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 환자전 서문과 환자전 사료 모음
고려의 엄인(人 내시 )은 그 본계(本系)가 백성이 아니면 천한 종이었다. 고려에서는 궁형(宮刑 부형(腐刑) )을 쓰지 않았으므로 어렸을 때 개에게 고환을 먹힌 자가 모두 이런 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만 궁중의 영항(永巷)의 직임에만 채용할 뿐이고, 관원(官員)으로는 제배(除拜)되지 못 하였으니 그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바 있었다. 의종 때 정함(鄭) 백선연(白善淵)이 처음으로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나 정함이 지후(祗侯)가 되었을 때 재상(宰相)과 대간(臺諫)이 굳이 다투어 왕의 뜻을 받들지 않았으니 대개 아직도 선왕의 유풍(遺風)이 있었음이었다. 제국 공주가 일찍이 원(元) 나라 세조(世祖)에게 몇 사람을 바쳤는데 이들은 규원(閨 궁녀(宮女) )을 모시고 탕장(帑藏 금고(金庫) )을 출납(出納)함에 자못 능하여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사신(使臣)으로 와서는 그 집안을 부흥(復興)시키고 그 족속을 벼슬시키는 자도 있어 은총(恩寵)이 지극히 두터웠다. 그리하여 잔인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점점 서로 부러워하고 모방하여 아비가 그 아들을 거세(去勢)하고 형(兄)이 그 아우를 거세(去勢)하였다. 또 강포(强暴)한 자는 조금만 분원(憤怨)이 있으며 문득 스스로 거세(去勢)하여 불가 수십 년이 되지 않은 사이에 도거(刀鋸 거세(去勢) )하는 무리가 매우 많아졌다. 원(元)의 정치가 점차 문란하여 지면서 엄인(人)이 권력을 마음대로하여 이들 중에는 어떤 자는 벼슬이 대사도(大司徒)에 이르렀으며 어떤 자는 먼 곳(원(元) 나라) 에 있으면서 평장 정사(平章政事)를 받은 자가 있었고, 그 다음도 모두 원사(院使), 사경(司卿)으로 되었고 인아제질(姻弟姪)이 함께 조명(朝命)을 받으매 저택[第宅]과 수레, 그리고 의복이 참람하게도 경상(卿相)에 비기게 되어 부귀(富貴)와 광영(光榮)이 한남(漢南)의 엄인(人)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되었다. 국가에서 매양 주청(奏請)할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 자들의 세력에 의뢰하였으므로 충렬왕 때 이미 봉군(封君)된 자가 있었다. 충선왕이 오랫동안 원(元)에 머물면서 자주 3궁에 출입하였는데 이 무리들과 서로 친근해 짐으로 인하여 많은 청알(請謁)이 있었다. 왕은 그 중에서 원 나라 황제에게 가장 근행(近幸)한 자를 골라 대개 봉군(封君)하고 작(爵)을 주었으며 그 나머지도 대개 검교 첨의밀직(檢校僉議密直)을 제배(除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옛 법이 완전히 무너졌으며 거세(去勢)하여딱지도 떨어지지 않은 자까지도 역시 본국(本國)을 경시(輕視)하였다.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 방신우(方臣祐) 이대순(李大順) 우산절(禹山節) 이삼진(李三眞) 고용보(高龍普) 등은 모두 그 주인을 배반(背反)하여 참소로 화(禍)를 꾸몄으니, 이를 말하면 가(可)히 마음 아픈 일이다. 공민왕(恭愍王)이 왕위에 있은 세월이 오래됨에 대신(大臣)을 시기하고 여러 소인들을 이목(耳目)으로 삼았으며 혼시(寺 내시 )를 신임(信任)하여 이들이 심지어 나라를 경륜하고 도(道)를 논하는 지위(地位)에 까지 포열(布列)하게 되어, 이들이 묘당(廟堂)에 앉아 국정(國政)을 의론하게 되니 고려의 사직(社稷)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였다.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환자전을 짓는다. 정함(鄭) 정함(鄭)은 인종(仁宗) 때 내시 서두 공봉관(內侍西頭供奉官)이 되었고 의종(毅宗)의 유모(乳母)를 처(妻)로 삼았는데 의종(毅宗)이 즉위함에 저택(邸宅) 한 채를 하사하고 내전숭반(內殿崇班)을 제수(除授)하였다. 왕이 덕흥 궁주(德興宮主)를 책봉(冊封)하고 연회(宴會)를 베풀었을 때 우간의(右諫議) 왕식(王軾)은 정함이 서대(犀帶)를 띠고 있음을 보고 <어사(御史)> 대원(臺員)을 꾸짖어 말하기를, 이런 일이 있는데도 탄핵하지 않으니 대관(臺官)들은 눈이 없는 자들이다. 라고 하니 어사 잡단(御史雜端) 이작승(李綽升)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탄핵받지 않는지 아느냐. 하고 곧 대리(臺吏) 이빈(李)을 시켜 그 서대를 빼앗아 오게 하였다. 정함이 하사(下賜)받은 물건이라 하고 내어주려 하지 않으므로 이빈(李)이 강제로 빼앗았다. 정함(鄭)이 왕께 고소하니 왕이 대노(大怒)하여 내시(內侍) 이성윤(李成允)에게 이빈을 잡아오라고 명(命)하였다. 이빈이 어사대문(御史臺門)으로 뛰어 들어갔으므로 이에 다른 관리(官吏)인 민효정(閔孝旌)을 잡아와 중금초노(中禁抄奴)들이 구타한 후 결박하여 궁성소(宮城所)에 가두었다. 왕이 불쾌하여 연회를 파(罷)하고 자기가 띠고 있던 서대(犀帶)를 풀어서 정함에게 주고 민효정(閔孝旌)을 형부옥(刑部獄)에 하옥하였다. 대간(臺諫)이 왕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음을 알고 그 띠를 내시원(內侍院)에 돌려주니 내시원 집사(內侍院執事) 한유공(韓儒功)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미 빼앗아 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돌려주는가 하고 이를 받지 않다가 몇 차례 왕래(往來)한 뒤에야 이를 받았다. 