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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고려사 : 방기전 사료 모음

고려사 : 방기전 사료 모음

정헌대부(正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겸(兼)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 봉(奉) 교수(敎修)

대개 한 가지 예능으로써 이름이 나는 것은 비록 군자(君子)로서 부끄러워하는 바이나 그러나 역시 나라를 가진 자에게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일자열전(日者列傳)과 구책 열전(龜策列傳)과 창편전(倉扁傳)을 세운 이래로 후세의 작사자(作史者)들이 모두 방기전(方技傳)을 술(述)하였음은 어찌 이 뜻이 아니리요? 방기전(方技傳)을 짓는다.

  김위제(金謂)

김위제(金謂)는 숙종(肅宗) 원년(元年)에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이 되었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란 승(僧)이 있어 당(唐)에 들어가서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전했는데 김위제(金謂)가 그 술(術)을 배워 상서하여 남경(南京)으로 환도(還都)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도선기(道詵記)에 이르되, 고려(高麗)의 땅에 삼경(三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은 중경(中京)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은 남경(南京)이 되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 되니 11, 12, 1, 2월은 중경에 머무르고 3, 4, 5, 6월은 남경에 머무르며 7, 8, 9, 10월은 서경에 머무르면 36국이 조공을 바칠 것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국 후 160여 년에 목멱양(木覓壤)에 도읍한다.고 하였사오니 신(臣)은 이 때가 바로 이 새 서울에 순주(巡駐)할 때라고 생각하나이다. 신(臣)은 또 그윽히 도선(道詵)의 답산가(踏山歌)를 보건대 말하기를, 송성(松城)이 떨어진 뒤에 어느 곳으로 향할 것인가? 삼동(三冬)에는 해 뜨는 평양(平壤)이 있도다. 후대의 현사(賢士)가 대정(大井)을 열매 한강(漢江)의 어룡(魚龍)이 사해(四海)에 통하도다. 라 하였습니다. 삼동(三冬)에 해뜬다는 것은 중동절(仲冬節)에 해가 손방(巽方 동남간(東南間) )에서 뜬다는 것이요, 목멱산(木覓山)이 송경(松京)의 동남쪽에 있는 까닭에 그러함입니다. 또 말하기를, 송악산(松嶽山)은 진한(辰韓) 마한(馬韓)의 주(主)가 되나니 아아 누구의 대(代)에 시종(始終)됨을 알 것인가? 화근(花根)이 가늘고 약하며 지엽(枝葉)이 그러하니 겨우 백년의 기약이나 어찌 파(罷)하지 않으리요? 그 뒤에 새 화세(花勢)를 찾고자 하여 나가 양강(陽江)을 건너면 헛되이 왔다 갔다할 뿐이요, 사해(四海)의 신어(神魚)가 한강(漢江)에 조회(朝會)하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여 대평(大平)을 이루도다. 