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독일의 발전 3편 - 12c 호엔쉬타우펜 왕조 ~ 15세기 합스부르크왕조
중세 독일사 1,2편에서 다루었던 핵심적인 내용은 작센제후의 신성로마제국이었습니다. 오토 1세의 신성로마제국은 보편적인 황제권과 독일 국민의 국왕권이라는 2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독일내 통일국가 + 로마제국의 세계국가를 동시에 실현항려고 하였죠. 그 결과 교황권과 크게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카노샤의 굴욕, 보름스 협약 등을 거치면서 교황권과 어느 정도 타협하게 됩니다. 교황권과의 대대적인 마찰이 끝난 후 신성로마제국은 이제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국의 국내문제라는 것도, 항상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와 연관이 되는 관계로, 역사가 평탄치만은 않습니다. 그럼 12-13세기의 신성로마제국의 왕들인 프리드리히 1세와 2세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1. 12c 이제 왕령 확장에 주력하다. : 프리드리히 1세 12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왕령 확장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이 왕령 확장은 12세기 영국의 헨리 1세, 프랑스의 필립 2세 등이 성공을 거둔 시대적인 정책으로 신성로마제국도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에서는 봉건제후의 세력이 너무나 강력했습니다. 실제 프리드리히 1세는 독일 안에서 왕령을 넓히려는 생각은 초창기부터 포기한 듯 싶습니다. 과거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이 항상 이탈리아 정책을 실시하며 교황권과의 투쟁을 지상목표로 삼았던 만큼, 내부적인 봉건제후들을 통제하는 것은 어찌보면 수습불가에 가까운 상황이었죠. 프리드리히 1세는 제후들을 제압하기 보다는 제후들과의 연합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즉, 대제후들의 영지내 영주권, 불입권을 철저하게 인정하면서, 황제의 신하로서 봉건적 의무에 충실해 달라는 일종의 타협이었습니다. 결국 프리드리히는 독일을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기 보다는 철저한 봉건국가로 만든 후 <봉건제후>들에게 가신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라는 이념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죠. 문제는 독일 내 제후가 아니라, 지금까지 신성로마제국이 그토록 오랫동안 공들여왔던 교황령 <이탈리아>의 영토였습니다. 당시 독일과 교황령 사이의 롬바르디아 평야는 자치공동체적인 성향이 강한 도시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이 도시국가들을 접수함으로서 왕령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국가들은 롬바르디아 도시동맹으로 견고하게 연합하여 <도시 자치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봉건제후세력들을 이끈 강력한 대군으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레냐노에서 도시동맹국가들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이탈리아 북부의 침입은 교황을 격노하게 만들어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이 카노샤 굴욕이후 또 한판의 큰 싸움을 할 판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과의 싸움을 피해야 했으나, 지속적으로 이탈리아 정복을 시도하였고, 결국 독일의 봉건영주들과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끊임없는 전쟁만을 일삼으며, 통일국가로서 발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실제 독일과 이탈리아의 이러한 관계는 19세기 중반에 가서야 독일, 이탈리아 각국이 통일국가로 단결하는 긴 역사적 비극을 초래합니다. 2. 13c 이제 왕령 확장에 성공하다. : 프리드리히 2세 13세기의 유럽사는 <교황권의 절정기> 시대인 교황 이노센트 3세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은 아직도 봉건영주들조차 왕이 어찌할 수 없는 소국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도움으로 겨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왕으로서, 왕에 오를 때 교황에게 십자군 출병을 꼭 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허수아비가 아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독일, 이탈리아> 양 지역을 모두 접수하여 <로마제국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강요로 십자군에 출병하기는 했으나, 싸울 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성지로 출병했지만, 이집트 슐탄과 협약을 맺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임대하여 돌아옵니다. 이것이 6차 십자군이지요.(십자군 편 포스트에서 자세힐 설명해 놓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십자군 출병을 하겠다는 약속은 지킨 점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로 진격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교황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와 중부 이탈리아를 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합니다. 이 이탈리아 정복으로 그는 이탈리아에서 만큼은 절대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관료군을 양성하여, 근대 국가와 흡사한 관료제, 상비군을 이탈리아 지방에 상주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탈리아에서 멜피헌장을 발표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왕권을 절대화 한다는 내용입니다. 1. 이탈리아 내 봉건귀족과 도시의 자치권은 대폭 축소한다. 하지만, 이러한 멜피헌장으로, 로마르디아 도시동맹 등 도시국가들을 크게 반발합니다. 멜피헌장의 내용이 <도시자치권>을 너무 크게 침해하였기 때문이죠. 또, 신성로마제국의 확대를 견제하려는 교황 역시 도시동맹을 적극지지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 내에서만큼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운영할 수 없었습니다. 