대간(臺諫)이 규합(閨閤)에 엎드려 이성윤(李成允) 등의 죄를 논(論)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므로 대간(臺諫)들이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왕이> 이성윤(李成允)과 한유공(韓儒功) 등 5인을 물리쳤으나 간관(諫官)들은 출근하지 않고 대관(臺官)들만 출근하여 일을 보았다. 얼마 후에 정함(鄭)을 권지 합문 지후(權知閤門祗候)로 삼으니 대관(臺官)이 환자(宦者)로서 조관(朝官)에 참여함은 옛 제도에 없다고 하여 이를 다투었으나 듣지 않으므로 대관(臺官)이 또 나오지 않으니 왕이 불러 설유하기를, 이미 정함의 지후(祗侯) 임명(任命)을 거두라고 말하였다. 고 하므로 대관(臺官)이 배사(拜謝)하고 물러갔다. 정함이 이를 원망하여 비밀히 사람을 달래어 대성(臺省) 관원들과 이빈(李) 등이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으려 한다고 무고하였는데 안문(按問)하여도 증거가 없었다. 재상(宰相)과 간관(諫官)이 각(閣)에 엎드려 아뢰기를, 정함이 개인 원한으로 대간(臺諫)을 모함하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하여 논청(論請)하기를 마지않으므로 이에 그 직(職)을 파(罷)하고 물리쳤다. 얼마 후에 소환(召還)하여 다시 내시(內侍)에 충용(充用)하니 낭장(郞將) 최숙청(崔淑淸)이 비밀히 좌복야(左僕射) 권정균(權正鈞)에게 말하기를, 정함(鄭)이 승선(承宣) 직 문하성(直門下省) 이원응(李元膺) 등과 함께 세도를 믿고 권세를 농간(弄奸)하므로 내가 그를 베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였더니 권정균(權正鈞)이 곧 이것을 상문(上聞)케 하여 최숙청(崔淑淸)을 먼 섬에 유배(流配)하였다. 얼마 후 다시 정함을 권지 합문 지후(權知閤門祗候)로 삼았다. 왕이 우승선(右承宣)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공승(李公升)에게 명하여 문하성(門下省)에 독촉하여 정함의 고신(告身)에 서명(署名)케 하니 재신(宰臣) 및 간관(諫官)이 불가(不可)하다고 고집하므로 이공승(李公升)이 재삼(再三) 왕래(往來)하였는데 왕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짐(朕)의 말을 듣지 않으니 짐(朕)은 먹어도 단맛을 모르겠고 잠을 자도 자리가 편안하지 않다. 고 하므로 평장사(平章事) 최윤의(崔允儀), 우간의(右諫議) 최응청(崔應淸) 원응(元膺) 이공승(李公升) 등은 부득이 서명하였으나 급사중(給事中) 이지심(李知深), 사간(司諫) 최우보(崔祐甫) 최경의(崔景義)는 홀로 서명치 않고 합문(閤門)에 엎드려 극력 쟁간(爭諫)하므로 좌천(左遷)하여 이지심(李知深)은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최우보(崔祐甫)는 상사봉어(尙舍 奉御)로, 최경의(崔景義)는 전중 내급사(殿中 內給事)로 삼았다. 정함은 이 때부터 진신(縉紳)에 배열하여 권세(權勢)와 총애(寵愛)가 날로 성함에 친당(親黨)을 많이 <조정에> 끌어 들였으며, 관노(官奴) 왕광취(王光就)와 백자단(白子端)을 우익(羽翼)을 삼아 왕의 이목(耳目)을 가렸고, 서로 참소를 꾸며 조정 신하를 짓밟고 백성을 약탈하여도 재상(宰相)이나 대간(臺諫)들이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함묵(含)하고 말하지 못하였다. 정함의 집이 궁궐의 동남(東南) 쪽 약 30보(步) 거리에 있었는데 낭무(廊 행랑 )가 무릇 200여 간(間)이요 누각(樓閣)이 고험(高險)하고 금벽(金碧 금색(金色) 청색(靑色) )이 서로 찬란하여 궁금(宮禁 왕궁 )에 비교되었는데 환시(宦寺)로서 법을 어지럽게 함이 이보다 성함이 없었다. 왕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공승(李公升) 등을 불러 정함의 고신(告身)에 서명하기를 독촉하였으나 이공승은 명(命)을 받들지 않았고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신숙(申淑)은 간관(諫官)을 거느리고 상소(上疏)하기를, 정함(鄭)의 선조는 성조(聖祖 태조(太祖) )가 창업(創業)할 때에 명령을 거슬러 신하답지 못하였으므로 벼슬을 막아 노예(奴隸)에 충당(充當)하고 종류(種類)를 구별(區別)하여 조정(朝廷)에 참렬(參列)을 못하게 하였거늘 이제 정함에게 높은 관직(官職)을 주어서 태조(太祖) 공신(功臣)의 후손(後孫)을 도리어 불신(不臣)한 유(類)에게 종 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태조(太祖)께서 법제를 확립하고 왕통(王統)을 후세에 전한 뜻에 어긋남이 있사오니 정함의 관직을 삭탈하고 무릇 정함과 함께 결당(結黨)한 자도 또한 서인(庶人)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니 왕이 대노(大怒)하여 그 상소를 되돌려 보내니 간관(諫官)이 합문(閤門)에 이틀이나 엎드려 있어도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좌정언(左正言) 허세수(許勢修)는 눈물을 흘리고 한탄하며 관직을 버리고 갔다. 왕이 다시 대간(臺諫)을 불러 서명하기를 독촉하였으나 이공승은 또 명(命)을 받들지 않았으며 신숙은 상소(上疏)하여 힘써 쟁간(爭諫)하였으므로 왕이 할 수 없이 명령을 내려 정함의 관직을 깎고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였다가 얼마 안 지나서 정함을 복직하였다. 일찍이 정함이 왕을 위해 연회를 배설하고 옷을 바쳤는데 최윤의(崔允儀) 이원응(李元膺) 등이 연회에 참석하였고 풍악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듣는 자가 모두 탄식하여 말하기를, 권세가 내시[內竪]에게 있도다.라고 하였다. 백선연(白善淵) 백선연(白善淵)은 본래 남경(南京)의 관노(官奴)였는데 의종(毅宗)이 일찍이 남경(南京)에 행차하였다가 보고 기뻐하여 양자(養子)라 이름하였다. 궁인(宮人) 무비(無比)도 역시 관비(官婢)였는데 왕의 사랑을 받았다. 백선연(白善淵)이 이와 친근하여 자못 추한 소문이 있었다. 