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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발해의 남쪽 국경선

 발해의 남쪽 국경
 


서 병 국(대진대 교수)


한반도에서 발해과 신라가 남북국시대를 이룬 것은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국은 동해안과 서해안에 걸쳐 접경하였으나 이 문제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당나라에서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넘겨주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발해국은 남쪽으로 니하(泥河)에서 경계를 이루었다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이 양국 경계에 관한 전모이다. 이 두 기록을 근거로 한국·일본의 연구자들이 나름대로의 연구성과를 발표한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상황이다.

고려에서 발해국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아 불분명한 양국의 경계를 처음 밝혀보려 한 인물은 실 학자인 유득공·정약용 등이며 그 후 외국 학자는 일본의 쯔다(津田左右吉)·마쯔이(松井等)·도 리야마(島山喜一) 등이다. {신당서}에 실린 니하(泥河)의 위치가 밝혀지면 양국의 경계는 쉽게 밝 혀질 수 있으련만 지금까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니하(泥河)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네 번 실려있다. 정약용은 두 책의 니하(泥河)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으나 일본학자는 다른 것으로 보았 다. 또한 정양용은 니하(泥河) 위치를 강릉 부근으로 보았으나 일본학자는 안변의 남대천 또는 용 흥강이라고 보았다.

{신당서}의 니하(泥河)는 양국이 공존하던 남북국시대의 것이며, {삼국사기}의 니하(泥河)는 삼 국정립기의 것이다. 이처럼 니하(泥河)가 시대적으로 다르다는 데서 일본학자는 두 개의 니하(泥 河)설을 발표하여 정약용의 니하(泥河) 단일설과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그의 저서 {아 방강역고}에서 니하(泥河)는 강릉 북쪽에 소재한 니천수(泥川水)라고 단정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니하(泥河)가 니천(泥川)으로 적혀있기도 하다. 정약용은 니하(泥河)의 위치를 막연히 강릉과 양양 사이라고 했으나 필자가 직접 답사를 통해 강릉에서 북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는 명주군 연곡면을 흐르는 80리 길이의 연곡천으이라는 것을 로 확인하였다. 필자는 {신당서}의 니하(泥河)를 대동강으로 보고 있으며 양국의 동해안 경계를 {삼국사기}의 니하(泥河-지금의 연곡천)로 잡고 있다. 요즘 북한에서도 필자가 주장하는 강릉근교 설을 찬동하고 있다.

과거 일본학자는 강릉 근교의 니하(泥河)에 양국의 경계가 될만한 지리적 조건이 없다하여 이 곳이 경계가 될 수 없다고 했으나 658년(태종무열왕 5) 강릉이 신라와 발해의 경계였던 사실로 보아 강릉 근교의 니하(泥河-연곡천)를 충분히 양국의 동해안 경계가 될 수 있다. 지금도 연곡천 의 상류에는 옛 산성이 남아있다.

이 글이 인용된 원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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