지방 제후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지요. 그는 <독일 제후의 이익을 위한 헌장>을 발표하여 독일 내에서는 관료제와 상비군이 아닌, 과거의 봉건제도를 계속 유지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프리드리히 2세의 제국은 독일 내 봉건국가, 이탈리아의 근대 절대국가라는 이원적 체제의 국가를 성립시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3세는 이탈리아에서도 봉건국가 형태로 영지를 지배하려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이탈리아 영지를 모두 잃었고, 독일 내 제후들도 국왕에 반발하여 왕권은 한없이 축소됩니다. (관련 내용은 토스카나 가문 포스트, 또는 카노샤의 마틸다 관련 포스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3. 13세기 중반 : 대공위 시대 이제 프리드리히 2세 사후 호엔쉬타우펜조는 몰락하였고, 독일은 중심을 잃고 완전 분열되었습니다. 기사와 제후들은 봉건체제를 고집하였고, 도시국가들은 자치권을 내세우며 타세력의 간섭을 거부하였습니다. 황제는 아예 없었고, 구심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소위 대공위 시대라고 합니다. 4. 14세기 중반 : 황금칙서(금인칙서)로 황제를 선출하다 대공위 시대 이후 황제자리는 공석이었고, 스스로 황제라고 우기는 룩셈부르크가문, 합스부르크가문 등이 자신의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7명의 선제후들이 다수결로 황제를 선출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는데, 이 시대를 <황금칙서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황제가 있긴 하나, 황제는 외부 침입에 대항하기 위한 일시적 수단으로서만 존재합니다. 실제 신성로마제국의 정치는 7명의 선제후들이 각자 독자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선제후 등 대제후 세력들이 이끌어간 봉건 사회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업무는 선제후들이 감시하는 체제였습니다. 이 체제로 인하여 서로 황제라고 우기는 관례나, 황제선출의 합리성은 확보하였지만, 황제권은 있으나 마나한 무력한 권한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체제이기도 합니다. 5. 15세기 중반 : 합스부르크가가 황제권을 가져오다 15세기 선제후 가문 중 가장 유력한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을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다른 선제후들의 간섭을 받는 <선제후>가문의 하나였을 뿐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국내외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을 하였습니다. 교황에게 <교황령을 영구히 포기한다>라고 말함으로서 교황청과의 관계를 친선관계로 돌립니다. 또, 선제후들에게는 <독일 내 중앙집권을 완전히 포기한다>라고 말함으로서 독일 제후들의지지를 얻어냅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더 이상 이탈리아 정복전쟁을 할 수 없었고, 영토내 제후들을 통제할 힘도 없게 되었습니다. 독일 국가들은 각자 영토를 가진 영방국가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도시자치권>을 가지고, 상권을 장악하여 부를 축적하였지만, 신성로마제국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모든 일들은 황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후 중심의 의회에서 결정하여 황제가 집행하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러한 제후 중심의 의회를 <신분제 의회>라고 하며, 제후나 의회 세력에 의해 국왕권이 간섭받는 국가를 <신분제 국가>라고 합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에는 신분제 의회가 있다고 할지라도 왕권의 발언권이 강하여, 국왕이 의회의 힘을 능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통해 절대왕정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경우는 전혀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보통 독일의 신분제 의회인 제국의회를 가장 전형적으로 왕권이 제약당하는 <신분제 의회>라고 말합니다. 신분제 의회 기의 영토국가의 특징은 제후들이 중심이 되어 각기 자신의 영역에 국가를 세우고, 독립적으로 국가운영을 한다는 것이지요. 6. 모두가 따로 노면서, 모두가 뭉치는 <신분제 의회>를 만들다. 신성로마제국의 유명무실화로, 모든 사회세력들은 각자 놀게 되었습니다. 한자 동맹 등 도시 동맹들은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도시끼리> 놀기 시작했습니다. 하급기사들은 기사동맹을, 성직자들은 교황청 아래 뭉쳐가면서 모든 세력들을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려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시의 시민, 하급기사, 하급성직자들은 자신을 지배하려는 봉건영주로부터 자유로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각 영주의 영지마다 <신분제 의회>를 설립합니다. 즉, 신성로마제국에는 제후들의 <제국의회>가 있어서 왕권을 제약하듯이, 각 영주의 영지에는 하층민들의 <신분제 의회>가 성립되어 봉건영주들이 시민과 성지자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제약을 가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독일의 전형적 신분제 의회입니다. 특히, 당시 신성로마제국이 약화되면서 각 지역의 영주들은 모두 스스로 주권을 가진 <영방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영방국가는 재판권, 과세권, 화폐주조권 등 국가 공권마저 장악하여 그 지역안에서 소규모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의회> 소집권을 장악하여 국왕권을 농락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의 <제국의회> 논리에 맞서, 각 영방국가내 시민과 자유민들은 <영지내 신분제 의회>로서 절대화되어가는 영방영주권에 대항한 것입니다. 특히, 독일이 신분제 의회는 영국의 모범의회, 프랑스의 삼부회 등의 신분제 의회와는 성격이 아주 다른 특이한 상황에서의 의회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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