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의 철저한 한화정책 : 효문제의 한화정책
이번 장에서는 도무제와 북위의 화북 통일 시대에 시도되었던 <중국식 율령체제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효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 <호>의 천자도 <한>의 천자가 될 수 있다. 효문제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정치적 마인드는 화복 통일 이후 이민족 정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도무제가 북위를 개창하면서 <중국식 율령제도의 도입>이 곧 북방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여겼던 인식을 효문제는 <바이블>로 여긴 듯 싶습니다. 효문제는 선비족의 천자가 오랑캐라는 인식은 버리고, <한 : 중화민족>의 천자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선비족이라는 민족적 타이틀 외에는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였고, 중국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중국인들을 다스리고 있는 실제 북위가 곧 하늘의 명을 받은 <천자>라는 것입니다. 선비의 왕은 곧 중국의 천자이며, 한족들은 곧 <천자>의 백성들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곧, 중화민족이기 때문에 <중원>을 차지하고 있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중원>을 점령하여 중원백성들을 다스리기에 <중화>의 천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의 전환이었습니다. 2. 선비부족체제는 철저히 버리다 : 호는 곧 한이요, 한이 곧 호이다. 효문제가 즉위 후 바로 실시한 것은 <부족체제의 남은 구습>을 철저히 업애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선비족의 종래 부족 제사는 완전 폐지해 버리고, 모든 선비족들에게 한자를 사용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당연히 선비족을 비롯한 오랑캐의 풍속과 언어는 철저히 금지되었고, 오랑캐의 성씨는 한족의 성씨로 모두 교체하였습니다. 민족의 융합을 위해 한족과 선비족의 결혼을 크게 장려하였습니다. 또, 선비족의 부족세력이 반발하여 저항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선비족의 근거지인 평성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지인 낙양으로 수도를 천도해 버립니다. 선비부족들은 근거지인 평성에 머물렀지만, 효문제는 낙양에서 새로운 한족 관료들과 새 시대의 정치를 하려고 했습니다. 낙양에서의 정치는 중국식 정치제도를 철저히 수용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3. 완벽하다 못해 더욱 진보된 중국식 제민지배 시스템을 완성하다. 이러한 한화정책으로 북위는 중국식 제민지배체제를 완성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한화정책의 목적이었죠. 유목사회를 농경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농경사회에 걸맞는 시스템이 필요한데, 이 제도는 균전제도, 삼장제도, 세역제도라는 제도의 완성으로 이루어집니다. 균전제도는 균전이라는 토지를 백성들에게 지급한 뒤 이 토지에서 조세를 걷어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토지제도입니다. 삼장제도란, 향촌조직을 공고히 하고 국가가 통제하기 위해 <군현제도>를 북위식으로 개편한 제도입니다. 이것은 균전령의 반포와 함께 토지를 지급하면서 이루어진 지방 행정 제도입니다. 1. 5가는 1린으로 하여 인장 1명을 선출합니다. 인장, 이장, 당장이 곧 지방 행정을 통솔하게 되며, 이들이 호적을 정리하고 부세와 역을 부과하는 지방사회의 행정관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장>들은 모두 국가의 지배하에서 활동하였고, 이것은 향촌사회를 제민지배체제로 개편하여 효율적인 조세 확보를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역제도란 균전령에 의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균전제도로 국가로부터 땅을 받은 농민들은 각종 세금과 요역에 복무해야 했습니다. 이 균전제도는 수, 당을 거치면서 중국 고대 토지제도의 기반이 되었고, 삼장제도와 세역제도는 중국 지방제도와 부세제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틀을 이민족 왕조인 북위가 마련했던 것입니다. 4. 완벽한 중국식 토지제도를 완성하다 : 균전제도 균전제도는 북위의 가장 큰 업적중에 하나입니다. 이 제도는 주나라 정전제를 모델로 하여, 중국의 전통적인 공유와 균분 원칙을 고수하면서 이상적인 토지제도로서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전통의 <지배층 토지 소유의 제한>을 통한 농민의 토지 확보를 통해 국가 세수를 확보한다는 원칙을 충실히 지킨 토지제도입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정전제도 이래 지배층의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을 육성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 대토지를 소유한 호족세력이 득세하는 바람에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였습니다. 삼국시대 조조의 둔전제도, 서진시대의 점전제도, 과전제도 역시 대토지 소유 제한을 추구하였지만, 당시 호족들과 귀족들의 반발로 <대토지 소유 제한>만큼은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이민족 왕조인 북위가 이룬 것입니다. 북위는 중국 전통의 정전제도와 왕토사상에, 선비족 전통의 토지공유사상(유목민 토지공유제)을 더하여 균전제를 완성하였습니다. 이 균전제도가 완성되어 선비족의 유목사회가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적 농경사회로 전환된 것입니다. (균전제의 자세한 실시 내역은 위진남북조 시대 토지제도를 다룰 때, 각종 토지제도와 같이 다루겠습니다.) 5. 중국식 부병제도의 기반을 잡다 북위는 화북지방을 통일할 즈음에는 성년남자 모두를 군인으로 활용하는 병농일치적 군제를 유지하였습니다. 이 때 군사력의 거점은 선비족 거점지인 평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모든 군제를 병호제도(진호제도)로 개편합니다. 이것은 병농일치제도가 아니라, 모병제도였습니다. 즉, 전문군인을 육성하여 영구적으로 병역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였죠. 