을 변소에 버렸으나 오래 되도록 죽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겨 신이라 하고 어미에게 명하여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동명이 자라자 고려왕은 이를 꺼려하였다. 동명은 두려워서 도망하여 엄수에 이르니 부여 사람들이 함께 그를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어 어진 일과 믿음에 독실하여 비로소 그 나라를 대방 옛땅에 세우고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를 사위로 삼는 등 점점 강성해져서 동이 중에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처음에 백성의 집 백 호를 데리고 바다를 건넜다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 했다. 그런 지 십여 대를 지나서 대대로 중국에 신하노릇했는데, 이 사실은 먼저 사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개황 초년에 그 나라 왕 여창이 사신을 보내서 방물을 바치자 창을 배하여 상개부대방군공 백제왕을 삼았다. 그 나라는 동쪽과 서쪽의 거리가 사백오십리이고, 남쪽과 북쪽은 구백여 리가 된다. 남쪽은 신라에 접해 있고, 북쪽은 고려를 등졌으며, 그 도읍은 거발성이라 한다. 벼슬에는 십육 계급이 있다. 제일 위는 좌평이요, 그 다음은 대솔이요, 또 그 다음은 은솔, 덕솔이다. 다음은 간솔, 그 다음은 내솔, 또 그 다음은 장덕이다. 이상은 모두 자줏빛 띠를 띤다. 그 다음은 시덕이니 흰 띠를 띠고, 다음은 고덕이니 붉은 띠를 띤다. 다음 이덕은 푸른 띠를 띠고, 다음 대덕 이하는 누런 띠를 띤다. 다음은 문독이요, 그 다음은 무독이요, 또 그 다음은 좌군, 그 다음은 진무, 그 다음은 극우인데 모두 흰 띠를 띤다. 그들이 쓰는 관의 제도는 모두 같고, 오직 내율 이상만은 은으로 만든 꽃을 꽂는다. 장사는 삼년에 한 번씩 교대하고 경기 안은 다섯 부로 나누며, 한 부마다 다섯 항이 있어서 사람들을 살게 한다. 또 다섯 방에는 각각 방령 한 사람씩을 두고 방좌가 그를 대리한다. 방에는 열 군이 있고, 군에는 장수가 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신라, 고려, 왜 등의 사람들이 섞여 있고, 또한 중국 사람도 있다. 그들의 의복은 고려와 대략 같고, 부인은 얼굴에 분 칠을 하지 않고 머리를 땋아 뒤로 늘이운다. 출가한 사람은 머리를 양쪽으로 나누어서 위에 쪽을 찐다. 그들의 풍속은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숭상하고, 글과 사기를 읽으며 관리의 일에 능하다. 또 의약과 점 치고 상 보는 재주도 안다. 두 손으로 땅을 짚는 것으로 공경하는 뜻을 표하고, 그 곳에는 도사는 없고 승니가 있으며 절과 탑이 많다. 고각과 공후, 쟁, 호적 등의 악기도 있고, 또 투호, 위기, 저포, 악삭, 농주 등의 놀이도 있다. 송나라 원가력을 써서 인월로 세수를 삼는다. 나라 안에 큰 성이 여덟이 있다.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정씨, 국씨, 목씨, 묘씨이다. 혼인 지내는 예법은 대략 중국과 같고 초상 치르는 제도는 고려와 같다. 오곡이 있고, 소와 돼지와 닭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화식을 하지 않는다. 밭은 대개 낮은 땅에 있고 습하며, 사람들은 모두 산 속에서 산다. 큰 밤나무가 있는데 해마다 사중월 즉 이월, 오월, 팔월, 십일월이면 왕이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또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국성에 세우고 해마다 네 번씩 제사를 지낸다. 나라의 서남쪽에 있는 섬 속에 사람이 사는 곳이 열 다섯 곳이 있는데, 그 곳마다 모두 성이 있고 읍이 있다. 진을 평정하던 해에 한 전선이 표류해서 바다 동쪽 담모라국에 도착했다가 그 배가 돌아오게 되자 백제를 거치게 되었다. 이 때 창은 이 배에 물건을 많이 주어 후하게 대접해서 보내고, 겸하여 사신을 보내서 표문을 바쳐 진을 평정한 것을 하례했다. 이에 고조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백제왕이 이미 진을 평정했다는 말을 듣고 멀리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쳐 왔는데, 왕복하기가 지극히 어려워 만일 풍랑을 만난다면 문득 몸을 상할까 걱정된다. 백제왕의 마음이 순박하고 지극한 것은 짐이 이미 모두 아는 터이다. 서로의 거리가 비록 멀지만 우리의 일은 한 가지이고 말하는 것도 같은 터에 어찌 자주 사신을 보내 올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제부터는 해마다 공물을 바쳐 올 것이 없고, 짐도 또한 사신을 보내 가지 않을 것이니 왕은 그렇게 알라] 했다. 이에 사신으로 갔던 자는 기뻐서 춤을 추고 돌아갔다. 개황 십팔년에 창은 그 장사왕 변나를 시켜 방물을 가져다 바치고 요동전쟁을 치하한 다음 또 사신을 보내서 표문을 바치고 군도가 되기를 청했다. 이에 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지난해에 고려가 공물을 바치는 직책을 다하지 않아서 인신의 예가 없기로 장수에게 명해서 이를 치게 했더니 고려의 임금과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죄를 자백하기로 짐이 이미 용서했으니 이를 치지 말도록 하라]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해서 돌려 보냈다. 이에 고려에서도 자못 그 일을 알고 군사를 내어 그들의 국경지방을 침략했다. 창이 죽자 그 아들 여선이 서고, 여선이 죽자 또 그 아들 여장이 왕위에 섰다. 대업 삼년에 장이 사신 연문진을 보내서 조공을 바쳤다. 그 해에 또 사신 왕효린을 보내서 물건을 바치고 고려를 토벌해 달라고 청하자, 양제는 이를 허락하고 우선 고려의 동정을 살피도록 말했다. 그러나 장은 내용으로 고려와 화친하고서 거짓말을 하여 도리어 중국을 넘겨다 보았다. 칠년에 제가 친히 고려를 정벌하자 장은 그 신하 국지모를 시켜 와서 군기를 청하니, 제는 이를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물건을 상으로 주었다. 그리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보내서 백제에 와서 서로 알렸다. 이듬해에 육군이 요수를 건너자 장도 역시 국경지방에 군사를 엄하게 준비시키고 군사를 돕겠다고 떠돌었으나, 그들은 실상은 양쪽 다리를 걸치고 형세를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신라와 틈이 생겨서 서로 싸웠다. 십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는데, 뒤에 천하가 어지러워지면서부터는 사신들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 나라에서 남쪽 바닷길로 석 달을 가면 담모라국이 있다. 이 나라는 남쪽과 북쪽이 천여 리나 되고, 동쪽과 서쪽이 수백 리나 된다. 그 곳에는 사슴이 많은데 그들은 백제에 붙어 지냈다. 백제에서 또 서쪽으로 사흘을 가면 맥에 이른다고 한다.(隋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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