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항쟁
(가) 처음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행하여 폭행을 막게 하였다. 그 까닭으로 야별초라고 블렀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났으므로 별초를 나누어 파견하여 잡게 하였다. 그 군대의 수가 많아져 드디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 몽고에 갔다가 도망해 온 고려인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불러 좌우별초와 더불어 삼별초가 되었다. 권신이 정권을 잡자 이들 삼별초는 그 앞잡이가 되었는데, 권신은 봉륵을 후히주고 또 사사로운 혜택을 베플었다. <이재현, 역옹패설> (나1 원종 11년(1270)에 옛 수도(개경)로 환도할 기일을 정하여 방을 붙였는데, 삼별초는 딴 마음이 있어 이에 따르지 아니하였다. 왕이 장군 김지저를 강화에 보내어 삼별초를 해산시키고 그 명부를 거두어 오게 하니, 삼별초는 명부가 몽고에 전해질까 두려워 하여 반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배중손과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은 난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몽고병이 대거 쳐들어 와서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있으니, 무릇 나라를 지키려는 자는 모두 격구장에 모이라고 외쳤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주히 사방으로 흩어져 배를 타고 강올 건 너려고 서로 다투다가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삼별초는 사람들의 이동을 막으면서 강을 따라 큰 소리로 외쳤다. ‘만일 배를 타고 개경으로 떠나려는 자는 모두 죽여 버리겠다. 특히, 문무 양반들이 섬을 탈출하는 것은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면서 적의 작은 배를 향하여 발사를 하였다....그리고는 금강고 병기를 군졸에 나누어 주고 배중손, 노영희가 이들 삼별초를 영솔하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아 관부를 설치하고 관원을 임명하였다. <고려사>, 배중손 열전 (다) 몽고에서는 진도의 삼별초 소탕을 위하여 김방경과 혼도, 흥다구 등으로 지휘관을 삼고 총공세를 폈다. 그 결과 승화후 온은 흥다구 손에 죽고, 배중손도 이 때 전사한 듯하다. 그 후 삼별초의 남은 병사들은 김통정을 수령으로 삼아 탐라로 옮겨 저항을 계속하였다. 탐라를 근거로 이들은 경상도, 전라도의 요지를 빈번히 괴롭혔다. 고려는 원의 세조의 명을 받아 탐라 원정을 시도하였다. 원종 14년 병선 160척에 수륙군 1만 명(몽고군 2000, 한군 2000, 고려군 6000)으로 탐라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만 3년만에 삼별초의 난은 끝이 났다. 삼별초의 봉기는 도처에서 민의 호응을 얻어 전과를 올리곤 하였다. 예를 들면, 경상도 밀성군(밀양)의 농민들이 진도의 삼별초에 호응하여 봉기한 것올 볼 수 있다. 방포, 주년 등 그 지방 사람들이 진도의 삼별초에 동조하는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 결과 밀성군은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전락하였다. 또한 밀성군 폭동 직후에 개경의 관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반몽고, 반정부의 기치를 내걸었으나, 그 목표가 단순히 반몽고, 반정부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즉, 그들은 노예 신분이 해방되기를 회망하고 있었다. <고려사>, 배중손 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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