그러나, 효문제가 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면서 이 전문군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직업군인들은 거의 천민취급을 받으며 국가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죠. 이것은 비단 북위 뿐 아니라 당시 모든 남북조 사회의 공통점이었습니다. 남조에서도 국가의 개창은 미약한 군인 출신 집단에서 창업을 이루었지만, 사회 주도층이 귀족인만큼 군부의 위상이 높지 못하였습니다. 즉, 사회적 혼란기에 군인들의 사회적 신분은 문벌귀족들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층 군부와 직업군인들이 천민취급을 받는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군부세력이 효문제의 한화정책에 반발하게 되고, 효문제 이후 북위말기에 군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따라서 북위 멸망 후 서위의 우문태는 일반 민호들을 부병으로 징발하여 특정한 군부세력이 힘을 갖지 못하게 하는 중국식 <부병제도>를 지향합니다. 이 부병제도는 이후 서위를 계승한 <수>나라가 중국 전체 통일하는 기반으로 작용합니다. 6. 성족분정령으로 호족 - 한족의 일원화를 시도하다 효문제의 한화정책 중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성족분정>입니다. 성족분정이란, 선비족의 핵심귀족 8성은 한족 명문귀족 4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것은 선비부족과 한인 귀족들을 형식상 동격으로 하여 호-한의 일원화를 추구하기 위한 정책입니다. 핵심 귀족층은 <성>으로, 낮은 귀족층은 <족>으로 체계화 하여 귀족간의 위계질서를 정하되, 선비족과 한족의 귀족을 차등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선비족을 상층 지배부인 <성>족과 하층부인 <족>으로 분리하는 정책으로서, 선비족의 유목적 사회질서를 중국식 관료제적 문벌귀족제도로 전환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이 <성, 족>보다 높은 절대적 권위자로 황제를 설정하여 <황제권>은 호, 한을 막론하고 최고 위치의 <천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이것은 종래 부족장의 씨족적 위치를 국가체계내에 흡수하여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족분정은 선비족들을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누는 결과를 초래하여 선비족의 분열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7. 호한 일원적 제국 질서가 완성되다 이러한 각종 제민지배적 체제 완성과 성족분정을 통하여, 황제권은 절대화되었습니다. 이제 유목체제는 문벌귀족적 관료체제로 전환되었고, 후진적인 선비족 문화는 중화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이제 효문제 시대를 계기로, 선비족과 한족은 차별이 없어졌고, 호한일원적 제국 질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북위 시대를 <호한일원적 제국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호한일원적 제국이라는 개념은 이후 수나라,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수, 당 등의 중화제국은 주변 민족을 점령하여 이민족을 통합한 제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합니다. 8. 국사필화사건 등 한족과 선비족의 갈등은 지속되다 효문제가 호한일원적 체제를 완성하였지만, 그 이후로도 선비족과 한족은 대립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호한의 귀족체제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국사필화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북위에서 한족인 최호 등이 참가하여 <국사>편찬을 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최호 등이 편찬한 북위의 국사에는 북위의 창업과정부터 모든 내용들이 사실적으로 적혀있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고대부터 내려오는 훈고학적 유풍으로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어 옮기는 유학 사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세히 나열한 북위의 국사에는 북위 지배층들의 치부까지 적혀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최호를 비롯한 한족 관리들은 선비족 관리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대립 끝에 최호등 한족관리들이 주살되고 맙니다. 이 사건은 호족과 한족의 귀족체제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자, 한인 귀족보다 선비족 군주권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9. 왕권이 강화되면서 평성의 선비족과 군부는 동요하다 효문제 이후 강력한 <천자권>이 확립되자, 선비족의 원 거주지인 평성에 거주하던 귀족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황제는 낙양에 있었고, 황제는 낙양의 한인관료들과 정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귀족들과 황제권은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평성세력과 낙양세력은 서로 대립하였습니다. 이 때, 한화정책으로 천대받은 <모병군인>들은 평성 세력의 손을 들어줍니다. 이것을 계기로 일어난 사건이 <6진의 반란>입니다. 6진의 반란이란, 북위를 수비하는 변경의 군인들의 반란입니다. 이 6진의 반란을 진압한 자는 무장영웅 이주영과 그의 부하장수인 우문태, 고환입니다. 6진의 반란은 이주영이 진압하였으나, 반란을 진압한 이주영의 횡포가 심하여 이것이 곧 북위가 멸망하는 원인이 됩니다. 북위는 이주영의 부하인 고환, 우문태에 의해 분열됩니다. 고환은 효정제를 왕으로 옹립한 뒤 동부 업에 도읍을 정하고 동위라 국호를 하였습니다. 이후 이 나라는 북제가 됩니다. 우문태는 효문제를 왕으로 옹립한 뒤 서부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서위라 국호를 정하였습니다. 이후 이 나라는 북주가 됩니다. 여기까지만 북위에 대한 포스트로 정리하고, 이 다음 포스트에서는 동위, 서위, 북제, 북주를 거쳐 남북조가 통일되고, 수제국이 탄생하는 과정을 포스트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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