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대 국학의 설치
1. 국학의 설치 국학은 신문왕 2년 당나라의 영향으로 6전체제를 갖추고 중앙집권을 하면서 생긴 예부 소속의 국립 교육기관입니다. 이 국학은 신문왕 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국통일기 김춘추의 관료제 개혁부터 그 배경이 시작됩니다. 김춘추는 진골계 왕통을 확립하면서 씨족적인 부체제를 타파하고 왕권에 절대 복속하는 관료제를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통일전쟁이라는 급박한 정치적 변동기였으므로 그 제도적 기반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김춘추는 관료제 사회로 전환하려고 했고, 진골귀족들은 그것에 반발하였지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속에서 김춘추는 자신의 의지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쟁에서 공이 많았던 법민왕자(문무왕)기에 이러한 정치 개혁에 더 박차를 가합니다. 신문왕대에는 왕권에 저항하는 진골귀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갑니다.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면서 그와 연계하여 김군관 등 귀족 상대등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였고, 신문왕은 골품제적 인사 관행에 불만을 표하면서 새로운 정치 집단 양성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신문왕은 능력 위주로 관료를 선발할 것을 주장하면서 국학을 설치합니다. 2. 국학의 구성 국학은 왕권강화를 위한 <유교경전 위주>의 교수법을 지향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 한나라 이래 중국 황제들이 왕권 강화를 위해 유교정치를 왕권과 연계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유교 뿐만 아니라 왕권강화 및 새로운 관료 등용을 위한 학문이라면 국학에서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즉, 율학, 서학, 산학 등도 국학에서 교육되었죠. 그러나, 어떤 과목을 공부하던간에 <논어, 효경>이라는 유교덕목은 필수과목이였습니다. 교수법은 중국식 제도를 본받아 박사와 조교가 있고 이들이 교수를 담당하는 체제였습니다. 후에 성덕왕기에는 의박사, 산박사 등 잡학에서도 박사 수를 늘렸고, 국학에 문묘를 설치하여 관료군 양성과 함께 왕권에 대한 충성을 확인받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은 대사 이하의 관등 소지자로 관등이 없는 15-30세 젊은이가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최고위 진골층보다 하위계급을 우대하는 처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보통 9년 정도의 수업을 통해 전문 관료로 양성되었습니다. 신문왕이 국학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유교 교육을 통한 고급관료의 육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율,서,산학을 통한 행정실무에 능한 하급관리 양성도 동시에 추구한 것이지요. 이것은 곧 골품적인 신분 인사를 지양하겠다는 왕권의 의지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나 국학의 가장 큰 한계점은 국학과 연계하여 관리를 선발할 수 있는 <과거제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국 수, 당에서 실시한 과거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단지 <국학>이라는 학교기관에서 교육만을 담당했다는 것은 국학이 고급 관료 육성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적극 활용될 수 없었던 한계점을 지닙니다. 따라서 국학은 신문왕에서 경덕왕에 이르는 신라의 절대적 왕권이 무너지는 순간, 각 정파와 학파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라 관료제가 무너지고 진골간의 상쟁으로 나가는 후기에 국학이 국립 학교로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3. 독서출신과의 실시 독서출신과는 원성왕이 즉위 한 신라 하대에 관료제를 다시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관료 선발제도입니다. 즉, 신라에서는 국학과 같은 전문기관에 비해 관료 선발 제도가 너무 늦게 등장한 것이지요. 독서출신과는 보통 독서삼품과라고 교과서에 나오곤 했었습니다. 이것은 국학 교육과정과 연계하여 유학의 경전과 중국 사서를 얼마나 이해했는가를 테스트하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4단계로서 상품, 중품, 하품 및 특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로서 국가가 국학을 지원하면서 학생들에게 녹읍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정착되고, 독서출신과를 우대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학적 교양과 능력 위주의 지식인 선발이라는 성격을 가진 탓에 신라 하대 기존 진골 귀족들의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죠. 