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도시 마지막 편 - 중세 도시에서의 자유란 무엇인가?
이번 포스트에서는 중세 상업과 도시에 대한 마지막 포스트입니다. 중세 도시에서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적어볼까 하네요. 1. 11-14c의 도시 규모 11세기 이후 생긴 도시들은 그 성립 자체가 상업적 거주지를 확보하고, 영주와 교회세력으로부터 상공업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도시들은 성립과 동시에 크고 작은 성곽과 도시 구역을 책정하고, 그 일정 구역 내에서 자치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중세의 도시들을 아시아적인 대도시들와 같은 수준으로 보아서는 절대 안될 것입니다. 당시 중국, 이슬람 등의 도시들은 농경이 정착된 기반 위에 국가 지원으로 농업-상공업을 이어주는 대도시들이 많았습니다. 아시아의 대도시들은 중국 - 인도 - 이슬람 문화권을 이어주는 원거리 무역이 본격화 된 국제 도시들도 많았고, 도시 규모는 세계 사장의 물품을 수용할 정도의 발전단계에 와 있었죠. 대표적으로 중국 당나라 장안,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 등은 세계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도시들은 그 숫자부터 상당히 적을뿐더러 도시 규모는 초라했습니다. 이들은 자치권을 획득하고 일정 영역을 보유한 소규모의 지역사회였던 것이죠. 인구가 적은 곳은 1000-10000명, 많은 곳은 십만 이였는데, 십만 이상의 도시는 유럽 전역에서 10곳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중세 도시는 단순히 국지적인 지방 시장을 목표로 한 도시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도시는 공업제품을 생산하여 공급하고, 도시의 주변지역에서는 도시민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식의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도시들은 도시라기 보다는 농촌 지역의 중심부 역할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중세에서도 유럽 전역에 걸친 국제적인 무역망을 갖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플랑드르 - 프랑스 상퍄뉴 -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잇는 무역권의 중간중간에 위치한 도시들은 수출공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습니다. 이 도시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해안가, 강가였다는 점입니다. 당시 무역은 육로 교통의 미비성과 장원의 통제 때문에 바닷길, 강길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가장 발달한 곳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슬람과의 무역이 가능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었죠. 이들은 아시아의 물품을 사서 유럽에 훨씬 비싼 값으로 물건을 파는 <부등가 원거리 무역>을 실시하면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이 이탈리아 무역권은 북방 영국을 중심으로하는 플랑드르 모직업과 연결됩니다. 아시아 물품을, 북방으로 가져가서 모직물과 바꾸는 것이 주요 무역 목적이었죠. 이렇게 북방 - 남방의 무역 속에서 중계하는 방식으로 중부 <상파뉴> 무역권이 손강, 론강, 라인강 등의 해상 교통로를 중심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유럽의 대도시들은 교통로를 중심으로 밀집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지중해, 영국과 프랑스의 해안가, 유럽 중부의 강을 중심으로한 지역은 대도시가, 기타 장원 주변에는 중소도시가 성장하여 각각 그 지역의 상공업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들에게는 철저한 자유가 인정되면서도, 자유는 없었다. 중세 도시는 상업적인 목적에서 세속세력은 제후, 교회 등에게 <특허장>을 얻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 스스로가 시참사회를 만들고, 법과 행정기관을 만들어 자율적으로 도시 행정을 이끌어 갔습니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주었고, 주변 농촌지역에 비해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집단적인 자유였습니다. 도시는 도시민의 자유를 철저히 보호했지만,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배제할 수 있는 자유였던 것입니다. 내부적으로는 도시 스스로가 만든 규율에 의해서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였습니다. 도시민들은 도시 내 생산활동, 소비활동에 있어서 길드라는 배타적 집단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었습니다. 도시 내에서는 <지역적인 특권>을 인정받는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도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는 도시의 보호와 통제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있었고, 중세에서 말하는 <도시>란, 근대적 도시가 아닌 <지연공동체>사회였던 것입니다. 이들 도시는 봉건영주에게 일정한 공납을 바치면서 자유를 누리는 자치도시가 있었고, 황제직속의 도시로서 황제에게 일정의 대가를 치루면서 자유를 얻는 자치도시가 있었습니다. 물론 상인들 중심의 독립적인 자치 도시국가도 있었지만, 그 경우에도 외부 압력에 완전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도시에서의 자유란, 외부 세력과의 타협을 통하여 얻는 <도시> 자체의 자유인 것입니다. 영주나 국왕은 도시민들 개개인에게 자유를 부여했다는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도시는 영주, 국왕, 교회에게 세금원이라 여겼을 테니까요. 실제 도시가 성장할수록 가장 강력해전 세력은 국왕권입니다. 14세기 이후 도시발달은 당시 중앙집권추세였던, 각 지역 국가에 많은 세금을 지원해주었고, 국왕은 그 세금으로 상비군을 마련하여 일정 지역에서 배타적으로 도시를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3. 중세 도시도 큰 의의가 있었다. 중세 도시는 장원제 사회에 비해서는 너무나 진취적이고 자유롭습니다. 이것은 비봉건적이고, 비농업적인 새로운 시민계급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시에서의 시민들은 이제 장원의 영주권, 관습권이 아닌 자신들이 만든 사회계약으로서의 법을 만들어 공동체를 다스려 갑니다. 결국 중세 도시가 이전 시대와 다른 점을 말해보려면, 농노라는 부자유로운 계급에서, 좀더 자유로운 시민계급으로의 발전, 관습에 얽매진 낡은 사회에서 시민법에 의거한 사회계약사상으로, 농촌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체제에서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상업사회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도시의 발달은 흑사병의 유행 이후, 농촌사회의 급속한 붕괴를 가져와 농촌의 인력이 도시로 유입되고 중세가 붕괴되는 현상을 가져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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