백선연은 왕광취(王光就)와 함께 왕의 침전에 무상으로 출입(出入)하면서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서리(胥吏) 진득문(秦得文)이 노예같이 두 사람을 섬겨서 보성 판관(寶城判官)에 제배(除拜)되더니 죽제(竹製)의 책상과 상자를 만들어 바쳤는데 왕이 기뻐하여 불러 내시(內侍)를 삼았다. 내시(內侍) 김헌황(金獻璜)도 역시 백선연에게 아첨하고 섬기던 자인데 어사대(御史臺)가 탄핵하여 내시 적(籍)을 삭탈(削奪)하였다. 광주 서기(廣州書記) 김류(金)는 백성의 재물을 토색하여 진기한 완구(玩具)와 기명(器皿)을 사서 환자(宦者)들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음으로 백선연(白善淵)과 왕숙공(王肅恭)이 천거하여 내시(內侍)에 소속시켰다. 예성강인(禮成江人)이 백선연(白善淵), 왕숙공(王肅恭), 영의(榮儀)에게 뇌물을 주어 예성(禮成)을 현(縣)으로 삼기를 청하므로 백선연 등이 왕께 강(江)에서 유행(遊幸)하기를 권하였는데 강인(江人)들이 백성에게서 백금(白金) 300여 근(斤)을 거두어 기이하고 음란한 재주를 하였다. 왕이 물놀이를 보고자하여 내시(內侍) 박회준(朴懷俊) 등에게 명하여 50여 척(隻)의 배에 모두 채범(彩帆)을 달고 악기(樂伎)와 채붕(綵棚) 및 고기잡는 기구를 싣고 앞에서 유희를 벌리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귀신놀이를 하는데 불을 머금고 토하다가 잘못하여 한 배를 태우므로 왕이 크게 웃었다. 백선연이 일찍이 왕의 나이에 맞추어 동불(銅佛) 40개를 만들고 관음(觀音) 40개를 그려 부처님의 생일에 별원(別院)에서 점등(點燈)하고 복(福)을 빌었는데 왕이 밤을 타서 미행(微行)하다가 이를 구경하였다. 또 만춘정(萬春亭)에다 연흥전(延興殿), 영덕정(靈德亭), 수락당(壽樂堂), 선벽재(鮮碧齋), 옥간정(玉竿亭)을 짓고 물 가에 송죽(松竹)과 화초(花草)를 심어서는 왕이 매양 배를 남포(南浦)에 띄우고 유련(流連)의 즐겁게 하였으니 모두 백선연과 박회준, 유장(劉莊) 등의 꼬임에 따라 이루어졌다. 최세연(崔世延) 최세연(崔世延)은 그 처(妻)가 독살스럽고 투기하므로 노하여 스스로 거세(去勢)하여 고자가 되었다. 환자(宦者) 도성기(陶成器)가 충렬왕(忠烈王)과 공주(公主)에게 사랑을 받고 있을 때 최세연이 그에 아부하여 입궁(入宮)하게 되었고, 총애(寵愛)를 받음이 도성기보다 더하여 수년(數年)이 못되어 도성기와 함께 장군(將軍)에 제배(除拜)되니 두 사람이 세도를 믿고 횡포하고 방자하였다. 왕이 일찍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는데 최세연이 말을 달려 의장(儀仗) 앞에 출입(出入)하므로 상장군(上將軍) 이정(李貞)이 정지시켰으나 듣지 않았고, 감찰사(監察司)는 두려워 감히 탄핵하지 못하였다. 중군 도령(中軍都領)은 서반(西班)의 요직(要職)이라 반드시 제군(諸軍)의 도령(都領)을 지낸 뒤에야 보임될 수 있었다. 최세연은 그의 형(兄) 최세안(崔世安)을 초수(超授)하여 이를 주니 제군(諸軍)의 도령(都領), 지유(指諭) 등이 왕께 아뢰어 이를 쟁론(爭論)하였으나 역시 고칠 수 없었다. 최세연이 찬성(贊成) 조인규(趙仁規)의 집을 샀는데 그 좁고 더러움을 싫어하여 누각(樓閣)을 후동(後洞)에 다시 지었는데 누각이 대궐 가까운 곳에 있어 공주(公主)가 바라보고 최세연에게 이르기를, 이는 기피(忌避)하는 방위(方位)니 이를 범하지 말라. 고 하여도 최세연이 듣지 않으니 공주(公主)가 노하여 말하기를, 조인규(趙仁規)는 재상(宰相)이었으나 더럽다하지 않았는데 너는 낮은 내수(內竪)에 불과하면서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더욱 그 거소(居所)를 넓히느냐. 하고 좌우(左右)에 명하여 그 뺨을 치고 목에 칼을 씌워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가 얼마 후에 석방하였다. 최세연은 권세(權勢)를 마음대로 하여 용사(用事)하매 많은 뇌물을 받았고 신료(臣僚)의 승진과 강직이 그의 말에 달렸으므로 비록 종실(宗室)과 재보(宰輔)라도 감히 그의 뜻을 거스리지 못하였다. 낭장(郞將) 김홍수(金弘秀)가 장량비(長良庇)와 더불어 노비(奴婢)의 일로 전법사(典法司)에 소송하였는데 장양비는 자기가 굴복하게 될 줄을 알고 그 노비(奴婢) 40여 구(口)를 모두 최세연에게 주었다. 최세연이 김홍수를 만나 거만하게 꾸짖으니 김홍수 역시 최세연을 거만하게 꾸짖으므로 최세연이 왕께 참소하여 김홍수를 전법 옥(典法獄)에 내리니 좌랑(佐郞) 심유(沈愉)가 최세연(崔世延)의 뜻에 아첨하여 김홍수의 노비(奴婢)를 모두 빼앗고 <그를> 해도(海島)에 유배(流配)하므로 김홍수가 면전(面前)에서 심유(沈愉)를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법관(法官)이 되어 소인(小人)에 아부하여 이에 무죄(無罪)한 사람을 유배(流配)하고 노비(奴婢)를 빼앗느냐. 하니 심유가 부끄러워서 굴복하였다. 최세연이 또 내시(內侍) 박추(朴樞)의 노비(奴婢) 20여 구(口)를 빼앗고, 또 양민(良民) 강주(康柱)를 유인하여 노비로 삼으려하니 강주(康柱)가 듣지 않으므로 최세연이 강주가 초() 10정(錠)을 도적질하였다고 칭탁하고 은병(銀甁) 10구(口)를 추징하였다. 강주가 은병(銀甁) 4구(口)를 꾸어서 바치고 상장군(上將軍) 차신(車信)의 집에 숨었더니 최세연이 차신(車信)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강주(康柱)를 숨겼는가 하매 차신이 말하기를, 강주가 그대의 징독(徵督)을 괴로워하여 나의 은병(銀甁) 4구(口)를 꾸어서 갚았으니 초() 10정(錠)의 값은 이미 족(足)하거늘 다시 추징코자 하는가 하므로 최세연이 왕께 아뢰고 순마군(巡馬軍)으로 하여금 그를 찾아 체포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허락하였다. 드디어 최세안(崔世安)과 함께 차신의 집에 가서 체포하기를 급하게 함으로 차신이 왕궁(王宮)에 나아가 그 연고를 자세히 말하였다. 