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서임권 투쟁과 카노사의 굴욕, 그리고 토스카나 가문
1. 로마의 몰락과 중세의 시작 로마가 몰락하면서 고대는 끝나고 중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점차 옛 로마의 영광을 잊어가기 시작합니다. 2백만이 넘는 고대 초호화 도시 로마는 게르만과 노르만의 침입 이후 인구 2만에 불과한 추억의 도시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의 역사가인 프로카치는 로마의 역사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동안의 경위를 설명하자면 복잡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드높이 쌓아올렸던 것들이 끝도 없이 무너져서 소멸해갔다. 로마 제정 말기의 엄청난 경제, 사회적 위기와 이민족의 침입, 그리고 6세기 고트족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이탈리아를 망가뜨렸다. 그리고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에 남하하여 정착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경제는 쇠퇴하였고, 정치적 통일도 붕괴되었다.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인구가 감소했고, 생산력이 저하되었으며, 풍속은 저속하게 변해갔다. 그것은 문명의 퇴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로마라는 이름으로 <고대의 호수>를 이루었던 왕국은 사라졌습니다. 지중해는 분열되었습니다. 지중해 남부는 이슬람이 지배하였고, 이베리아, 시칠리아도 사라센이 차지하게 됩니다. 사라센 해적들은 기독교인들은 바다위에 판자 한 장도 띄울 수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동쪽에서는 마자르족이 발칸 반도를 잠식했고, 북쪽은 노르만족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언어의 통일성도 붕괴되었고, 봉건제는 유럽사회를 갈갈이 찢어놓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나마 유럽사회의 통일성을 이어주는 끈은 기독교였습니다. 가톨릭 교회만이 보편적이고, 통일적인 사회 조직으로 살아남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처 교회에 의지하려고 하는 분위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즉, 중세사회는 기독교적 위계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구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구조가 중세사회를 대표하게 됩니다. 세속적으로는 왕, 공작, 후작, 백작 등으로 이어지는 쌍무적 계약관계로서의 봉건적 피라미드 구조가 정착하게 되죠. 즉, 영적으로는 교황, 세속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유럽사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2. 교회와 황제에 대한 견제 중세의 이러한 교황-황제라는 이중적 피라미드 구조는 그 내부사정이 복잡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세속을 대표하는 명목상의 절대군주였지만, 실제로 그 영지에 해당하는 독일, 이탈리아 귀족들은 봉건제의 논리에 따라 제국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들은 황제가 상징적 지위 이상의 힘을 갖고 봉건 영주들을 위협하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황제의 권한이 커지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교황의 입장은 더욱 복잡했습니다. 세속의 권력자들은 교황의 지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고, 11세기 이후 교회는 성직매매 등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세기에 접어들면 교황과 황제는 새로운 권력체계를 수립하고자 노력합니다. 클뤼니 수도원 등이 청결, 복종 등을 내세워 교회정화운동을 시도하면서 교황을 지지하였고, 교황은 서서히 힘을 가지고 유럽세계를 정신적으로 통일하고자 했습니다. 황제권 역시 하인리히 3세의 개혁운동으로 강력한 왕권을 갖고자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곧 교회와 황제가 서로 힘을 키우기 위해 연합하기 시작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시적으로 연합했지만, 서로의 목적은 상반되었습니다. 상대방보다 더 큰 권력을 잡는 것이 마지막 목적이었으니까요. 3. 토스카나 가문의 몰락 카노사를 포함하는 토스카니 지역에 근거지를 둔 토스카나의 대영주 보니파치오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인 베아트리체 사이에 큰 딸인 마틸다를 두었습니다. 이 토스카니 가문은 교회쇄신운동에 앞장서서 개혁파 수도사들을 보호하면서 개혁파 교황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반교황파 보수 세력은 이 개혁적 대영주인 보니파치오를 암살해서 죽여버립니다. 그의 부인 베아트리체는 고트프리드라는 야망많고 강력한 힘을 가진 공작과 다시 결혼합니다. 고트프리드는 토스카니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노르만과 협정을 맺고 이탈리아 왕의 자리에 오를 계획을 꾸밉니다. 교황은 이 사실을 알자 북쪽의 노리만과 남쪽의 토스카나가 협공을 하면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황제인 하인리히 3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황제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고, 황제 - 교황의 연합군은 토스카니의 고트프리드를 공격하였습니다. 고트프리드는 싸우기도 전 겁을 먹고 도망쳤으며, 베이트리체와 그의 딸 마틸다는 하인리히 3세에게 끌려가 굴욕적으로 목숨을 애원하며 겨우 생명을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토스카나 가문은 그 2명을 제외하고는 멸문을 당하게 됩니다. 