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이야기 41 - 한무제의 국가재정 장악 정책
중국 한나라의 이야기는 절반 이상이 한무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대 사회에서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유교, 불교, 율령, 한자 체제를 정비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면에서 중국 고대의 전통을 정리하고, 이후 중국체제의 기반을 잡았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들을 알면 중국 전반의 제도와 사상이 눈에 잘 들어옵니다. 이번 장에서는 간략히 한무제의 재정 장악 정책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황실재정은 국가 재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무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진시황이 시도한 정책이긴 하지만 진시황은 실패했었고, 실제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한 사람은 한무제입니다. 한무제는 황제전제지배체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이 필수였지만, 중앙집권을 확립하면서 <전매제도, 균수-평준법> 등의 국가통제정책으로 엄청난 국가재정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재정을 뿐 황제 개인의 재정은 아닙니다. 그는 황제 지배체제를 경제적으로 뒷받침 하려면 국가재정의 확보와 함께 황실재정도 독자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황실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재정과는 별도의 다양한 제도를 마련합니다. 이 제도는 사기의 화식열전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2. 황실재정을 뒷받침하는 기구 황실재정이란, 국가재정과는 다른 황제 개인의 사생활을 위한 사적 재정을 말합니다. 한무제는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기구는 9경 중 <대사농>에게 맡기었는데, 황제 개인의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는 9경 중 <소부>에게 맡기어 재정을 2원화 하였습니다. 실제 국가 세금중 물품세(토지세 : 전조), 인두세(산부, 경부, 산자) 등은 국가 공공 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토지 외의 상공업에서 나오는 세금은 황제 재산으로 간주하였고, 미성년자에게 받는 인두세(구부)도 황제 개인이 관장하였습니다. 또한 산림, 하천 등의 자연 물산은 모두 황제 개인의 재산이라는 유교적 왕토사상을 기반으로 자연에서 나오는 산물은 모두 황제의 재정으로 귀속시켰습니다. 따라서 자연 물산을 유통시키는 도시의 상인들과 관계된 세금은 황제의 것이었죠. 또 지방 제후들에게는 천자에게 제사지낼 금을 바치라고 하면서 막대한 금을 걷었는데,(주금률) 이것도 황제의 재산이었습니다. 한무제는 오수전 등 화폐도 독점주조하여 황실재정을 늘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부 외에 <수형도위>라는 기관을 만들어 화폐를 전담하게 하여 황실재정을 늘렸습니다. 3. 조세 금납화를 시작하다. 아시아에서 고대 사회의 세금은 대부분 인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인두세>입니다. 하지만, 이 인두세가 기본인 것이지, 다른 세금을 걷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물품세는 토지, 상업, 어업, 광업 등을 구분하여 걷었습니다. 인두세는 성인, 아이를 구분하여 걷었습니다. 또 요역을 대납할 경우에도 엄청난 세금을 걷었다고 합니다. 한무제는 여기에 더하여 <재산평가세>도 걷었습니다. 이것은 무제 이후 재정 고갈이 심해지면서 더욱 강화되는 세금 제도로, 무제 이후에는 강제 징수 등의 항목이 강화되어 백성들을 괴롭혔고, 이것이 한의 망국을 초래하는 경제적 요인으로도 작용합니다. 한무제는 이러한 모든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도록 하여 조세의 금납화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화폐납이 일반화된 당 말기 이후 <양세법> 이전의 고대 사회에서는 아주 특수한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한무제 시기 엄청난 농업, 상공업의 발달로 가능했던 일이었으나, 이 화폐제도는 아직 고대라는 사회체제의 발전단계로 볼 때 무리수였던 듯 싶습니다. 중국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던 한무제기에도 실제 이 제도가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화폐를 사용하게 되면, 결국 물품 유통의 수요와 공급이 원할해지게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국가가 재정을 장악하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인들이 화폐제도를 통해 급성장하였고, 그들은 상업기반을 바탕으로 <토지매입>에 더 열을 올렸습니다. 결국, 후한과 위진남북조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 토지를 가진 대상인들이 <호족>으로 군림하면서 이후 귀족 사회의 주체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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