라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강(漢江)의 양지에 도읍하면 기업(基業)이 장원(長遠)하고 사해(四海)가 내조(來朝)하며 왕족이 창성할 것이매 실로 큰 명당의 땅이 됩니다. 또 말하기를, 후대의 현사(賢士)가 사람의 수(壽)를 인식하여 한강(漢江)을 넘지 않으면 만대의 풍(風)이요 만약 그 강(江)을 건너 제경(帝京)을 지으면 한 자리가 중렬(中裂)되어 한강(漢江)을 격(隔)하리라.고 하였고, 또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에 말하기를, 눈을 들고 머리를 돌려 산 모양을 살펴보니 임(壬 북쪽 )을 등지고 병(丙 남쪽 )을 향한 곳 이곳이 선오(仙鼇)요, 음양의 꽃이 3, 4겹으로 피었으매 몸소 옷을 벗어 제치고 산을 지고 수호(守護)에 임(臨)하였도다. 안전(案前)에 조회하는 산이 5, 6겹이라 고(姑) 숙(叔) 부(父) 모(母)의 산이 솟고 솟았다. 내외문(內外門)에 개가 각각 세 마리인데 항상 용안을 모시니 마음을 딴 곳에 두지 말며 청백(靑白)이 서로 등용되니 시비하지 말라. 내외의 상객(商客)이 각각 보배를 바치고 이름을 파는 이웃 손이 자식같이 오며 나라를 돕고 임금을 바르게 함이 모두 한 마음이로다. 임자년(壬子年) 중에 만약 개토(開土)하면 정사(丁巳)의 해에 성자(聖子)를 얻을 것이요 삼각산(三角山)에 의지하여 제경(帝京)을 지으면 9년째에 사해(四海)가 내조(來朝)한다. 하였으므로 이는 명왕(明王) 성덕(盛德)의 땅입니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에 말하기를, 칭추(秤錘), 극기(極器), 칭간(秤幹), 부소(扶), 양추(樑錘)와 같은 모양의 것이 오덕(五德)의 땅이요 백아강(白牙岡)을 극기(極器)로 삼으면 70국이 항복해서 조공하여 올 것이고 그 지덕(地德)을 힘입어서 신(神)을 두호할 것이며 수미(首尾)를 정(精)하게 하고 평위(平位)를 고르게 하면 나라가 흥(興)하고 대평(大平)을 보전하리라. 만약 삼유(三諭)의 땅을 폐하면 왕업이 쇠경(衰傾)하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저울로써 삼경(三京)을 비유함이니 극기(極器)는 머리요 추(錘)는 꼬리요 칭간(秤幹)은 제강(提綱)의 곳이라 송악(松嶽)이 부소(扶)가 되매 칭간(秤幹)에 비유함이요, 서경(西京)은 백아강(白牙岡)이 되매 칭수(秤首)에 비유함이요, 삼각산(三角山)의 남방이 오덕(五德)의 언덕이 되매 칭추(秤錘)에 비유함입니다. 오덕(五德)이란 가운데 면악(面嶽)이 있어 원형이 되니 토덕(土德)이요, 북쪽에 감악(紺嶽)이 있어 곡형(曲形)이 되니 수덕(水德)이요, 남쪽에 관악(冠嶽)이 있어 첨예(尖銳)하니 화덕(火德)이요 동쪽에 양주(楊州) 남행산(南行山)이 있어 직형(直形)이니 목덕(木德)이요, 서쪽에 수주(樹州) 북악(北嶽)이 있어 방형(方形)이니 금덕(金德)이라 이가 역시 도선(道詵)의 삼경(三京)의 뜻에 부합합니다. 이제 국가에 중경과 서경은 있으되 남경이 빠졌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삼각산(三角山) 남쪽 목멱산(木覓山) 북쪽의 편편한 땅에 도성(都城)을 건립하여 수시로 순주(巡駐)하소서. 이는 실로 사직의 흥쇠(興衰)에 관련되는 것이매 신(臣)은 감히 기휘(忌諱)됨을 무릅쓰고 삼가 기록하여 신주(申奏)하나이다.