어린 마틸다는 이 때부터 황제 하인리히 3세를 죽이는 일을 평생의 숙원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4. 토스카나 가문과 힐데브란트의 절묘한 만남 어느 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리고 황태자는 나이가 어렸습니다. 전에 도망쳤던 토스카나 가문의 고트프리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어린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아내인 베아트리체와 딸인 마틸다를 구출합니다. 또 토스카나와 로렌의 소유권을 어린 황제가 승인하도록 하여 부지불식간에 권력을 잡게 됩니다. 또, 마침 교황이 죽자 고트프리드는 자신의 동생을 교황 스테파누스 9세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고트프리드는 이러한 기반만을 다지고 갑자기 죽었습니다. 이제 권력은 부인인 베아트리체에게 넘어갔습니다. 베아트리체는 당시 교황청의 최대 실력자인 힐데브란트에게 접근하여 그와 함께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됩니다. 이 힐드브란트라는 인물은 아무 가진것도 없이 신앙에 대한 열정만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6세를 모셨고, 클뤼니 수도원에서 일했으며, 레오 9세의 모사를 하는등 25년 동안 8명의 교황을 모시며 로마 교회가 분열되고, 세속화되고, 타락화된 것을 모두 본 장본인이었습니다. 힐데브란트와 베아트리체의 목적인 같았습니다. 힐데브란트는 교권 강화를 추구하기 휘해 황제권을 넘어서려 했고,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딸 마틸다는 가문의 복수를 위해 황제권을 넘어서는 것이 목적이었죠. 이 힐데브란트가 얼마 후 교황이 되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그레고리우스 7세입니다. 5.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 개혁운동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교회 개혁운동부터 시작합니다. 그의 개혁운동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됩니다. 1. 성직자의 풍기를 바로 세우다. - 이것을 위해 그레고리우스는 전 성직자를 적으로 돌릴 것을 감수하고, 모든 신부들을 이혼시켰습니다. 또 성직매매 등에 대하여 아주 강한 처벌을 하였습니다. 2. 십자군을 일으켜 성지를 탈환하다 - 이것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판단하여, 후대 교황을 위한 사업으로 준비작업만 해둡니다. 3. 황제의 성직자 서임권을 철폐하고, 교황을 수장으로 하여 서유럽 전체를 정치적으로 통일하다. 문제는 3번이었습니다. 3번 과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호적 관계였던 황제와 전쟁도 불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마침, 신성로마제국은 청년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즉위하여 강력한 황제권을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는 일단 전략적 요충지인 카노사 지역을 토스카나 가문의 딸 마틸다에게 맡기었습니다. 6. 카노사의 굴욕 그레고리우스 7세는 주교 회의를 열어 다음과 같은 글을 포고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서임권 투쟁의 시작입니다. 1. 주교와 수도원장이 세속군주로부터 서임받는 것을 지금부터 금지한다. 2. 교황에게는 황제를 폐위시킬 권한이 있음을 포고한다. 3. 돈으로 지위를 산 황제의 고문 주교 5명을 파문한다. 파문이라는 것이 별거 아니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는 기독교가 지배하던 사회였기에 파문은 사형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파문당하면 결혼, 장례미사, 고해성사, 축복 등을 받지 못하고 임종 때에도 축복받을 수 없었습니다. 즉, 이것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고, 구원의 희망이 영원히 사라지는 저주를 뜻합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아주 크게 열받았습니다. 교황의 포고문을 완전 무시하면서 그는 하인리히 4세에 대해 맞포고문을 발표합니다. 그 주요 내용은... 1. 교황은 부정과 악행을 저질렀으며, 교황으로서 자질이 없다는 것 2. 교황이 토스카나 가문의 마틸다에게 흑심을 품어 부정한 관계에 있다는 것 3. 따라서 가짜 수도사 힐데브란트를 폐위한다는 것 등입니다. 교황은 사실 젊은 황제가 이러한 반응으로 나올 것을 예상했습니다. 교황은 이 포고문을 받자마자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하며, 황제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은 그 서약을 무효로 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포고문을 받은 영주들은 바로 교황의 편으로 돌아섭니다. 만약 황제가 이긴다면 황제권이 강화되어 봉건영주들의 기득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독일의 제후들은 황제를 파문한다는 교황의 말을 적극 지지합니다. 결국 황제는 궁지에 몰려 자신이 뭔가 잘못판단했다는 것을 깨닫고, 토스카나 가문의 카노사까지 찾아가 교황을 만나 사죄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눈오는 성문앞에서 3일간이나 무릎꿇고 비는 모습을 보여 겨우 교황의 용서를 받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며, 교황은 이겼다는 자신감에 기뻐했습니다. 더 기뻐한 것은 가문의 원수를 갚았다고 생각한 토스카나 가문 사람들이었습니다. 힐데브란트를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으로 전폭 지지한 효과를 이제야 본 것이지요. |
카노사의 굴욕과 관련된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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