결국 독서출신과는 골품적 혈연 관료들의 반발에 직면하여 흐지부지 된 면이 있습니다. 즉, 신라 후기에는 새로운 시대적 역할을 했어야 할 능력 위주의 기관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귀족간의 항쟁에 치우친 면이 있고 이것은 신라사회의 단명을 초래하고 맙니다. 실제 6두품 중의 교양과 실력을 갖춘 자들은 당나라로 넘어가 버렸고, 신라 말기에는 반신라체제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학과 독서삼품과는 고려시대 국자감과 과거제도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 국학에 대한 사료 국학은 예부에 속한다. 신문왕 2년에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대학감으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경은 1인인데 경덕왕이 사업으로 고쳤더니, 혜공왕이 다시 경으로 일컬었다. 관등은 다른 부서의 경과 같다. 박사, 조교가 있고, 대사는 2인 진덕왕 5년에 두었는데, 경덕왕이 주부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대사로 일컬었다 관등은 사지에서 내마까지로 하였다. 사는 2인, 혜공왕 원년에 2인을 더하였다. 교수하는 법은 [주역J, [상서], [모시], [예기]. [춘추좌씨전], [문선]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박사나 조교 1인이, 혹은 [예기], [주역J, [논어], [효경]을 가르치고, 혹은 [춘주좌전J, [모시], [논어], [효경]을, 혹은 [상서], [논어],.[효경], [문선]으로써 교수한다. 여러 학생의 독서에는 삼픔출신의 법이 있으니, [춘추좌씨전]나 [예기]나 [문선]을 읽어 그 뜻을 잘 통하고 [논어], [효경]에도 밝은 자를 상으로 하고, [곡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중으로 하고, [곡례], [효경]을 읽은 자를 하로 하되, 만일 [오경], [삼서]와 제자백가의 서를 능히 겸통하는 자가 있으면 등급을 뛰어넘어서 등용한다. 혹은 산학박사나 조교 1인을 명하여 [철경], [삼개], [구장]을 교수케 하기도 한다. 모든 학생의 등위는 대사 이하로 위가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하며, 나이는 15세에서 30세까지 모두 학업에 종사케 한다 9년을 기한으로 하되 만일 질박노둔하여 향상치 못하는 자는 퇴학시키며, 만일 재주와 도량이 성취할 만하되 미숙한 자는 비록 9년을 넘어도 재학케 하며, 등위는 대내마나 내마에 이른 다음 내보낸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경(卿) 1인을 두었다. - 삼국사기 8권, 신라본기 8, 신문왕 2년 6월 - 2월에 의박사, 산박사 1인을 두었다. 9월에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 수충이 당나라에서 돌아왔는데, 문선왕, 십철 72 제자의 그림을 가져왔으므로, 이를 국학에 두었다. 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8, 성덕왕 16년 9월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정하여 출신케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나 예기(禮記)나 문선(文選)을 읽어 그 뜻을 능통하고 겸하여 논어(論語)·효경(孝經)에도 밝은 자를 상품(上品)으로 하고, 곡례(曲禮)·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중명(中命)으로 하고, 곡례·효경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한다. 또 혹 오경(五經)과 삼사(三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능히 두루 통하는 자가 있으면 특채해서 등용한다. 이전에는 궁술로써 인물을 서택하더니 이 때에 이르러 개혁하였다.
- 삼국사기, 10권, 신라본기 원성왕 4년 - 청주 노거현을 학생 녹읍으로 하였다. 삼국사기 권 10 신라본기 10 소성왕 원년 3월 |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원저작자 로고>가 펌글에 자동 삽입됩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퀴즈풀이 > 역사 사료와 데이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발해의 연구 (1) | 2007.03.08 |
---|---|
(인용글) 한국 발해사 연구 현황 (1) | 2007.03.08 |
신문왕 대 국학의 설치 (2) | 2007.03.08 |
지증대사비문 - 신라말 유, 불, 선의 통합 사료 (1) | 2007.03.08 |
신라후기 호족세력의 대두 사료 (2) | 2007.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