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독일 봉건국가의 발전
1. 9세기 - 동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된 형식상의 통일 국가 독일의 역사는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프랑크 왕국의 분열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베르됭-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후 독일지방은 동프랑크 왕국으로서 수많은 소국들이 난립한 후진국이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프랑스(과거 로마의 갈리아 지방)와 달리 로마 문화에도 속하지 않은 변방이었고, 프랑크 왕국의 중심지도 아니였습니다. 이곳은 로마의 행정제도도 볼 수 없고, 영주제도 미약한 말 그대로 어리버리한(?) 지역이었죠. 단순히 족장 수준의 귀족과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아온 자영농이 거주하는 자유 지역이었습니다. 9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의 핏줄로 내려오던 카롤링거 왕조가 약해지자, 각 지역을 다스리는 부족공들은 동프랑크 왕국의 위세를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부족의 족장들은 왕령을 잠식하고, 왕이 보낸 관료(주백)을 무시했으며, 크리스트교 교회를 자신들이 조종하려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동프랑크에서는 각 공국이 왕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였습니다. 각 부족들은 통일을 원하지도 않았고, 자치를 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9세기 이후 유럽의 상황은 노르만족과 마자르족이 각각 북부와 동부에서 공격해오는 역사적 변환기였으므로, 독일의 부족장들은 이민족을 막기 위해 형식적으로 <왕>을 선출하기로 합니다. 또 교회에서는 부족장들의 임의적인 지배에서 탈피하고자 왕에 대한 기대를 크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냥 선출된 왕이 하인리히 1세입니다. 그는 부족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부족장이었으나, 실제 이민족의 침입을 격퇴하는일 외에는 별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명목상의 군주일 뿐 실제 독일의 정치는 각 부족공들이 이끌어 나가는 지방자치적 분권제도였습니다. 2. 10세기 -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을 건설하다. 10세기에 오토 1세는 부족공들과 함께 마자르족을 격파하고 이민족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토 1세는 근거지인 작센 지역의 군사력과 교회의 협조를 얻어 <신성로마제국>을 건설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은 과거 로마의 영광을 재현해서 강력한 제국을 만들고, 왕권을 견고하게 하겠다는 오토 1세의 의지가 담긴 국호였습니다. 오토 1세가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단 교회의 협조가 필수였습니다. 오토 1세는 각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는 부족공들을 누르기 위해 유력한 교구의 주교, 수도원장에게 최대한의 권력을 부여하고, 재산도 인정해줍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교황과 유력 수도원은 오토 1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부족공들을 견재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교회는 왕권의 보루요, 신성로마제국은 교회의 젖줄이 된 것이지요. 교회 세력들은 광대한 영토와 재산을 가지고 마치 자신들이 행정관료(주백)인 듯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토 1세의 근거지인 작센 부족들이 오토 1세에게 강력한 군사력을 제공함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기반이 잡혀갔습니다. 물론 이러한 정책으로 폐단도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럽 전 지역을 통털어 교회 세력이 가장 활기차게 활동하는 곳이 독일이 된 것이지요. 루터의 종교개혁부터, 훗날 신구교의 30년 전쟁까지 종교개혁기의 파란 만장한 사건들은 모두 독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3. 신성로마제국의 이탈리아 정책이 시도되다. 오토 1세는 롬바르디아 지방을 정복하면서 남부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합니다. 그는 과거 로마의 영광을 추구하는 독일 국민의 신성한 로마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이념으로 가득 찬 야삼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왕관을 받게 되면서 <국왕권과 황제권>이 결합한 독특한 신성로마제국의 국가 성격이 시작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신성로마제국은 안으로는 부족공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한 국민적인 국가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로마 황제권을 지향하는 국가였습니다. 이 2가지의 이념이 결합함으로서 독일에서는 민족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측면의 교황권이 나타난 것이지요. 오토 1세는 안으로는 독일 내 부족공들의 세력을 억누르면서도, 밖으로는 과거 로마의 영광을 찾기 위해 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이탈리아 경영 정책>에서 나타납니다. 로마를 계승한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한 황제권을 위하여 과거 이탈리아의 중심지인 로마를 경영하려 합니다. 로마 경영이 곧 보편적 권력의 기본 조건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탈리아를 수중에 넣기 위해 롬바르드족을 무찌르고 남하하면서 또 하나의 보편권인 <교황권>과 마찰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때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보편권과 교황의 크리스트교의 보편권이 충돌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국내의 정치가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로마 경영만큼은 확실하게 하려고 했으나, 교황은 이것을 교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인식합니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독일의 대내적인 통일에 힘을 기울이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여 독일, 이탈리아가 모두 통일국가로 나가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실제, 독일과 이탈리아는 19세기에 가야 통일됩니다. 또 이러한 대립 속에서 죽어나는 것은 북이탈리아의 소국들과 해양 도시국가들이었습니다. 특히 피렌체나 나폴리와 같은 해양국가들은 자국의 실리에 따라 양쪽 중 한쪽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나가는데, 이것이 황제권, 교황권의 싸움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실제,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황제가 교황에게 굴복한 것도 토스카나와 피렌체 같은 지역들이 교황권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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