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검군전 사료
검군은 구문 대사의 아들로 사량궁 사인이 되었다. 건복 49년 정해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모든 곡식을 죽이는 바람에 이듬해 봄과 여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먹고 사는 형편이 되었다. 이 때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공모하여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만은 홀로 받지 않았다. 모든 사인들이 말했다. "여러 사람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만이 거절하니 무슨 일인가? 만일 적어서 그렇다면 더 주겠다." 검군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근랑의 문도에 이름을 두었고, 풍월도의 마당에서 수행을 하였으니, 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천금의 이익이라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 때 대일 이찬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검군은 그곳을 나와 근랑의 집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은밀히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말이 누설될 것이라 하여 드디어 그를 불렀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줄 알고 근랑에게 하직하며 말했다. "오늘 이후로는 다시 뵙지 못하겠습니다." 근랑이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이 말하지 않다가, 재삼 묻자 그 이유를 대략 이야기하였다. 근랑이 말했다. "왜 유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가?" 검군이 말했다. "자기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이 죄에 걸리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근랑이 말했다. "그러면 왜 도망하지 않느냐?" 검군이 대답하였다. "저들이 잘못되고 내가 바른데 도리어 내가 도망한다면 이는 장부의 행동이 아닙니다." 검군은 말을 마치고 마침내 사인들에게 갔다. 여러 사인들이 술을 대접하며 사죄하면서 검군 몰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검군은 이를 눈치채고도 억지로 그것을 먹고 죽었다. 군자가 말했다. "검군은 죽을 자리가 아닌데 죽었으니, 이는 태산같이 소중한 목숨을 홍모보다 가벼이 여긴 것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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