그 때에 충선왕(忠宣王)이 세자(世子)였는데 대노(大怒)하여 이를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김홍수(金弘秀)와 박추(朴樞)의 노비(奴婢)를 빼앗고 김홍수를 유배(流配)한 죄가 첫째요, 미친 개를 많이 길러서 수흥궁(壽興宮)의 비(婢)를 물어 죽게 하였고 궁주(宮主)가 너에게 미친 개를 기르지 말라고 청하였어도 너는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궁주(宮主)의 여생(餘生)이 얼마나 되기에 나에게 개를 기르지 말라 하십니까 라고 하여 궁주(宮主)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 죄가 둘째요, 내부(內府)의 재물(財物)을 도적한 죄가 셋째요, 은(銀)과 동(銅)을 섞어 사사로이 은병(銀甁)을 만들은 죄가 넷째요, 강주(康柱)를 종으로 삼고자하여 차신(車信)의 집을 침우(侵)한 죄가 다섯째이라. 이는 특히 큰 것 뿐이요 나머지는 다 헤아리지 못한다. 고 하니 최세연의 항변(抗辯)하는 말이 자못 불순(不順)하거늘 세자(世子)가 왕께 아뢰기를, 최세연은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여 온 나라에 해독(害毒)을 입혔으니 마땅히 귀양지로 쫓아내어 그 악행을 징계하소서. 라고 하였다. 최세연이 항상 인후(印侯)를 아비로 섬겼는데 왕이 인후의 말을 잘 들었으므로 난색을 보이자 세자(世子)가 울며 완강하게 청하였다. 이에 인후가 세자(世子)를 원망하므로 세자(世子)가 인후를 꾸짖어 말하기를, 재상(宰相)의 항아리 같은 큰 배 속에는 최세연의 술과 고기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최세연과 함께 같은 악행을 저지르고 서로 감싸주고 있으니 이런 무리는 마땅히 한 도끼 밑에 처단하여야 할 것이다. 고 하였다. 최세연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속여 말하기를, 바라건대 공주(公主)에게 한마디 말만 하고 죽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대개 왕의 음사(陰事)에 호소하여 처벌을 면해 보고자함이었다. 또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죄를 범하였으나 도성기(陶成器)는 나보다 심합니다. 라고 하니 공주(公主)가 대노(大怒)하여 도성기에게 장형(杖刑)을 가하고 최세연과 함께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 도성기는 어리석고 지각이 없어 간사함이 최세연만 못 하였으므로 도성기가 최세연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너를 천거하였거늘 이제 와서 도리어 나를 참소하느냐? 속담에 기른 개에게 도리어 물린다더니 너를 이름이라. 고 하였다. 이에 도성기의 노비(奴婢)와 전장(田庄) 및 재산을 적몰(籍沒)하니 은병(銀甁)이 70여 구(口)에 이르렀다. 최세연은 인후(印侯)와의 연고로 재산은 적몰(籍沒)되지 않고 다만 김홍수의 노비(奴婢)를 묘련사(妙蓮寺)에 예속시겼고 박추의 노비(奴婢)를 내방고(內房庫)에 예속시켰다. 최세연이 모든 재보(財寶)를 인후에게 주며 말하기를, 바라건대 내가 섬으로 유배(流配)되는 것을 면하게 해달라. 고 하니 인후는 만약 뇌물을 받고도 구해 주지 못하면 최세연이 다시 다른 꾀를 도모할 것을 우려하여 드디어 왕께 아뢰고 최세연과 도성기를 먼 섬으로 유배(流配)하였으나 얼마 안되 함께 소환(召還)되었다. 최세연이 왕을 따라서 원(元) 나라에 있었는데 매일 위사(衛士)로 하여금 말똥을 줏어 써 행주(行廚)의 땔나무로 대비케 하니 사람이 모두 웃었다. 궁인(宮人)인 무비(無比)는 태산군인(泰山郡人) 시씨(柴氏)의 딸로서 뽑혀 입궁(入宮)하였는데 왕이 도라산(都羅山)으로 왕래(往來)할 때면 반드시 따라가 왕이 유련(留連 객지(客地)에 머묾 )하는 낙으로 삼으므로 사람들이 도라산(都羅山)이라 불렀다. 바야흐로 특별한 사랑을 받는지라 그에 붙어 의탁(依托)하는 자가 중외(中外)에서 횡포하므로 세자(世子)가 매우 미워하였다. 세자가 공주(公主)의 초상을 당하여 원(元) 나라로부터 돌아와 왕께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는 공주(公主)에게 병이 생긴 이유를 아십니까? 반드시 내총(內寵) 중에서 질투하는 자의 소위(所爲)이니 바라건대 이를 국문하소서.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잠시 복상(服喪) 마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세자(世子)가 좌우(左右)로 하여금 무비(無比) 및 그 일당인 최세연, 도성기와 장군(將軍) 윤길손(尹吉孫) 이무(李茂) 소윤(少尹) 유거(柳), 지유(指諭) 승시용(承時用) 송신단(宋臣旦), 내료(內僚) 김인경(金仁鏡) 문완(文玩) 장우(張祐), 중랑장(中郞將) 김근(金瑾), 엄인(人) 전숙(全淑) 방종저(方宗), 궁인(宮人) 백야진(伯也眞)을 잡아 가두고 무비(無比)의 저주한 일을 국문하니 무녀(巫女)와 술승(術僧)이 모두 자복하므로 점차 저주한 진상을 알게 되었다. 도성기, 최세연, 전숙(全淑) 방종저, 김근, 무비(無比), 백야진(伯也眞)을 베고 그 일당 40여 인을 유배(流配)하니 국인(國人)이 두려워하였다. 그 때에 환자(宦者)의 총애가 두터웠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여 스스로 거세(去勢)하는 자가 많았다. 감찰사 녹사(監察司錄事) 최성(崔成)이 환자(宦者)에게 매를 맞고 욕된 바 되매 드디어 발분(發忿)하여 스스로 거세(去勢)하였고 또 창녕현(昌寧縣) 백성이 조성도감(造成都監)의 역도(役徒)가 되었는데 은(銀)을 징수함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최세연의 집 앞에서 스스로 거세(去勢)하였다. 이숙(李淑) 이숙(李淑)의 어릴 때 이름은 복수(福壽)요 평장군(平章郡) 사람이다. 어머니는 태백산(太白山)의 무녀(巫女)이다. 