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c 중세사 : 중세 시대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전 포스트와 연결되는 내용으로, 상업발달로 인한 도시 경제의 활성화와 이것이 14-15세기에 미치는 영향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도시가 생겨나다 도시가 출연하게 된 배경은 11세기 이후 노르만, 마자르, 이슬람과 같은 외부 세력이 유럽에서 물러난 뒤 중세 정치, 경제가 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의 안정은 유럽 사회의 개간, 개척 사업의 신호탄이었고, 유럽사회는 이제 생산력이 증가하고 시장이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상업이 발전 속에서 중세 도시의 발달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중세 도시라는 것은 상인들이 모이는 거류지에서 출발합니다. 상인들은 중세 장원, 장원의 교회, 교회의 교구, 영주의 성곽 등에서 머물러 장사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장원과 장원의 교통 요지에 머물거나, 장원이나 교회 외곽에 모여 숙영하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잠시 거쳐 가면서 물건을 파는 행상 수준이었지만, 점차 전문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모여 살면서 <숙영지>로 발달합니다. 상인들은 장터를 만들어 물건을 팔았고 장인들은 물건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영주의 영지는 통행세나 시장세를 징수하기 때문에 점점 많은 상인들이 <숙영지>에 모여듭니다. <숙영지>는 보통 영주의 성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주의 시장통제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상인들이 각 영지에 장사하러 갈 때면, 화폐단위도 다르고, 물품의 조세 내역도 달라서 제대로 된 상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그리고 강도라던가 해적을 피하기 위해서도 상인들은 집단적인 구역이 필요하였습니다. 즉, 원래 영주의 성 밖에서 상인들이 모여 새로운 경제 촌락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보통 <새 성벽>이라고 부릅니다. 영주의 성이 <구 브루크스>라면, 이들의 성은 <신 브루크스 : 새 보루>로 구분되었고, 이렇게 새로운 구역에서 장사 등으로 재산을 축척한 이들을 훗날 <브루조아>라고 합니다. <부루조아> 계급은 상업을 통하여 성장한 유력 대상인도 있지만, 영주의 장원에서 일하던 수공업자나, 농부, 광부, 어부 등 다양한 계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역를 지켜야 했고, 자신들의 새로운 구역을 <city>로 만들어 독자적인 발전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훗날의 시민계급이라 불리는 계층이 여기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자치권을 달라! 새로운 구역(city)을 만들고 뭉친 시민들은 자신들의 상공업 구역에 대한 독자적 권리를 인정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장원의 영주나, 교회의 주교가 자신들이 상업활동으로 모은 재산을 빼앗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실제, 중세 도시라고 부르는 지역을 보면 수백개가 존재하였지만, 그 영토가 매우 작은 곳부터, 인구가 5000명도 안되는 곳까지 존재하였습니다. 인구 10만 이상의 규모를 가진 당시 중국 대도시 규모의 도시는 채 유럽 전역에 채 10곳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투쟁이 필요하였습니다. 이것을 자치운동(코뮌운동)이라고 합니다. 도시민들은 서로를 지켜준다는 서약을 하고, 외부 세력과의 투쟁에 들어갔습니다. 알프스 북쪽의 도시들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가 체제 속에서, 수많은 봉건 제후들이 존재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자치운동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장원의 영주들과 피비린내나는 싸움까지 감수하면서 자치운동을 벌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들의 자치운동은 봉건귀족을 도시에서 추방하는 형태로 전개됩니다. 북부의 도시들은 봉건귀족이 영내에서 사라지게 되면, <제국>의 군주와 직접 도시 자치 조약을 체결하여 자신들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인정받곤 하였습니다. 즉, 제국은 <군주특허장>을 도시들에게 준 뒤, 일정량의 세금을 걷어두는 것이죠. 이것은 군수로서는 봉건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고, 도시들은 자유를 얻는 것이니 서로가 좋은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남부 유럽, 특히 이탈리아 지방은 교황의 직할령을 비롯한 교회의 힘이 큰 지역이었습니다. 11-13세기의 교황은 교황권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는데, 이러한 교황의 권세가 북부의 신성로마제국에는 미치치 않았을지 몰라도, 남유럽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따러서 도시들은 교회세력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 도시 자치권을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남부 유럽에서의 봉건기사들은 교황청의 명령에 충실했고, 귀족들은 주교의 아래 위치하였습니다. 당시 남부유럽은 서임권 문제를 원할히 해결하여 교황이 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상공업자들은 교회를 지원하면서 귀족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결국 교회의 영도 아래 영주 - 도시의 연합적 자치권이 탄생하게 됩니다. 영주는 도시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도시의 유력 가문은 곧 영주가문에서 배출되는 형태가 나온 것이지요. 실제 이탈리아의 유력 가문들은 상인가문으로, 영주의 영지를 돈으로 매입한 가문도 많았습니다. 3. 도시에겐 도시만의 법이 있다! 도시는 이렇게 자치권을 획득한 뒤 특허장을 만들어 문서화하고 자신들의 자유를 <공식화>합니다. 만약 어떠한 농노라도 도시로 도망와서 1년 1일을 살게 되면 도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시내에서 만큼은, 도시의 자치권이 장원의 영주권이나 관습권을 능가했으니까요. 이러한 도시의 특권을 자세히 볼까요? 일단 도시는 정치 3권인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독자적으로 갖습니다. 이 권한에는 군사권과 자치권이 물론 포함됩니다. 일단 행정권을 볼까요? 그들은 시참사회를 구성하여 독자적인 행정기관과 시민군이 있었으며, 도시내에서의 모든 행정 재반 권리를 갖습니다. 과세, 군사, 화폐주조 등은 모두 도시가 자율적으로 처리합니다. 다음으로 도시는 입법권이 있습니다. 도시 내에서만 해당되는 이 입법권은 도시 사람들의 자치 규약을 스스로 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도시법>이라고도 하는데, 이 도시법의 가장 큰 내용은 시민간의 상호 원조와 친목이 핵심을 이룹니다. 왜냐면, 도시민끼리의 분열은 곧 주변 영주나 국가세력에게 도시가 제압당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중세 도시의 길드라는 특이한 단체도 이러한 도시민과 특정 직업 종사자간의 규약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도시민은 도시법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한 뒤, 도시를 수호하기 위한 시민군의 역할도 해야 했습니다. 사법권을 볼까요? 도시는 독자적인 재판권, 사법권 가지고 있으므로, 기타 외부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즉, 영주의 영주재판권, 교회의 교회재판권이 도시에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농노가 1년 1일을 숨어살면 도시민이 되었고, 교회로부터 추방당한 사제도 도시에서는 도시법에 의거할 뿐 교회법에 의해 추방당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도시와 외부세력의 권력관계에 따라 각각 사정은 달랐겠지요. 결국 도시는 도시민끼리의 시민법으로 서약하여 뭉친 자치공동체였고, 도시가 곧 도시민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만큼 도시민은 도시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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