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고려사 : 충의전 사료 모음

고려사 : 충의전 사료 모음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생(生)도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바요 의(義)도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겸할 수 없으면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할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사람이 누가 죽음을 싫어하지 않으리요마는 충신과 의사(義士)는 한번 변고를 만나면 비록 정확(鼎)이 앞에 있고 도거(刀鋸)가 뒤에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은 하고자 함이 사는 것보다 심함이 있는 때문이다. 고려(高麗)는 인종(仁宗)으로부터 이후로는 왕실에 환난이 많았으므로 절의에 죽은 사람도 또한 적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 일을 차례로 서술하여 충의전(忠義傳)을 짓는다.

  홍관(洪灌)

홍관(洪灌)의 자(字)는 무당(無黨)이요 당성인(唐城人)이니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어사 중승(御史中丞)과 문덕각(文德閣)과 보문각(寶文閣)의 학사(學士)를 역임하였다. 예종(睿宗)이 일찍이 편년통재(編年通載)를 열람하고 홍관(洪灌)에게 명하여 삼한(三韓) 이래의 사적(事跡)을 찬집(撰集)하여 바치게 하였다. 또 이궤(李軌), 허지기(許之奇), 박승중(朴昇中), 김부수(金富脩), 윤해(尹諧) 등과 더불어 음양에 관한 서(書)를 논변하였다. 인종조(仁宗朝)에 수 사공(守司空)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제배하였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홍관(洪灌)이 도성(都城)에서 숙직하다가 변(變)을 듣고 탄식하기를,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 것이니 내가 스스로 편안할 수 있으리요

하고 서화문(西華門)에 나아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기를 청하니 안으로부터 달아 올려 주는지라 드디어 들어가서 왕을 곁에서 시위(侍衛)하였다. 궁궐이 불타 번짐에 미쳐서 이자겸(李資謙)이 왕을 핍박하여 정덕궁(廷德宮)에 출어(出御)케 하였는데 홍관(洪灌)은 늙고 병들어 걸을 수 없었으므로 뒤에 떨어져 서화문(西華門) 밖에 이르러 척준경(拓俊京)에게 살해되었다. 난이 평정되매 아들과 사위에게 작(爵) 1 급(級)을 사(賜)하였다. 홍관(洪灌)은 힘써 배우고 글씨를 잘 썼는데 신라(新羅) 김생(金生)의 필법을 본받았다. 후에 절의로 죽었으므로 추성 보국 공신(推誠報國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개부의동삼사 수 태위(開府儀同三司守太尉) 문하 시랑(門下侍郞) 동 중서문하 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예부사(判禮部事) 상주국(上柱國)을 추증하고 충평(忠平)이라 시(諡)하였다.

  고보준(高甫俊)

고보준(高甫俊)은 인종(仁宗) 때의 사람이니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이 불궤(不軌)를 꾀하거늘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록연(智祿延)이 상장군(上將軍) 오탁(吳卓)과 고보준(高甫俊)의 형인 대장군(大將軍) 고석(高碩) 등과 더불어 <이들을> 주살(誅殺)할 것을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이자겸(李資謙)이 오탁(吳卓)과 고석(高碩)을 죽이는지라 고보준(高甫俊)이 오탁(吳卓)의 아들 오자승(吳子升)과 더불어 달아나 북산(北山)에 숨었다. 이자겸(李資謙)이 그 당(黨)인 박영(朴永)을 시켜 쫓아가 잡게 하였는데 고보준(高甫俊) 등이 높은 바위에 올라가 박영(朴永)을 꾸짖기를,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이 은총을 도적질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하여 해독을 생민(生民)에게 끼침이 시랑(豺狼)보다 심하여 장차 사직을 전복하려 하는데 너희 무리는 모두 간사하게 아첨하여 이를 섬기니 일찍이 노예만도 못하다. 우리들이 의거를 일으켜 우리 백성에게 사죄하려다가 이루지 못함은 운명이라 하겠으나 의사(義士)가 어찌 너희 같이 용렬한 놈들 손에 죽겠느냐!

라 하고 이에 하늘에 울부짖으며 곧 함께 바위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정의(鄭)