라고 하니 이에 일자(日者) 문상(文象)이 좇아 호응하였다. 예종(睿宗) 때에 은원중(殷元中)이 역시 도선(道詵)의 설(說)로서 상서하여 이를 말하였다.

  이영(李寧)

이영(李寧)은 전주인(全州人)이니 어릴 때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인종조(仁宗朝)에 추밀 사(樞密使) 이자덕(李資德)을 따라 송(宋)에 가니 휘종(徽宗)이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가훈(王可訓), 진덕지(陳德之), 전종인(田宗人), 조수종(趙守宗) 등에 명(命)하여 이영(李寧)을 좇아 그림을 배우게 하고 또 이영(李寧)에게 칙령하여 본국의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리게 하므로 얼마 후에 바치니 휘종(徽宗)이 찬탄하기를,

근래에 고려(高麗)의 화공(畵工)으로 사신을 따라온 자가 많으되 오직 이영(李寧)이 뛰어난 솜씨라.

하고 주식(酒食)과 금기(錦綺) 능견(綾絹)을 사(賜)하였다. 이영(李寧)이 젊어서 내전숭반(內殿崇班) 이준이(李俊異)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이준이(李俊異)는 후진으로서 유능한 화가는 질투하여 추천함이 적었다. 인종(仁宗)이 이준이(李俊異)를 불러 이영(李寧)이 그린 산수화(山水畵)를 보이니 이준이(李俊異)가 깜짝 놀라 말하기를,

이 그림이 만일 이국(異國)에 있었으면 신(臣)은 반드시 천금으로 샀을 것입니다.

하였고 또 송상(宋商)이 그림을 바치매 인종(仁宗)이 중화(中華)의 기품(奇品)이라 하여 기뻐하며 이영(李寧)을 불러 자랑하니 이영(李寧)이 말하기를,

이는 신(臣)이 그린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인종(仁宗)이 믿지 않으므로 이영(李寧)이 그림을 취해 배접한 뒷 부분을 찢으니 과연 성명이 있는지라 왕이 더욱 사랑하였다. 의종(毅宗) 때에 이르러서는 내합(內閤)의 그림 그리는 일은 모두 이영(李寧)이 주관하였다. 아들 이광필(李光弼)도 역시 그림으로 명종(明宗)의 사랑을 받았는데 왕이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소상팔경(瀟湘八景)을 읊으라 하고 인해 그림을 그렸다. 왕이 그림에 정통하고 더욱 산수화(山水畵)를 잘하므로 이광필(李光弼), 고유방(高惟訪) 등과 더불어 물상(物像)을 그리되 종일토록 게으름을 잊고 군국(軍國)의 일에는 함부로 뜻을 두지 않으니 근신(近臣)이 뜻을 맞추어 모든 주사(奏事)는 간단함을 숭상하였다. 이광필(李光弼)의 아들은 서정(西征)한 공으로 대정(隊正)에 보(補)해졌는데 정언(正言) 최기후(崔基厚)가 의론하기를,

이 자가 나이 겨우 20세이니 서정(西征)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10세였다. 어찌 10세의 동자(童子)로 종군할 수 있었으리요?

하고 고집하여 서명치 않으므로 왕이 최기후(崔基厚)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홀로 이광필(李光弼)이 우리 나라를 영광스럽게 하였음을 생각치 못하느냐. 이광필(李光弼)이 없었더라면 삼한(三韓)의 그림이 아마 거의 끊어졌을 것이라.고 하니 이에 최기후(崔基厚)가 이를 서명하였다.

  이상로(李商老)

이상로(李商老)는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중부(李仲孚)의 아들이다. 이중부(李仲孚)가 묘청(妙淸)과 더불어 좋게 지냈으므로 연좌되어 청주(淸州)에 유배되매 이상로(李商老)가 따라 갔다. 장년이 되어서는 방랑하여 술꾼[酒徒]만 따르더니 어떤 이상한 중[僧]이 의방(醫方)을 가르쳐주므로 이상로(李商老)가 인하여 의(醫)를 업으로 하였다. 뒤에 서울에 이르니 고관(高官)이 등창을 앓는지라 이상로(李商老)가 이를 치료하여 효험이 있었다. 의종(毅宗)이 발병이 나서 낫지 않았는데 그 이름을 듣고 불러 침을 놓게 하니 곧 낫는지라 능백(綾帛)을 주었으며 뛰어 양온 령(良令)을 제수하여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고 권대(眷待)하기를 후하게 하매 몇 해 지나지 않아 옮겨 낭관(郞官)에 이르렀다. 명종조(明宗朝)에 대부 소경(大府少卿)을 제배하였는데 때에 산업(算業)으로 급제한 팽지서(彭之緖)가 승선(承宣) 송지인(宋知仁)과 진사(進士) 진공서(秦公緖)를 참소하기를 이들이 남몰래 남적(南賊) 석령사(石令史)와 더불어 난을 일으키려 꾀한다고 하였다. 왕이 내시(內侍) 이존장(李存章)과 낭장(郞將) 차약송(車若松) 등에게 명하여 이들을 국문케 하였는데, 체포함이 매우 많았으므로 다시 내시(內侍) 윤민첨(尹民瞻)과 상장군(上將軍) 최세보(崔世輔)에 명하여 안험(按驗)케 하매 진위(眞僞)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해도(海島)에 유배하였다. 또 성문을 닫고 크게 그 당(黨)을 수색하매, 이상로(李商老)도 역시 참소로 같이 잡혀 섬에 유배된 지라 백관(百官)이 비록 그 억울함을 알았으나 두려워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곧 소환하여 복직시키고 내시(內侍)에 적(籍)하였다가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제배하였는데, 이상로(李商老)는 학술이 없는지라 식자(識者)가 그 맞지 않음을 기롱하였다.