이숙은 충렬왕(忠烈王)의 총애(寵愛)를 받았으므로 벽상삼한정광 평장군(壁上三韓正匡平章君)에 봉해졌고 그 후 뽑혀 원(元) 나라에 가서 태감(太監)이 되었다. 왕이 원 나라 조정에 주청할 때는 이숙의 공로가 있었으므로 왕의 대우가 매우 두터웠다. 일찍이 어향(御香)을 받들고 본국에 와서 애기(愛妓)의 아들 정승주(鄭承柱)를 내승 별감(內乘別監)으로 임명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미 허락하고도 아직 쓰지 않았다. 이숙이 장차 금강산(金剛山)으로 가게 되어 왕은 연회를 베풀고 그를 맞이하였으나 이숙은 노하여 오지 않았는데 왕이 거듭 그의 요청을 허락하니 그제야 왔다. 뒤에 왕유소(王惟紹)와 더불어 충선왕(忠宣王)을 폐하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세우려는 음모를 꾀하였는데 이 일은 왕유소(王惟紹) 열전(列傳)에 있다.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는 상서(尙書) 주면(朱冕)의 가노(家奴)였는데 스스로 거세(去勢)하고 환자(宦者)가 되었다. 충선왕(忠宣王) 때 비인군(庇仁君)으로 봉해졌다. 어떤 인연으로 원(元) 나라 인종(仁宗)을 동관(東官)에서 섬겼는데 아첨하고 마음이 험하여 법을 어김이 많아 충선왕(忠宣王)이 그를 매우 미워하였다.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가 이를 알고 중상(中傷)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인종(仁宗)과 황태후(皇太后)가 충선왕을 후하게 대우하므로 도발할 수 없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에게 무례하기에 충선왕(忠宣王)이 황태후(皇太后)에게 청하여 그에게 장형(杖刑)을 가하고 또 황태후(皇太后)가 명(命)하여 그가 빼앗은 남의 토전(土田)과 장획(臧獲 노비(奴婢) )을 거두어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원한이 더욱 깊었다. 인종(仁宗)이 붕(崩)하고 황태후(皇太后)도 역시 별관(別官)에 퇴거(退居)하게 되자 임백안독고사는 더욱더 두려워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 팔사길(八思吉)를 후하게 대접하여[] 갖은 계략으로 무고하고 참소하니 영종(英宗)이 사신을 보내어 전민(田民)을 그에게 다시 주었으며 충선왕(忠宣王)을 토번(吐蕃)에 귀양보냈다. 그래도 임백안독고사가 참소함을 마지않으므로 화(禍)가 어떤 지경에 이를는지 거의 예측할 수 없었으나 승상(丞相) 배주(拜住)의 구원을 받아서 그 화를 면하였다. 충숙왕(忠肅王) 10년에 복주(伏誅)되었다. 그의 형 임서(任瑞)는 초명(初名)이 우문이(文伊)이니 아우의 연고로써 일찍이 밀직 부사(密直副使)가 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동생이 복주(伏誅)되었음을 듣고 두려워하여 도망하였으므로 이에 그의 집을 적몰(籍沒)하였다. 방신우(方臣祐) 방신우(方臣祐)의 어릴 때 이름은 소공(小公)이요 상주(尙州) 중모인(中牟人)이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궁중(宮中)에서 급사(給事)를 하다가 안평 공주(安平公主)를 따라 원(元) 나라에 가서 유성 황후(裕聖皇后)를 뵈옵고 이로 인해 그를 머무르게 하고 망고대(忙古台)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원 나라 선종(宣宗)은 장알 승(掌謁丞)에 제수(除授)하고 천부대경(泉府大卿)을 더해 주었으며, 무종(武宗) 때에는 수원 황태후(壽元皇太后)를 섬겼는데 흥성궁(興聖宮) 원사에서 장작원사(將作院使)로 바꾸었다가 평장정사(平章政事)로 승진하였다. 충선왕(忠宣王) 때에 요양 행성 우승(遼陽行省右丞) 홍중희(洪重喜)가 왕이 법을 준수치 않고 횡포하다는 등의 일들을 중서성(中書省)에 속여 참소하여 언 나라 조정에서 충선왕과 함께 변론(辯論)하도록 청하므로 중서성(中書省)이 이를 상주(上奏)하였으므로 왕이 이를 매우 근심하였다. 방신우(方臣祐)가 수원 황태후(壽元皇太后)께 아뢰기를, 홍중희(洪重喜)는 고려(高麗)의 포민(逋民)인데 감히 마음대로 거짓으로 속여 종국(宗國)<고려(高麗)>의 전복을 꾀하였으니 그 죄(罪)는 이미 죽여야 하거늘 도리어 왕과 함께 대변(對辯)케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태후(皇太后)가 깨닫고 황제에게 말하니 중서성(中書省)에 칙명(勅命)을 내려서 대변(對辯)치 말게 하고 홍중희에게는 매를 쳐서 멀리 조주(潮州)에 유배(流配)하였다. 원(元) 나라에서 방신우를 보내와서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쓰는 것을 감독케 하였다. 황태후(皇太后)가 금박(金薄) 60여 정(錠)을 보냈으며 방신우는 승려와 속인(俗人) 300인을 모아 필사(筆寫)케 하였다. 개성 판관(開城判官) 이광시(李光時)는 자기 딸을 방신우의 처(妻)로 주었다. 방신우가 장경(藏經)을 신효사(神孝寺)에 옮기고 황태후(皇太后)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해당 기관으로 하여금 죄수(罪囚)를 석방케 하였으나 그 기관은 방신우의 사정(私情)이 끼였음을 알고 놓아주지 않으므로 재삼(再三) 강요(强要)하매 이에 놓아주었다. 처음에 신우(臣祐)가 국경(國境)에 들어오매 군현(郡縣)의 수재(守宰)가 모두 모욕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매를 맞은 자까지 있었다. 그가 여러 도(道)에 강향(降香)할 때에는 제찰(提察)과 수령(守令)들이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막대한 선물을 주었다. 전라 제찰사(全羅提察使) 이중구(李仲丘)는 종이를 선물하니 방신우는 받지 않고 그것을 트집 잡아서 그를 모욕하였다. 왕이 방신우를 중모군(中牟君)으로 봉하였다. 