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설총 열전 사료
설총의 자는 총지로, 그 조부는 내마 담말이고, 그 부친은 원효이다. 원효는 처음에 중이 되어 불서에 해박하였으나, 다시 속인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소성거사라 이름하였다. 설총은 성질이 명예하고, 나면서부터 도리를 깨달았다. 방언으로써 구경을 풀어 읽게 하여 후생들을 훈도하였으므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학자의 조종으로 삼는다. 또한 글짓는 데 뛰어났으나 지금 세상에 전하는 것은 없다.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설총이 지은비명이 있으나 문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 없으므로 그 뜻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신문대왕이 한여름 높고 밝은 방에 계시면서 설총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오늘은 오래 오던 비도 개고 훈풍이 서늘하게 불어오니, 비록 진수성찬이나 서글픈 음악을 듣는 것보다는 고상한 이야기와 멋있는 익살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대는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으니 나를 위해 이야기하여 주지않겠는가?” 하므로, 설총은 신문왕을 위하여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옛날 화왕이 있었다. 이를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 하였더니 삼춘가절을 당하여 예쁜 꽃을 피워 온갖 꽃보다 유달리 아름다웠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고 예쁜 꽃들이 분주히 화왕을 뵈려고 달려 오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 때 홀연히 한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붉은 얼굴에 옥 같은 이에, 깨긋한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 아장아장 맵시 있는 걸음으로 화왕의 앞에 와서 말하였다. “첩은 흰 눈 같은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은 맑은 바다를 대하고, 봄비에 목욕하고 더러운 때를 씻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을 맞으며 뜻대로 사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지금 임금님의 높으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침소에서 모실가 하여 찾아온 것이오니, 임금님께서는 저를 거두어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 때 또 한 장부가 있어 베옷에 가죽 허리띠를 띠고 백발을 휘날리며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피로에 지친 걸음걸이로 허리를 굽히고 와서 말하였다. “저는 서울 밖의 큰 길가에 삽니다. 아래로는 창망한 둘 경치를 굽어보고 위로는 우뚝 솟아 삐죽삐죽한 산악의 경치를 의지하고 있는데, 이름은 (백두옹:할미꽃)이라고 합니다. 생각건대 임금님은 좌우에서 온갖 물건으로 충족하게 받을어 고량진미로써 배를 부르게 하고 차와 술로서 정신을 맑게 한다 하더라도 , 상자 속에는 원기를 도울 좋은 약과 독기를 제거할 극약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비록 생사와 삼베가 있더라도 왕골이나 띠풀도 버리지 않는다 하고 모든 군자가 결핍에 대비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하오니, 왕께서도 여기에 뜻을 두시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하니, 화왕이 가로되 “장부의 말에도 또한 도리가 있으나 그러나 아름다운 사람도 얻기 어려우니,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하였습니다. 장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나는 임금님께서 총명하셔서 옳은 도리를 아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찾아왔는데, 지금 보니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릇 임금된 분으로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친근하게 하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분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므로 맹가는 불우하게 평생을 마쳤으며, 풍당은 낭서에 파묻혀 늙었습니다. 옛날부터 이와 같은데 전들 그 어떻게 하겠습니까?”하였다. 화왕이 말하기를, “내가 잘못하였다. 내가 잘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신문왕은 그 말을 듣고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우언에는 참말 깊은 뜻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써 두어 임금된 자의 경계하는 말로 삼으라”하고, 드디어는 설총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일본국 진인이 신라사 (설판관:설총의 아들)를 보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원효거사가 저술한 금강삼매론을 보고 그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하였다. 신라사 설판관이 곧 이 거사의 손자라는 말을 듣고 비록 그 조부를 보지 못하였으나 그 손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 이에 시를 지어 보낸다’고 하였다. 그 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으나, 다만 그 자손의 이름은 알지 못할 따름이다. 고려 현종 13년에 왕이 설총에게 벼슬을 추중하여 홍유후로 삼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설총이 일찍이 당나라의 국학으로 들어가서 공부하였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 밖의 열전에 소개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최승우는 당 소종 용기 2년에 당나라의 국학으로 들어가서 경복 2년에 이르러 시랑 양섭의 주관 아래 급제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최승우의 문집인 호본집, 자서에 기록되어 있다. 뒤에 견훤을 위하여 격서를 지어 고려 태조에게 보내었다. 최언위는 나이 18세에 당나라로 들어가 유학하여 예시부랑 설정규 주고나 아래 급제하고, 42세에 귀국하여 집사시랑 서서원학사가 되었다. 태조가 개국하자 조정으로 들어와 벼슬하여 그 벼슬이 한림원대학사 평장사에 이르렀고, 그가 죽자 시호를 문영이라 하였다. 김대문은 본래 신라의 귀문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에 한산주 도독이 되어 약간의 전기를 지었다. 그의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는 아직 남아 있다. 박인범, 원걸, 거인, 김운경, 김수훈 등은 비록 겨우 문자로 전하는 것이 있으나 역사에 그 행적이 전하지 않으므로 전기를 마련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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