  오윤부(伍允孚)

오윤부(伍允孚)는 부흥군(復興郡) 사람이니 대대로 태사국(太史局)의 관(官)이 되었는데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여러 관직을 거쳐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가 되었다. 오윤부(伍允孚)는 점후(占候)에 정통하여 밤이 다하도록 잠자지 않으며 비록 심한 추위나 성한 더위라도 병들지 않으면 하루 저녁도 그만두지 않았다. 별이 천준(天樽 왕의 술단지 )의 자리를 범하매 말하기를,

마땅히 술 마시는 자가 봉사(奉使)하여 올 것이라.

하였고 별이 여상림(女牀林)의 자리를 범하자,

마땅히 사신이 와서 동녀(童女)를 뽑을 것이라.

하더니 모두 그대로 되었다. 또 점(占)을 잘하매 원(元)의 세조(世祖)가 불러 시험하였으므로 더욱 유명해졌다.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국가가 일찍이 춘추(春秋) 중월(仲月)에 지구가 태양에서 먼 위치에 있는 날[遠戊日]을 사(社)로 하였는데 송(宋)의 구력(舊曆)과 원조(元朝)의 지금 책력을 살피건대 모두 지구가 태양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날[近戊日]을 사일(社日)로 하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가까운 무일(戊日)을 쓰소서.

하니 <왕이>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왕이 몸소 대묘(大廟)에 협제(祭)하고 시책(諡冊)을 올릴새 공주(公主 충렬왕비(忠烈王妃) )도 역시 제사에 참여코자 하거늘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대묘(大廟)는 조종(祖宗)의 신령이 계시는 곳이라 가히 두렵습니다.

하니 공주(公主)가 두려워하여 그만두었다. 오윤부(伍允孚)가 다시 공주(公主)에게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자주 나타나고 대한(大旱)이 더하여지니 청컨대 영선(營繕)을 늦추고 덕(德)을 닦아 재앙을 쉬게 하소서. 뒤에 만일 후회가 있으면 제가 말하지 않은 죄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말씀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공주(公主)가 장차 원(元)에 갈새 출발할 무렵에 재추(宰樞)를 불러 일자(日字)를 점(占)하여 궁실을 지으라 하니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에게 불리하오니 신(臣)이 감히 점(占)치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공주(公主)가 노하여 장차 관직을 빼앗고 매치려 하거늘 유경(柳璥)이 간(諫)하여 이를 그치게 하였다. 재추(宰樞)가 사람을 보내어 공주(公主)에게 사뢰기를,

침전(寢殿)의 목재와 기와는 이미 갖추어졌으나 일관(日官) 오윤부(伍允孚)는 토목공사가 왕과 공주(公主), 세자에게 불리하다 하여 날짜를 점(占)치려 하지 않사오니, 바라건대 호종하는 일관(日官) 문창유(文昌裕)를 시켜 날을 점(占)치도록 지(旨)를 내리소서.

