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의 난립기에 제자백가 사상이 등장하다
1. 제자 백가 사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 제자 백가가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차분히 정리해 볼까요? 우선 당시 춘추전국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들이 모두 제자백가사상의 등장 배경입니다. 일단, 당시 농업혁명에 의해 발전된 농업경제는 새롭게 재산을 축적한 서민층의 성장이라는 것과 맥락이 닿습니다. 이 서민층들은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전쟁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운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사> 계급에 새롭게 포함되기 시작합니다. <사>란 원래 귀족 주변의 사적인 종자 성격으로서 일종의 <가신 계급>으로 성장한 계급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점차 사회변화와 맞물려 성장하면서 지식인, 군사, 관료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지식을 배경으로 지배층에 포함되기를 원하였고, 그 대가로 군공을 세워 기존 제후층에게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실제 <사>라는 용어를 보면 무사계급인 사족으로 <국인>층에 포함된 하층무사라는 어원에서 출발한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 체제에 맞는 입신출세를 원하였고, 군주를 보좌하면서 군주가 원하는 치국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던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진 계층입니다. 이러한 욕구와 맞물려 당시 사회에서는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도시국가들이 영토국가로 전환되는 과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군현제적 영토국가의 성립은 곧 사상과 지식, 학문적 논의가 국가단위에서 이루어지며, 전쟁을 통해여 그 지식의 범위가 확대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봉건질서의 붕괴는 곧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보급이 일반 서민계급과 황하강의 중원을 넘어 양쯔강의 이남 지역인 오랑캐 지역까지 파급됨을 뜻합니다. 이것은 폭발적인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지원하는 사회적 요건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당시 각국가들이 혼란기를 맞이하여 각자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입니다. 각 국의 군주들은 영토확장을 위해 인재를 우대하였고, 이것은 사상이 다양해지고, 다양한 학설이 각국에 전파되는 것을 장려하게 된 배경이 됩니다. 따라서 다양한 사상들은 각자 사학적인 학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다양한 사상들은 <사> 계층을 중심으로 고유한 사상체계로 <부국강병>의 근본적 방책을 제시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학자를 우대하여 다양한 사상이 모여 토론하던 곳이 제나라에 <직하의 학사>입니다. 2. 제자백가의 성격 제자 백가는 일단 사학적 성격을 가진 소규모의 학단들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당시 군주들의 부국강병책은 다양한 군주윤리와 사회윤리를 제시하였고, 그 윤리들은 각각 창시자로부터 구전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책이 부족했으며, 아직 한자라는 통합적인 글자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시기에 각 지역별로 문자체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단의 교육이란 스승이 제자에게 설명하고, 질문하고, 암기시키는 <도제적인 지식전달과 질문법에 의한 사고력 향상>이 제자백가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자백가는 개인적 사상체계라기 보다 개인이 속한 <학단>의 사상체계로 정착된 듯 싶습니다. 물론, 그 학단내에서도 많은 분파가 있고, 분파마다 약간 다른 학설이 있기도 합니다. 제자 백가 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주를 이루다 보니, 그 학풍이 관료제적 국가 운영체제 및 입신양명을 위한 학문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자백가 사상은 지배층의 윤리와 지배층의 정치 방식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제자백가의 논의가 있음으로서, 주나라 까지의 천명사상과 신정정치에 의한 미신적 정치관은 일단 탈피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문제가 신과 자연의 문제보다 선행된 문제로 인식되어 중국인 특유의 현실적 세계관의 기틀이 잡히게 됩니다. 또 지나치게 부국강병에 얽매인 철학 사상은 개인적 측면의 사상보다는 군현제적 체제에 부합된 국가윤리를 강조하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이후 학문과 정치라는 것이 일원화 되어 <관료가 학자이고, 학자가 곧 관료>가 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형이상학의 문제들도 현실 정치가들이 논하게 되고, 이상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등의 문제도 부국강병이나 치국에 맞는 변법적 측면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백가의 한계를 말하자면 국가주의적 윤리관을 추구함으로서 개인주의적인 인간행복의 가치를 공동체적인 규칙에 종속시켰다는 점을 일단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신앙을 추구하는 내세적이고, 열정적인 가치관은 이후 중국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네요. 제가백가는 중국의 철학이 사학적 성격의 철학으로 출발하여,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유, 도, 음양, 겸애, 태극, 오행, 법치 등의 사상을 탄생시켰다는 것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상들은 진나라에 의해 법가주의적으로, 한나라에 의해 유가주의적으로 일원화됨으로서 다양한 사상들이 획일화되어 음지에서 퍼졌다는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3. 제자백가의 형성 지역 제자백가 중에서 유가 사상은 서주문화권에서 많이 퍼졌습니다. 공자 자체가 노나라 사람으로서 중화권이었고, 유가는 중화의 근원지인 진, 위, 제나라 등에서 유행했습니다. 반면 유가를 차별애라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겸애를 주장하였던 묵가사상은 중원을 벗어난 남방에서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5패 7웅에 속하였던 남방의 최강국가 <초>에서 묵가사상이 가장 유행하였습니다. 유가와 묵가는 이념적인 대립 뿐 아니라 중원과 변방이라는 지역적인 대립도 심하였습니다. 도가는 원래 남방의 <초>에서 시작되었으나, 제나라 <직하의 학사>에 유입되면서 남북지역에서 고루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도가의 무위자연이나 소국과민의 주장은 당시 <부국강병>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도가의 이념은 현실적인 정치이념보다 이상적인 관념 수준으로 유행한 듯 합니다. 법가는 강력한 법치주의적 통치를 주장하는 내용 때문에 전국시대 각국에서 유행했습니다. 원래는 <한, 위, 조> 등 주왕실의 근거지인 국가들이 신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초, 제, 진 등 변방국가들에 전파되었고, 각국의 변법 추진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초기에 이런 지역색을 가지고 있었던 각 제자백가 사상은 전국시대 중기를 지나면서 상호 융합되어 각 지역별로 사상들이 서로 경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결국 통일을 이룬 것은 진나라의 <법가주의적 부국강병책>이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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