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년 발해는 거란군에게 패전하여 멸망하였다. 거란은 발해 유민들을 임황(臨潢) 부근으로 대량 이주시키고 변방의 부(府)나 주(州)들을 토벌하였지만, 발해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력을 규합하여 끊임없이 부흥국을 세웠다. 발해인들이 세운 나라들의 실체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후발해국
발해의 왕족들이 거란의 철군을 공격하다가 남으로 물러나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다. 926년 7월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부여부에 이르렸을 때 갑자기 발병하여 운명하자 발해 왕이 그 동생을 시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대중을 거두어 철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데, 이 때의 정황으로 보아 홀한성(忽汗城)쪽에는 거란의 대군이 있었으므로 필경 장령부(長 嶺府)를 거쳐 압록부 근처에 자리를 잡고 나라 회복을 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점 령되지 않은 지역의 군마를 모으고, 또 중국과 통하면서 재기를 노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 나 935년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로 넘어가면서 종말을 고했던 것이다.
2. 안정국(定安國)
압록강 상류에 있던 발해의 유민국이다. 970년 정안국 왕 열만화(烈萬華)가 송나라에 표문을 보낸 것으로 보아 934년 대광현을 몰아낸 세력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973년에 송나 라에 보낸 표문에는 국왕이 오현명(烏玄明)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간에 열(烈) 씨에서 오(烏) 氏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세력이 자못 커져서 거 란에 위협이 되자 985년 거란군은 작전 5개월만에 정안국을 정벌하고 포로 10만, 말 20여 만 필을 노획하여 퇴군하였다.
3. 올야국(兀惹國)
발해 유민국의 하나이다. 그 위치는 홀한수(忽汗水) 상류에 있었으며 인구가 10,000여 호나 되었다. 995년 올야왕(兀惹王) 오소경(烏昭慶)과 연파(燕頗)가 철려국(鐵驪國)을 공격하 자 거란이 해왕(奚王) 화삭노(和朔奴)를 시켜 경략케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올야는 비 록 승리하였으나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서 그 이듬해 항복하였다.
4. 흥요국(興遼國)
거란에서 벼슬살이했던 발해 유민이 세운 나라이다. 거란 호부사(戶部使) 한소훈(韓紹 勳)이 남경 중경지역에서 시행했던 세제를 요동지방에 시행하려 하자 백성들의 불만이 대 단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한 동경 사리군상은(舍利軍詳穩) 대연림(大延琳)이 1029년 부 중을 거느리고 거사하여 동경유수부마(東京留守駙馬) 소효선(蕭孝先)과 남양(南陽)공주를 구 금하고 호부사 등을 죽이고 흥요국을 세운 뒤 관부의 장을 임용하는 등 세력이 커지자 남북 여진이 모두 따라왔다. 그러나 건국 1년만에 거란군에 평정되고 말았다.
5. 대원국(大元國, 大渤海)
역시 거란에서 벼슬했던 발해 유민이 세운 나라이다. 발해인 고욕의 난이 평정된지 1 년만인 1115년 봉공관(捧供官)인 고영창(高永昌)이 발해의 용감한 군마 2000인을 거느리고 백초곡(白草谷)에 주둔하며 완안여진군(完顔女眞軍)을 막고 있다가, 1116년 정월 초하룻날 밤 학정을 일삼던 동경유수 소보선(蕭保先)을 죽이고 동경성을 탈취한 뒤 나라이름을 대원 (大元, 大渤海 皇帝)이라 하고 융기(隆基)라는 연호를 썼다. 거란은 대군으로 東京 회복전을 폈으나 고영창은 이들을 잘 막아내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난 완안여진(完顔女眞) 금(金)에게 패하여 살해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