하니 공주(公主)가 노하여 오윤부(伍允孚)를 유배코자 하매 왕이 부득이 그 관직을 면하였다. 뒤에 왕이 오윤부(伍允孚)가 빨리 날짜를 점(占)치지 않았다 하여 이를 매치니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날짜를 점(占)치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위협으로 이를 가리게 할진대 가리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오니 신(臣)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감히 명령에 아첨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화성(火星)이 달을 먹으매 오윤부(伍允孚)가 문창유(文昌裕)와 더불어 울며 왕께 사뢰기를,

화성(火星)이 달을 먹은 것은 비상한 변(變)인데 어찌 중[僧]에게 공양하고 불(佛)을 섬기는 것으로써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그 시주함을 삼가하여 재변(災變)을 멸(滅)하소서.

라고 하니 이에 직언(直言)을 구하고 조성(造成)하는 역도를 파하였다. 오윤부(伍允孚)가 전법 총랑(典法摠郞) 박인주(朴仁澍)에게 말하기를,

사(司) 내의 일이 어찌 그렇게 많이 지체되는가?

라고 하니 박인주(朴仁澍)가 말하기를,

내교(內敎)의 판지(判旨)가 빗발같이 많이 내려오니 어찌 지체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므로 오윤부(伍允孚)가 왕께 고하거늘, 왕이 하여금 박인주(朴仁澍)에게 말하기를,

내가 편벽하게 들어[廳] 그 사람을 옳다 함이 아니다. 무릇 고하는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로 하여금 일찍 판결케 하고자 하는 까닭으로 이를 명할 뿐이지 어찌 사(私)를 위한 것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박인주(朴仁澍)가 대답하기를,

만약 판지(判旨)와 내교(內敎)를 내리지 않는다고 하여 신(臣) 등이 사정(私情)을 용납하여 처리하면 그 죄가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어느날 용화원(龍化院)의 못에 있는 고기가 수없이 죽어 떠오르거늘 오윤부(伍允孚)가 말하기를,

갑술년(甲戌年 원종(元宗) 15년 )에 동지(東池)에 이같이 괴이한 일이 있더니 왕이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수성(修省)하소서.

라고 하였다. 순창궁(順昌宮)에 화재가 나니 왕이 오윤부(伍允孚)와 문창유(文昌裕)를 불러 말하기를,

경등(卿等)이 일찍이 마땅히 화재가 있으리라고 말하였는데 어찌 그럴 줄을 알았느냐?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하늘의 꾸지림이 명백하니 이 불도 오히려 작은 재앙입니다.

라고 하였다. 오윤부(伍允孚)가 또 말하기를,

천변(天變)은 가히 두려우니 청컨대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설(設)하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이제 장차 남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마땅히 행하겠다.

고 하였다. <원(元)의> 세조(世祖)가 몸소 내안(乃顔)을 정벌하니, 왕이 정벌을 돕기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平壤)에 이르렀는데 먼저 유비(柳庇)를 보내어 가게 하고 오윤부(伍允孚)로 하여금 점(占)치게 하니 대답하기를,

모일(某日)에는 유비(柳庇)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며, 전하께서도 역시 이로부터 군사[]를 돌릴 것입니다.

라고 하기에 기일에 이르러 성용전(聖容殿) 뒷산에 올라 북녘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오윤부(伍允孚)에게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의 점(占)에 틀림이 없느냐?

하고 좌우로 하여금 이를 잡게 하니 오윤부(伍允孚)가 진언하기를,

오늘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사오니 조금만 기다리소서.

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역기(驛騎)가 먼지를 날리며 돌아오니 과연 유비(柳庇)였다. 유비(柳庇)가 이르러 말하기를,

제(帝)가 내안(乃顔)을 평정하고 여러 도(道)의 군사를 파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더욱 그를 믿었다. 오윤부(伍允孚)가 성변(星變)으로 인하여 왕께 사뢰기를,

성변(星變)이 왕과 공주(公主)에게 불리합니다.

