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북사 거란전
글안국은 고막해 동쪽에 있는데, 고막해와는 종족은 달라도 역시 동류이다. 이들은 모두 모용황에게 패하여 소나무 숲속에서 숨어 살았었다. 그러던 것을 동국년중에 위나라가 크게 깨치자 드디어 이곳으로 도망해서 고막해와 나뉘어 살게 되었다. 그 후로 수십년을 지나자 그들은 점점 뻗어나서 한 부락을 이루더니, 화룡 북쪽 수백 리 땅에서 도둑이 되었었다. 그러나 진군 이후로 해마다 명마를 바쳐 왔다. 헌문제 때에 사신 막불흘하진을 보내서 물건을 바쳐 와서 비로소 이 때에 여러 나라들의 맨 끝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대접받고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서 서로 중국의 아름다움을 말해서 마음속으로 모두 흠모하기 시작했다. 이에 동북쪽의 모든 오랑캐들이 이 소문을 듣고 저마다 복종하고 싶어하여 실만단부, 아대하부, 복불욱부, 우릉부, 왈련부, 필결부, 여부, 토육간부 등이 각각 명마와 짐승의 가죽을 바쳐 오면서 평상시와 같이 지내게 해 주기를 요구하고, 또 화룡, 밀운 사이에서 물건을 매매하고 물건 바치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 태화 삼년에 고구려가 비밀히 유유와 공모하여 지두간의 딸을 빼앗아 나누어 가지려 했다. 글안은 옛날의 원망이 있는 터여서 막하불물간 등이 자기 부락 백성 만여 명과 수레 삼백 채를 가지고 모든 가축을 몰고 와서 내용으로 소속되기를 구하며, 백랑수 동쪽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이 해로부터 항상 조공을 바쳤다. 그런 뒤 어느 해에 그들은 기근이 있다고 보고하므로 효문제는 이 말을 듣고 관에 들어와 쌀을 가져가도록 했다. 선무, 효명 때에 이르러 항상 그들은 사신을 보내고 방물을 바쳤다. 희평년간에 글안은 인초진등 삼십명을 보내 오니 영태후는 그들의 풍속이 혼인 지낼 때에 푸른 전으로 웃옷을 만들어 입는다고 해서 한 사람 앞에 푸른 전 두 필씩을 주어 그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표창했다. 그들의 공물 바치는 것은 전과 같아서 제가 동위에게서 수선할 때까지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천보 사년 구월에 글안이 변방을 범해 오자, 문제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정벌하여 평주에 이르러 드디어 서쪽으로 장참으로 나갔다. 또 제는 사도 반상락에게 조서를 내려 정한 기병 오천을 거느리고 동쪽 길로 청산으로 나가게 하고, 다시 안덕 왕한궤에게 조서를 내려 정한 기병 사천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가서 글안의 달아날 길을 끊으라 했다. 그리고 제는 친히 고개를 넘어 크게 싸워서 적을 개쳐 십여만 호와 가축 수십만 마리르 사로잡았다. 한편 반상락도 또 청산에서 글안의 별부를 크게 개쳐서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모두 각각 나누어 여러 주에 살도록 했다. 그 뒤에 글안은 다시 돌궐의 침입을 받아서 만 호를 거느리고 고려에 붙였다. 그들의 풍속은 말갈과 같아서 도둑질을 좋아하고 부모가 죽어서도 슬피 우는 자는 씩씩하지 못한 자라고 비웃는다. 부모가 죽으면 그 시체를 나무 위에 갖다 두고 삼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 뼈를 거두어다가 불에 태워 버린다. 이 때 술잔을 부어 놓고 빌기를, [겨울철이거나 이른봄에 만일 내가 사냥을 하거던 돼지와 사슴을 많이 잡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 무례하고 어리석기가 모든 오랑캐 중에서 가장 심했다. 수나라 개황 사년에 막하불을 데리고 와서 제께 뵙고, 오년에는 그 무리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정성을 표하니 문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뒤에 글안의 별부 출복 등이 고려를 배반하고,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소속되기를 구하자 제는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러나 그 때는 돌궐과 통호하던 참이어서 거듭 먼 곳 인심을 잃을까 걱정하여 모두 양식을 주어서 그들의 부락으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돌궐에게 조서를 내려 위로하고 받아들이게 했으나, 그들은 종시 가지 않고 부락이 점점 번성하여 드디어 북쪽으로 옮겨가서 홀림수에 의지해 살았다. 이곳은 동서로는 넓이가 오백 리가 되는데 모두 십부로 나뉘었으며, 한 부에 군사가 많은 곳은 이천 명이 되고 적은 곳은 일천 명 남짓이 있다. 그들은 여기에서 춥고 더운 것을 따라 물과 풀을 쫓아 다니면서 가축을 기르고 살았다. 만일 전쟁이 있으면 추수들이 모여서 서로 의논하여 군사를 일으키곤 했다. 돌궐의 사발략가한이 토둔반질을 보내서 모두를 통솔해 오더니 글안이 토둔을 죽이고 달아났다. 그 뒤 대업 칠년에 사신을 보내서 방물을 바쳐 왔다.(北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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