방신우가 또 태정 황후(泰定皇后)를 섬겨 총애(寵愛)를 받았고 태자 첨사(太子詹事)로 제배 하였다가 휘정원사(徽政院使)로 고치고 뒤에 저경사사(儲慶司使)를 더해 주었다. <원(元) 나라> 삭방(朔方)의 심왕(瀋王)인 팔려미사(八驢迷思)가 무리를 거느리고 원(元)에 귀순하니 원(元)이 장차 그들을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살게 하려 하거늘 방신우가 아뢰기를, 고려(高麗)는 땅이 좁고 산(山)이 많아 농사하고 목축할 곳이 없으니 북방의 풍속으로 사람들이 반드시 즐겁게 살지 못할 것이요, 한갓 동방의 백성들을 놀라게 할 뿐입니다. 라고 하니 황제가 그렇게 여기고 중지하였다. 또 일찍이 본국(本國)에 성(省)을 세우려고 할 때 방신우가 수원 황후(壽元皇后)께 아뢰어 이 일이 중지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충숙왕(忠肅王)도 역시 그를 후대하여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 봉(封)하고 추성 돈신 양절 공신호(推誠敦信亮節功臣號)를 하사하였다. 그의 아버지 방득세(方得世)는 본래 중모현 리(中牟縣吏)였는데 그의 아들 때문에 가문을 일으켜 관성 현령(管城縣令)이 되었다가 수년(數年) 뒤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제배(除焙)되었으며 매서(妹壻)인 박려(朴侶)는 농부로서 갑자기 승진하여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고 박여의 아들 박지정(朴之貞)도 갑자기 총랑 전서(摠郞典書)에 올랐는데 탐욕스럽고 법을 어기니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 방신우가 원(元) 나라의 7명의 황제와 두 명의 태후(太后)를 섬겨 국가 기밀에 참여(參與)하고 이를 맡으매 여러 번 초구(貂)와 주의(珠衣), 금옥 칠보 요대(金玉七寶腰帶)와 강남(江南)의 기름진 토지[田] 4000 무(畝)를 하사받았고, 황금(黃金), 백금(白金), 보초(寶)는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하였다. 충숙왕(忠肅王) 17년에 퇴직하고 본국에 돌아와서 선흥사(禪興寺)를 화려하게 수축하였다. 충혜왕(忠惠王) 후3년에 원(元)에 소환(召還)되었다가 그 다음 해에 죽었다. 이대순(李大順) 이대순(李大順)은 소태현인(蘇泰縣人)이다.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총애(寵愛)를 얻어 권세를 부리게 되니 충선왕(忠宣王)이 소태(蘇泰)를 태안군(泰安郡)으로 승격시키고 이대순을 태안 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封)하였다. 일찍이 위득유(韋得儒)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그의 처가 영평궁(永平宮)의 노비(奴婢) 문제로 다투었다.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하제(下制)하여 언부(部)로 하여금 이를 결정(決定)케 하였다. 이 때에 전서(典書) 김사원(金士元)과 산랑(散郞) 이광시(李光時)가 이 안건을 맡아 위씨(韋氏)를 돕지 않았다. 이대순이 노하여 팔찰(八) 등으로 시켜 황제의 명이라 칭하고 김사원 등에게 매쳐서 귀양보냈다. 낭장(郞將) 백응구(白應丘)가 왕명을 받아 전라도(全羅道)에 갔는데 이대순이 점유한 인호(人戶)를 빼앗으니 이대순이 또 이삼진(李三眞)으로 하여금 황제의 명령이라 칭하고 이를 국문하여 백응구를 행성(行省)에 가두었으니 그 횡포함이 이와 같았다. 그 아우 이공세(李公世)도 본국(本國)에 벼슬하여 원수(元帥)가 되고 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처음에 충렬왕(忠烈王)이 원(元)에 행차하매 이대순이 황제(皇帝)에게 이공세를 별장(別將)으로 임명하도록 고려왕에게 명령하도록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데는 법제(法制)가 있고 나라에는 임금이 있는데 내가 어찌 관여하겠는가. 라고 하고 대관양(大官羊)과 상존주(上尊酒)를 하사하고 이대순(李大順)으로 하여금 스스로 왕께 아뢰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너의 형은 교위(校尉)인데 산원(散員)을 뛰어넘어 별장(別將)을 제수(除授)함은 옛 관례가 아니다. 하니 이대순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했는데 뒤에 왕이 황제의 말을 전해 듣고 이를 제수(除授)하였다. 이공보(李公甫)도 역시 그의 아우인데 농부로서 갑자기 귀하여져서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고 태안군(泰安君)으로 봉해졌다. 방신우(方臣祐)가 일찍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재추(宰樞)와 함께 민천사(旻天寺)에 모였는데 술이 취하여 이공보와 방신우 매서(妹壻) 박려(朴侶)가 모두 일어나 춤추거늘 방신우가 이공보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위하여 옛날에 하는 놀이를 보여 주겠는가. 하니 이공보가 곧 장기를 붙들고 밭가는 형상을 하므로 좌중(座中)이 크게 웃었다. 이삼진(李三眞)도 역시 원(元) 나라에서 총애(寵愛)를 얻었으므로 멀리서 평장(平章)을 받고 충선왕(忠宣王)이 회음군(淮陰君)으로 봉하였는데 세도를 믿고 방종하였다. 그가 각 도[諸道]에서 강향(降香)을 하매 수령(守令)이 조금만 잘못하여도 매를 쳤다. 일찍이 숙비(淑妃)를 뵈오니 비(妃)가 성대한 위로연을 베풀어 주고 은병(銀甁) 20구(口)를 하사하여 그 아비의 집을 사게 하였다. 우산절(禹山節) 우산절은 충숙왕 때에 풍산군(豊山君)으로 봉해졌으며 충선왕(忠宣王)이 그 아비 우석(禹碩)을 춘주 부사(春州府使)로 제배하면서 양현고(養賢庫), 자첨사(資瞻司) 및 여러 궁사(宮司)로 하여금 은(銀)을 차등 있게 내게 하여 노자로 주었다. 