라고 하였더니 왕이 이를 물리칠 바를 물으므로 대답하기를,

백성의 원망이 없으면 이를 물리칠 수 있사온데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 2도(道)의 왕지 별감(王旨別監)과 공주(公主)의 식읍(食邑)을 파하는 것만 같지 못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왕이 다만 공주(公主)의 식읍(食邑)만 파하고 그 포백(布帛)은 좌창(左倉)에 돌려 백관(百官)의 봉급에 충당케 하였다. 오윤부(伍允孚)는 성품이 절직(切直)하여 매양 재이(災異)가 생기면 말이 매우 간절하였고 시정(時政)에 할 말이 있으면 곧 들어가 간(諫)하였으며 듣지 않으면 눈물로 굳이 다투어 기어코 청종(聽從)하게 하였으므로 왕이 이를 꺼리었다. 항상 봉은사(奉恩寺)에서 삭(朔)을 고하는데 절하고 울며 말하기를,

태조(太祖)시여! 태조(太祖)시여! 임금의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되나이다.

하고 인하여 흐느끼는데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으니 그 정성스럽고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사람됨이 용모는 추(醜)하나 말과 웃음이 적은지라 공주(公主)가 일찍이 왕께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자주 이 사람을 인견하십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오윤부(伍允孚)는 나의 최호(崔浩)라 용모는 비록 추(醜)하나 버릴 수 없다.

하니 뒤에 공주(公主)도 자못 얼굴을 고치고 이를 예(禮)로 대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천문(天文)을 그려 바쳤더니 일자(日者)가 다 취하여 이를 본받았다. 관직이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졸하였다.

  설경성(薛景成)

설경성(薛景成)은 계림인(鷄林人)이니 스스로 말하기를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의 후손이라 하고 대대로 의술(醫術)을 생업으로 하였다. 그 기술에 정통하매 처음에 상약 의좌(尙藥醫佐)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여러 관직을 거쳐 군부 총랑(軍簿摠郞)이 되었으며 갑자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승진되었고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전직(轉職)하였다가 치사(致仕)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매양 병을 만나면 반드시 설경성(薛景成)으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유명하여졌다. 원(元)의 세조(世祖)가 병이 나매 사신을 보내어 의원을 구하거늘 안평 공주(安平公主 충렬왕비 제국 공주(齊國公主) )가 여비와 옷 2 벌[襲]을 주어 보냈다. 약을 써서 효험이 있는지라 세조(世祖)가 기뻐하여 관사(館舍)와 미곡(米穀)을 주고 문지기에 칙명하여 무시(無時)로 출입케 하며 심지어 어전(御前)에서 바둑을 두게 하고 친림(親臨)하여 이를 관람하기에 이르렀다. 2년 동안 체류하고 돌아가기를 고하니 세조(世祖)가 매우 후하게 상주며 말하기를,

아내를 생각함이 아니겠는가? 너는 돌아가서 가족을 데리고 오라.

고 하였다. 설경성(薛景成)이 돌아와서 처와 더불어 가고자 하였으나 처가 불가하다 하므로 이에 그만두었다. 얼마 안되어 세조(世祖)가 그를 부르는 지라 이로부터 자주 왕복하매 세조(世祖)가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으니 전후(前後)로 준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성종(成宗)이 병이 들매 또한 이를 부르므로 인해 원(元)에 체류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수선(受禪)하매 한국 공주(韓國公主 충선왕비 계국 공주(國公主) )가 조비(趙妃)를 투기하여 비(妃)의 아버지 조인규(趙仁規)의 죄를 무고하였다. 원(元)이 사신을 보내어 국문하고 설경성(薛景成)에게 돕게 하였더니 설경성(薛景成)이 용사(用事)하는 자와 더불어 내통하지 않으므로 특히 찬성사(贊成事)를 더하여 치사(致仕)케 하였다. 졸하매 나이가 77세였다. 설경성(薛景成)은 키가 크고 풍의(風儀)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근후(謹厚)하여 비록 천자에게 알려지고 국왕에게 사랑을 입었으나 일찍이 자손을 위하여 은택을 구하지 않았으며 또한 가산(家産)을 다스리지 않았다. 아들은 설문우(薛文遇)이니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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