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동해와 황해를 양쪽에 두고 만주를 차지한 국가였으므로 육지활동과 함께 해양활동이 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초기에는 북방의 흑수말갈과 당나라 신라로부터의 압박을 해소하기 위하여 732년에는 대규모의 수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의 등주(현재 산동반도 봉래시)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발해는 황해를 통해서 당나라와 교역을 하였는데, 심지어는 현재 절강성 지역까지 항해하여 교역범위를 넓혔다. 특히 발해는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일본과 교섭을 활발히 하였다.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신라를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발해가 동해를 건너 일 본과 강력한 정치동맹을 맺는다면 신라를 가운데 둔 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군사적으로 도 위협할 수 있었다. 또한 그 힘을 배경으로 당나라와 유리한 위치에서 교섭을 할 수 있었 다. 이른바 해양포위외교를 추진하는 현실적인 힘을 가진 채 동아시아 외교의 실력자로 부 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발해인들은 점차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목적을 띄고 항해하였다. 그들은 배에다 호 랑이 담비 곰 등 고급 모피를 싣고 가서 몇 개월간을 머물며 팔고, 돌아올 때에는 빈 배에 다 섬유제품 금 수은 등을 실은 채 귀국하였다. 이 무역으로 발해인들은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황해를 장보고 선단이 장악한 것과 마찬가지로 발해인들은 환동해무역권을 장악하 였던 것이다. 더구나 9세기에 이르러 일본이 신라, 당나라와 소원해지면서 발해선들의 역할 은 더욱 커졌다. 장보고가 죽은 이후에는 그 역할까지 이어받아 당나라의 남방(현재 절강성 지방)과 일본 그리고 발해와 북방을 잇는 환동아지중해(環東亞地中海)의 해양네트워크를 만 들어 그 주역이 되었다.
발해인들은 해양능력이 매우 뛰어 났다. 약 200여 년 동안에 공식적인 발해사신만 34회나 파견되었고, 1,100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대량 파견된 일도 있었다. 그 외에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비공식적인 민간교역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현재 혼슈우 북방의 아끼다(秋田)에서 중간의 노토(能登)반도 가하(加賀), 쓰루가(若狹) 지역, 남쪽의 오끼(隱岐)제도, 이즈모(出雲)지역과 큐슈 지역 등 거의 전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홋카이도는 물론 사할린에도 도착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발해인들은 범선을 타고 북서풍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자연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파도가 높고 찬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의 황천항해가 불가피 했다. 더구나 동해는 황해나 남해와 달리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일이 많아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항해이었다. 거기다가 항해도 중 일어난 조난과 일본 원주민들의 공격 때문에 발해인들은 엄청난 피해를 자주 입었다. 하 지만 탐험정신이 강한 발해인들은 두려움 없이 한겨울의 겨울바다를 기운차게 넘나다녔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동아시아에는 질서재편의 강풍이 몰아치고, 독도문제나 EEZ 문제 등 에서 나타나듯 각 나라 사이에는 바다를 둘러싼 실력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남북이 분단되 어 있고, 일본 중국 러시아와 경쟁하고 있는 이 시점에 발해의 역사적 위치와 역할은 매우 의미하는 바가 크다. 특히 해양활동을 토대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정치외교의 중핵조정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은 이 난국을 헤쳐나갈 의미있는 모델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