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흑치상지 열전 사료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의 사람으로 키가 7척이 넘고 성품이 날래고 굳세고 지략이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장이 되었으며 이는 당나라의 자사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자 흑치상지의 부하들은 항복하였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정방이 노왕을 가두고 침략하므로, 흑치상지는 좌우 추장 10여 명과 함께 도망하여 무리를 불러 모아 임존산성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킨다. 이때 10여 일이 못되어 그에게 모여드는 무리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소정방은 군사를 거느리고 임존산성으로 쳐들어가서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흑치상지는 드디어 2백여 개의 성을 회복하였다. 이에 당 고종은 사자를 흑치상지에게 파견하여 그를 타이르게 된다. 그는 드디어 유인을 찾아 투항하고, 당나라고 들어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가 되어 여러 번 외정에 종군하여 공을 쌓았으므로 작위를 받고 특별히 상도 받았다. 그는 오래 연연도대총관이 되어 이다조 등과 함께 돌궐을 쳐서 이를 파하였다. 좌감문위중랑장 보벽은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세우려고 하므로, 당제는 흑치상지와 함께 적을 토벌하라고 분부하였다. 그러나 보벽은 단독적으로 진격하다가 오랑캐에게 져서 군사들이 패망하였다. 보벽은 옥에 갇혔다가 주살되었으며 흑치상지는 이 토벌에 연루되었으나 아무런 공이 없었다. 마침 주흥 등이 그가 응양장군 조회절등과 배반한다고 무고하여, 옥에 갇혔다가 목매어 죽었다. 흑치상지는 부하를 거느리는 데 은혜를 베풀었다. 일찍이 자기가 타는 말이 군사에게 매를 맞았다. 혹자는 그를 죄 주라고 청하였으나 그는 대답하기를, “어찌 사사로운 일로 해서 관병을 매질하리오?”라고 하였다. 그는 전후에 받은 상품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눠 주고 조금도 남겨 놓지 않고 죽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퀴즈풀이 > 역사 사료와 데이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사기 설총 열전 사료 (6) | 2007.03.20 |
---|---|
삼국사기 온달 열전 사료 (1) | 2007.03.20 |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원문 + 해석본) (1) | 2007.03.20 |
삼국사기 궁예 열전 - 원문 + 해석본 (1) | 2007.03.20 |
고려말 척불론 (1) | 2007.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