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4세와 철의 여인 마틸다 - 그들의 복수와 재복수
1. 하인리히 4세의 복수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을 새로운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은 육체적 치욕일 뿐, 히인리히가 황제권을 잃은 것도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한번 머리숙여 빌어서 교황에게 파문당한 것도 회복되었으니까요. 황제를 견제하던 영주들도 교황이 황제를 (비록 치욕적인 굴욕이었지만) 용서함으로서 더 이상 황제를 몰아붙일 구실을 잃었습니다. 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후회하게 됩니다.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를 폐위하려고 했지만, 교황이 황제를 용서함으로서 우왕좌왕하게 되었고, 독일은 서로 죽이고 죽이는 내전상태에 빠졌습니다. 교황은 후회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인리히 4세를 죽였어야 했습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다시 힘을 키우면서 다시 그레고리우스 7세를 이단자로 여겨 폐위한다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황제는 독일 안의 반대파 제후들을 숙청한 뒤 로마로 쳐들어가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와 파문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클레멘스 3세를 교황으로 새롭게 뽑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슬람교 세력과 싸우고 있던 노르만 장군인 로베르 기스카르의 도움으로 겨우 다시 교황으로 복직했지만, 노르만족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로마 시민들은 이미 약점이 많은 교황 그레고리우스를 인정하지 않고 로마에서 추방시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즉 힐데브란트는 유랑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카톨릭에서는 아름답게 기록하였고, 훗날 성인으로 그를 추앙합니다. 2. 마틸다의 재복수 토스카나 가문의 마틸다는 황제에 대한 복수로 일생을 살아왔지만, 자신이 그토록 평생 지원하던 힐데브란트(그리고리우스 7세)가 죽어 버리자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카노사의 굴욕을 주도하면서 한번 승리의 맛을 보았던 그녀였습니다. 다시 한번 복수를 꿈꾸며 일어섭니다. 자기 가문을 멸족시킨 황제에게 다시 한번 복수할 것을 맹세한 마틸다는 이제 하인리히와 정면 대결을 벌일 생각을 합니다. 일단 그레고리우스가 죽은 뒤 새 교황 선출로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 그녀는 황제파 교황인 클레멘스 3세를 거부하고, 새 교황으로 개혁파 수도원인 클뤼니 수도원의 청렴한 주교 우르바누스 2세를 밀어줍니다. 로마 시민 역시 청렴한 이 새 교황을 적극 지지해서 황제파 교황은 로마에서 추방당합니다. 다음으로 마틸다는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드를 유혹합니다. 그녀는 콘라드에게 이탈리아 왕의 자리를 준다고 하면서 그를 유혹하였고, 하인리히의 모든 측근들을 권력으로 유혹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모으기 시작합니다. 하인리히 4세의 부인인 프락세디스도 아들 콘라드를 위해 남편을 배신하고 마틸다에게 와서 카노사에 정착합니다. 하인리히는 열받아서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어리석다고 욕하였지만 누워서 침뱉기였죠. 마틸다는 콘라드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 불러주었지만, 영지도 없는 이름뿐인 황제자리였습니다. 콘라드는 결국 이름뿐인 황제자리만 가지고 떠돌다가 27의 나이로 죽습니다. 죽을 땐 마틸다를 원망하며 아버지에게 가고 싶어했지만 이미 늦었죠. 한편, 마틸다가 밀어준 우르바누스 2세 교황는 예전 그레고리우스 교황와 마틸다가 계획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던 십자군 원정을 실제로 추진합니다. 당시 1차 십자군은 전 그리스도 세계를 하나로 묶어줄 만큼 열정적이었고 1099년 실제 성지를 탈환하였습니다. 이 때가 가장 열정적인 십자군이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서 하인리히 4세는 완전 소외당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차남인 하인리히 5세에게 마지막으로 기대했지만, 하인리히 5세도 마틸다의 교묘한 공작 속에서 아버지를 배신하고 교황에게 가버립니다. 거기다,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납치해서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물려받습니다. 이후, 백성들이 반인륜적인 행동을 규탄하여 하인리히 4세를 구출하기는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비참한 상태로 결국 죽고 맙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와의 처절한 싸움에서 카노사의 굴욕까지 감수하면서 결국 승지가 되었던 철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렇게 철의 여인 마틸다의 복수에 당한 채, 희생양이 되어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카톨릭 교회는 훗날 그레고리우스 7세를 성자로 추앙합니다. 단테는 그 유명한 신곡에서 마틸다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투사의 상징으로 찬양합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그 업적은 사라지고, 단지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힘없는 황제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카노사는 역사의 인물들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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