정의(鄭)는 청주인(淸州人)이니 초명(初名)은 준유(俊儒)이다. 고종(高宗) 4년에 정의(鄭)가 어사대(御史臺)의 관리로서 서경(西京)을 분사(分司)하였는데 거란병(契丹兵)이 침입하매 왕이 서경 병마사(西京兵馬使)인 상장군(上將軍) 최유공(崔兪恭)과 판관(判官)인 예부 낭중(禮部郞中) 김성(金成) 등에게 조(詔)하여 서경병(西京兵)을 거느리고 5군(軍)을 도와 이를 치게 하였다. 때에 최유공(崔兪恭)은 침어(侵漁)하기를 좋아 하므로 사졸(士卒)이 이반하였는데 졸병에 최광수(崔光秀)란 자가 있어 나아가려 하지 않고 독기(纛旗)를 세우고 군사를 소집하여 돌아서서 서경(西京)으로 향하였다. 최유공(崔兪恭)은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잃었으며 김성(金成)은 취해서 누워 인사불성이었다. 최광수(崔光秀)가 드디어 성(城 서경(西京) )에 웅거하여 난을 일으켜 구고려흥복 병마사(勾高麗興復兵馬使) 금오위섭상장군(金吾衛攝上將軍)이라 자칭하고 관속을 두며 정예(精銳)를 불러 모으고 격서를 북계(北界) 여러 성(城)에 전하고 장차 대사(大事)를 일으키고자 하여 여러 신사(神祠)에 기도하였다. 정의(鄭)는 평소에 최광수(崔光秀)와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서로 잘 지냈는데 이에 그 소행을 분하게 여겨 교위(校尉) 김억(金億), 백유(白濡), 필현보(畢玄甫), 신죽(申竹) 등 10여 인을 거느리고 도끼를 소매에 넣어 최광수(崔光秀)의 처소에 가서 더불어 말하다가 인하여 찍어 죽였다. 그 당여(黨與) 8인을 주살(誅殺)하고 나머지는 불문에 부치니 성중(城中)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정의(鄭)에게 섭 중랑장(攝中郞將)을 초수(超授)하여 내시(內侍)에 소속하게 하고 의관(衣冠)과 안마(鞍馬)를 사(賜)하였다. 김억(金億)과 백유(白濡)에게는 별장(別將)을 가(加)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상(賞)과 작(爵)을 차등 있게 하였다. 정의(鄭)는 여러번 벼슬을 거쳐 장군(將軍) 시랑(侍郞)이 되었다가 대장군(大將軍)이 제배되었다. 고종(高宗) 20년에 현보(玄甫)가 서경(西京)에서 반(叛)하므로 대신(大臣)들이 안무(安撫)의 방책을 의론하였는데, 현보(玄甫)가 일찍이 정의(鄭)에게 등용된 바 있다 하여 곧 정의(鄭)를 천거하여 <그에게> 전마(傳馬)를 달려 선유케 하였다. 이미 대동강에 이르니 종자(從者)들이 갑자기 들어가지 말기를 청하거늘 정의(鄭)가 분연히 말하기를,

명(命)을 받고 나왔으니 감히 조금인들 지체하겠는가? 죽는 것은 진실로 분수라.

하고 이미 현보(玄甫)를 <만나>보니 현보(玄甫)가 정의(鄭)를 얻음을 기뻐하며 주장(主將)을 삼고자 하여 한편으로 달래고 한편으로 협박하였으나 정의(鄭)는 끝내 굴하지 않고 살해당하였다. 아들은 정현(鄭)이니 벼슬이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렀고 정현의 아들은 정해(鄭)이니 스스로의 전이 있다.

  문대(文大)

문대(文大)는 고종(高宗) 18년에 낭장(郞將)으로서 서창현(瑞昌縣)에 있다가 몽고병(蒙古兵)에게 포로되었다. 몽고병(蒙古兵)이 철주성(鐵州城) 아래에 이르러 문대(文大)로 하여금 주인(州人)을 불러 효유(曉諭)하기를,

진짜 몽고병(蒙古兵)이 왔으니 빨리 나와 항복하라!

고 하게 하였다. 문대(文大)가 이에 소리쳐 말하기를,

가짜 몽고병(蒙古兵)이다. 아직 항복하지 말라!

고 하였다. 몽고인(蒙古人)이 베려다가 다시 소리치게 하였으나 또한 여전하였으므로 드디어 참(斬)하였다. 몽고병(蒙古兵)이 성(城)을 공격하여 매우 급박하였는데, 성(城) 안에 양식이 다하여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장차 함락되려 하매 판관(判官) 이희적(李希績)이 성(城) 안의 부녀와 어린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들여 불을 지르고 정장(丁壯)을 거느리고 자문(自刎)하여 죽었다.

  조효립(曹孝立)

조효립은 고종(高宗) 40년에 문학(文學)으로서 춘주(春州)에 있었는데 몽고병이 성(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목책(木柵)을 2중으로 새우고 참호를 한 길이 넘게 파놓고 여러 날을 공격하였다. 성 안의 우물이 모두 말라서 우마를 잡아 피를 마셨으므로 사졸의 곤함이 심하였다. 조효립이 성(城)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처와 더불어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안찰사(按察使) 박천기(朴天器)는 대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여 먼저 성 안의 전곡(錢穀)을 불태우고 결사대를 거느려 목책(木柵)을 부수고 포위를 돌파하였으나 참호를 만나 나가지 못하여 한 사람도 벗어난 자가 없었다. 드디어 그 성은 도륙되었다.

  정문감(鄭文鑑)

정문감(鄭文鑑)은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직학(直學)에 보임(補任)되었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위관(僞官)을 두고 정문감(鄭文鑑)으로 승선(承宣)을 삼아 정사(政事)를 처리하게 하니, 정문감(鄭文鑑)이 말하기를,

적(賊)에 붙어서 부귀를 누리는 것보다 차라리 지하에서 몸을 깨끗이 하겠다.

라 하고, 곧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의 처 변씨(邊氏)도 정문감(鄭文鑑)이 죽는 것을 보고 또한 물에 몸을 던졌다. 변씨는 서해 안찰사(西海按察使) 변윤(邊胤)의 딸이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한국사사료모음방/8.고려시대사료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