우산절은 일찍이 김목경(金牧卿)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김목경이 밀성 부사(密城副使)로 있을 때 찰방 별감(察訪別監) 박숙정(朴淑貞)이 김목경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을 탄핵하여 파면하였다. 김목경이 우산절의 권세를 믿고 양부(兩府)에 간청하여 다시 복직하였다. 고용보(高龍普) 고용보는 원(元) 나라에 가서 황제의 총애(寵愛)를 받아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제배(除拜)되었으며 충혜왕(忠惠王)은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였다. 황제의 명령으로 와서 왕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하였다. 한 달 남짓해서 원(元) 나라에서 타적(朶赤), 별실가(別失哥) 등을 교사(郊祀)한 후 사면하라는 조서를 반포하라는 명목으로 보내오니 왕이 병을 칭탁하고 영접하지 않고자 하므로 고용보가 말하기를, 황제가 항상 왕께서 불경(不敬)하다고 하시는데 만약 영접하러 나가지 아니하시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동성(征東省)에서 조서(詔書)를 듣는데 타적(朶赤) 등이 왕을 발로 차고 묶거늘 왕이 급히 고원사(高院使)를 부르자 고용보는 왕을 꾸짖었다. 타적(朶赤) 등이 왕을 잡아 말에 태워 잡아갔고, 고용보에게 나라 일[國事]를 정리(整理)케 하였다. 고용보가 사람을 보내어 왕을 시종(侍從)하던 군소(群小)인 박양연(朴良衍), 임신(林信), 최안의(崔安義), 김선장(金善莊), 승신(承信), 등 10여 인을 잡아 가두었는데 송명리(宋明理), 조성주(趙成柱), 윤원우(尹元佑), 강찬(姜贊) 등은 평소 고용보와 사이가 좋았으므로 면하였다. 고용보가 행성관(行省官)인 기철(奇轍) 등과 함께 내탕(內帑)을 봉했으며 얼마 후에 원(元) 나라로 갔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여 12자(字) 공신호(功臣號)를 하사하였는데 고용보가 황제의 측근(側近)에 있으면서 권세를 마음대로[用事]하니 천하(天下) 사람이 이를 미워하였다. 어사대(御史臺)가 아뢰기를, 고용보는 고려(高麗)의 매탄장(媒炭場)의 사람인데 황제의 총애(寵愛)를 받아 세도를 믿고 위복(威福)을 만드니 친왕(親王)과 승상(丞相)도 위풍(威風)을 바라보고 좇아가 절하고 있습니다. 재물과 뇌물을 모아 금백(金帛)이 산적(山積)하고 권세가 천하(天下)를 기울이니 아마 한(韓) 나라의 조절(曹節), 후람(侯覽)과 당(唐) 나라의 구사량(仇士良), 양복공(楊復恭)이 오늘에 다시 일어날까 두렵사오니 바라건대 그를 죽여써 천하(天下)의 인심(人心)을 쾌(快)하게 하소서. 하므로 황제가 금강산(金剛山)에 유배(流配)하였다가 얼마 뒤에 소환(召還)하였고 그 뒤에 다시 환국(還國)하였다. 고용보가 일찍이 무고한 사람을 죽였는데 전법사(典法司)가 이를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고용보(高龍普)는 곧 신예(辛裔)의 매서(妹壻)요 좌랑(佐郞) 최중연(崔仲淵)은 신예의 문생(門生)이고, 정랑(正郞) 강군보(姜君寶)는 신예의 동년우(同年友)인 까닭에 소홀히 하여 놓아주었다. 조일신(趙日新)의 난(亂)에 도망하여 숨어서 죽음을 면하였고 드디어 중이 되어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는데 공민왕(恭愍王)이 어사 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을 보내어 그를 죽였다. 세간에 전하는 말에는 충혜왕(忠惠王)이 잡힐 때에 고용보가 내응(內應)하였기 때문에 사형(死刑)하였다고 한다. 김현(金玄) 김현(金玄)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홍건적(紅巾賊)이 침구(侵寇)하자 형부 상서(刑部尙書) 김진(金縉)을 따라 수백 명의 기병(騎兵)를 거느리고 상원군(祥原郡)으로부터 지름길을[閒道]를 따라 좇아가 서경(西京)에서 적을 공격하러 가는 도중 갑자기 적병 300여 인과 마주쳤는데 결사적으로 싸워 100여 명을 죽이니 이 공로가 2 등(等)으로 수록되었다. 환자(宦者) 수십명이 서장(書狀)에 서명(署名)하여 상(賞)을 구하였는데 명부(名簿)에 위조한 것이 많았으니 김현이 사실상 주모(主謀)한 것이다. 왕이 그 간악(姦惡)함을 살펴 그를 매치고자 하였으나 그 때에 환관(宦官)의 세력이 왕성하였므로 서로 힘써 구하여 모면하였다. 얼마 뒤에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남쪽으로 호종(扈從)한 공과 서울을 수복(收復)한 공, 흥왕사(興王寺)의 변란(變亂) 때에 시위(侍衛)한 공(功) 등에서 모두 1 등(等)으로 수록되었다. 김현은 탐오(貪汚)하고 교활하였고 외면으로는 부지런하고 공경함을 꾸며 윗 사람을 잘 받들어 모셨다. 신우(辛禑)가 즉위하자 더욱 총애와 사랑[寵幸]을 받았고 또 명덕 태후(明德太后)의 신임(信任)도 있어서 모든 기무(機務)를 관장하고 궁중(宮中)에서 용사(用事)하였는데 여자의 청을 공공연히 행하였다. 전주(銓注)할 때마다 김현이 문득 우왕(禑王)의 앞에 이르러 관직(官職)을 주고 빼앗기를 기탄 없이 하였다. 일찍이 우왕(禑王)의 곁에 거만하게 앉아서 근신(近臣)이 일을 아뢰면 우왕(禑王)이 아직 말하기도 전에 김현이 먼저 천단하여 결정하였다. 어느 날 우왕(禑王)이 정사(政事)를 보는데 김현이 그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었으므로 우왕이 꾸짖기를, 네는 이 집 종인데 어찌 불경(不敬)하기 이와 같으냐 하니 김현이 말이 없었다. 그 후 반야(般若)의 옥사(獄事)가 생기자 대사헌(大司憲) 안종원(安宗源)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김현이 궁중의 일을 총괄하면서 잡인의 출입을 단속하지 못하고 반야(般若)가 궁중(宮中)에 바로 들어가 태후(太后)를 놀라게 하고 보고 듣는 이를 놀래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유사(攸司)에 내리어 국문하고 죄(罪)를 주게 하소서.