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권 투쟁 4장 - 서임권 문제 총정리
지난 장에서 서임권 문제의 배경은 수도원 개혁운동으로, 서임권 문제의 핵심 사안은 토스카나 가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마지막 장에서는 서임권 문제를 학문적 입장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임권 문제의 배경 서임권 문제의 배경은 성직자 임명권이 <세속 제후>에게 넘어간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세속 제후가 서임권을 가진 것은 중세 전체의 사회적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즉, 노르만 등의 이민족 침입으로 혼란해진 서유럽은 <봉건제도>라는 유럽 중세 특유의 제도를 성립시켰고, 봉건제도에서는 <불입권, 영주권> 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영지 지배체제(지방분권체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각급 하부단위 교회는 봉건제도의 장원안에 설립된 관계로, 영주의 지배체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것이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성직자 임명권이 장원이나 대지주의 손에 넘어간 근본 원인입니다. 또, 각 교회를 다스리는 장원 영주들은 모두 상위 주군에게 충성하였으므로, 교회의 핵심 서임권은 <국왕>에게 있다는 <왕권신정론>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즉, 교황은 하느님의 명을 정신세계에서 받들지만, 국왕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목자로서 정치한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왕권신정론>은 지상의 교회에서도 국왕이 절반의 권리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교회에 대한 개혁을 추구하는 세력이 있다면 왕권에 대한 도전이요, 서임권에 대한 태클을 거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의를 구체화하면서 국가권력과 보편권력, 교회권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고대 로마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국가가 오토 1세 이래의 <신성로마제국>입니다. 2. 신성로마제국이 싫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1,2번째 서임권 논의에서 토스카나 가문과 연결하여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토스카나 가문은 하인리히 가문에 의해 멸문된 카노사 지역의 이탈리아 유력 가문으로, 신성로마제국에 원한이 있었고, 그 후예들이 <힐데브란트>라는 성직자를 적극 밀어주어 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됨은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에 즉위하자 또 하나의 보편권을 주장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정면 충돌합니다. 어쩌면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서임권 문제도 이들에게는 누구의 보편권이 더 강한가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밀라노의 주교 선출>에 대하여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권에 대한 교황입법을 발동하여 <교황이 황제를 폐위시킬 권한이 있다>는 것을 천명합니다. 레오 9세 이래 교황이 당연시 한 이 교황입법은 사실 황제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교황이 황제를 협박하자, 황제는 그레고리우스는 교황권의 찬탈자이자, 토스카나 가문에 빌붙은 파렴치한으로 매도합니다. 교황은 황제의 답신을 듣고, 바로 황제를 파문합니다. 황제가 파문당하자 독일의 제후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반 황제파를 결성하고 교황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하인리히는 국내 단속을 하지 않고 교황에게 덤벼든 것을 후회하고 토스카나 가문의 근거지인 <카노사>에서 맨 발로 3일간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그러나, 카노사의 굴욕이 황제권의 몰락을 뜻하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이후, 국내 반대파 제후들을 모두 제압하고, 다시 그레고리우스 7세를 공격하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비참하게 도망다니다가 죽고 맙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도 온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교황이 죽은 뒤 이탈리아 토스카나 가문이 새로운 교황 우르반 1세를 뽑고, 그를 이용하여 하인리히 4세를 공격하여 죽게 만듭니다. 실질적인 승리자는 토스카나 가문이었으며, 이 때부터 세력을 뻗치게 되는 것은 이탈리아의 소국가들이 되었습니다. 토스카나의 지원을 받은 우르반 1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하고자 했으나, 실현하지 못한 <예루살렘 탈환>의 꿈을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논의하게 되었고, 마침 비잔틴 제국의 요청으로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길고 긴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3. 서임권 문제는 계속되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권이 황제권을 압도하기는 하였지만, 각 국가의 왕들은 쉽게 <서임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헨리 1세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서임권이라는 것은 섬 너머 딴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헨리 1세는 성 안셀모를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교회를 자신의 수족들로 채우려고 했는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안셀모가 헨리 1세를 거부하고 서임권 문제에 있어 헨리 1세에게 대들기 시작한 것이죠. 당시 교황인 파스칼 2세는 당연히 안셀모를 지원하였습니다. 결국 영국에서는 대륙보다 왕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권과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 주요 내요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교는 교회 내에서 선출한다. 교황인 파스칼 2세는 이러한 서임권 투쟁이 계속되자 아예 모든 주교들은 왕에게서 봉토를 받지 말고 영적 세계에만 전념하라는 이상주의적 개혁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속군주가 서임권을 가지는 원인을 주교들이 <토지>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토지를 바라지 않는 주교들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파스칼 2세의 개혁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교황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하인리히 5세)와 서임권 문제에 대하여 영국에서 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스칼 2세가 맺은 조약에는 <국왕은 교회내에서 주교를 선출할 때 직접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교회와 공유할 수 있다.> 가 첨부되었습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보름스 협약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교회의 주교는 상당히 애매한 입장에 됩니다. 그는 교황에 신속한 교회의 지도자이지만, 왕에게 영토를 받은 봉건 신하가 됨으로서 영적세계와 세속세계의 일에 동시에 관여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서임권 문제는 결국 영적인 교회와 세속적인 국가가 공존한다는 중세 사회 지배 체제의 특이함을 보여줍니다. 실제,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한 지역은 중세 서유럽 외에는 별로 없는 듯 합니다. 보통 아시아 지역에서는 왕권과 신권이 일체화된 제정일치적 경향이 강하니까요. 그러나, 서유럽사가 세계사인 양 전파된 근대 이후의 시기에 이러한 봉건적 이중질서를 세계사적 보편성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봉건제도는 장원이라는 경제적 측면과 주종관계라는 정치적 측면에서만 보야될 것 같습니다. 유럽 정치사를 다 보편화 시키면 제대로 들어맞는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요. 또 하나 서임권 투쟁이 유럽사회에 미친 중요한 영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국가세력이 상호 싸움을 계속함으로서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소국, 제후들은 독립적인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세력들은 교황을 절대적 권력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독일의 제후들은 독일 국왕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독일, 이탈리아는 더욱 분열된 상태로 나아가 19세기까지 분열된 체제로 나가게 되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중세부터 비롯된 혼란한 역사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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