하니 이에 김현을 회덕현(懷德縣)에 유배(流配)하였다. 안도적(安都赤) 안도적(安都赤)은 공민왕(恭愍王) 12년에 역적이 행궁(行宮)인 흥왕사(興王寺)를 침범하여 문지기를 베고 바로 침전에 이르러 환자(宦者) 강원길(姜元吉)을 죽였다. 숙위(宿衛)가 모두 달아나 숨었으나 환자(宦者) 이강달(李剛達)은 왕을 업고 창문으로 빠져 달아났다. 안도적은 용모가 왕과 비슷하므로 몸으로서 왕을 대신코자하여 드디어 침내(寢內)에 누었더니 역적(逆賊)들은 그를 왕인줄 알고 죽였다. 신소봉(申小鳳) 신소봉(申小鳳)은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원(元) 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한 지 무릇 11년인데 왕이 즉위하자 대호군(大護軍)에 제배(除拜)하고 수종(隨從)한 공(功)을 1 등(等)으로 수록하였으며 상호군(上護軍)에 올랐다가 뒤에 영원 부원군(寧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노국 공주(魯國公主)가 훙(薨)하자 신소봉이 능(陵)을 지켰으며 복상(服喪)을 마치매 그 공로로 상(賞)으로 충근 절의 익위 공신(忠勤節義翊衛功臣) 칭호를 하사받고 밀직사(密直使) 상의 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제배(除拜)되고 백관(百官)에 명하여 영빈관(迎賓館)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날에 송악(松嶽)이 무너지니 그 때의 공논이 조종(祖宗)의 법은 환자(宦者)가 참관(參官)을 받지 못하는데 이제 옛법을 무너뜨리고 그를 암랑(巖廊 고위중임(高位重任) )에 두었으니 나라의 주산(主山)이 무너짐은 반드시 이로 말미암음이다. 고 하였다. 첨의 평리(僉議評理)로 전직(轉職)하여 죽으니 관비(官費)로 장사를 차려 주고 특히 충희(忠禧)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 이득분(李得芬) 이득분(李得芬)은 신우(身禑)에게 총애(寵愛)를 받아 지위(地位)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는데 탐욕(貪慾)스러워 뇌물을 받고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였다. 동지밀직(同知密直) 목충(睦忠)과 함께 이인임(李仁任)과 최영(崔瑩)을 참소하여 비방하자 재추(宰樞)와 대성(臺省)이 회의(會議)하고 우왕(禑王)에게 아뢰기를, 이득분(李得芬)은 일찍이 보원고(寶源庫)를 관리할 때 전세(田稅)를 거두어 자기 집에 들이고 또 양현고(養賢庫)의 밭을 빼앗아 선비를 기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남의 재물을 많이 거두고 토전(土田)을 빼앗았습니다. 또 일찍이 자기 집에 원자(元子)를 맞아 모셔서 사사로이 유모(乳母)를 갈아 사당(私黨)을 맺었으니 이는 신하로서 할 바가 아니니 질서(秩序)를 문란케 한 화(禍)가 이로부터 움트나이다. 라고 하니 우왕(禑王)이 그렇게 여겨 이득분을 계림(鷄林 경주(慶州) )에 유배(流配)하고 그 집을 적몰(籍沒)하였으며 가자(假子 양자(養子) )인 환자(宦者) 정난봉(鄭鸞鳳) 등 20 인을 쫓아내고 또 목충을 안동(安東)에 유배(流配)하였다. 이에 앞서 목인길(睦仁吉)이 양현고(養賢庫)의 전답으로 연안부(延安府)에 있는 100여 결(結)을 빼앗았는데 목인길(睦仁吉)이 죽자 이득분이 또 이를 빼앗았다. 이에 이르러 성균관(成均館)이 상소(上疏)하여 다시 양현고(養賢庫)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니 이를 따랐다. 김사행(金師幸) 김사행(金士幸)의 처음 이름은 광대(廣大)이다. 공민왕(恭愍王)의 총애(寵愛)를 받아 여러 차례 옮겨 판내부사(判內府事)가 되었다. 성품(性品)이 아첨을 잘하였는데 왕의 뜻을 맞추어 정릉(正陵) 영전(影殿)의 공사[役]를 크게 일으켜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지였다. 이로 말미암아 재력(財力)이 고갈되고 백성이 마음놓고 살지 못하였으므로 왕이 죽자 선왕(先王 공민왕(恭愍王) )을 미혹케 하여 공역(工役)을 일으켰음을 논죄(論罪)하여 익주 관노(益州官奴)로 삼고 그 집을 적몰(籍沒)하였다. 신우(辛禑)가 즉위하자 그 죄를 사면하고 고신(告身)을 돌려 주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되었는데 왕이 경연(經筵)에 출어(出御)하고자 하니 김사행이 이를 만류하여 말하기를, 시일(時日)이 많으니 하루 동안 출강(出講)하지 않아도 정사에는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고 또 불교(佛敎)로써 왕을 유도하기를, 불씨(佛氏)의 가르침은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 같은 사람인데 혹(或)은 천하(天下)의 주인이 되고 혹은 일국(一國)의 주인이 되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귀천(貴賤)이 같지 않음은 다름이 아니라 전세(前世)에서 선(善)을 닦음에 후박(厚薄)이 있는 까닭입니다. 라고 하거늘 헌사(憲司)가 아뢰기를, 환관(宦官) 김사행(金師幸)과 김완(金完)은 일찍이 교언(巧言)과 사치로서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 )의 총애(寵愛)를 받아 독(毒)을 백성에게 흘렸으므로 좌우(左右)에 둠이 마땅치 않사오니 바라건대 그들을 쫓아내소서.하였고 간관(諫官)이 또 상소(上疏)하여 이를 논(論)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았다. 이 후 일은 본조(本朝 이조(李朝) )에 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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