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성왕(聖王)은 천하를 다스리면서 백성들은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욕심을 고르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까닭에 예(禮)로써 조절하였으며, 그 욕심을 징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까닭에 법으로써 제어하였다. 조절함은 방탕하게 됨을 막는 것이요, 제어함은 그 지나치고 과람하게 됨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절, 제어하는 것은 모두 천칙(天則)의 본연에 따른 것이고 사람의 사사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곧 음일(淫佚)해질까 두려운 것이니, 어찌 예와 법을 할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하늘이 오륜(五倫)을 서(敍)하여 법을 두고, 하늘이 등급을 질(秩)하여 예(禮)를 두었다.” 하였다. 질서의 근본은 함께 하늘에서 나온 것이니, 질이 바로 서이며 서가 바로 질이다. 그리하여 예와 법은 한가지인데, 특히 경우에 따라서 말을 다르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위로 교(郊)촵묘(廟)의 제사(祭祀)로부터 조근(朝覲)촵직공(職貢)촵졸승(卒乘)촵부세(賦稅) 따위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라 하며 또한 법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그 근본이 이미 한가지이므로 그 작용하는 것도 또한 처음부터 같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쇠퇴하고 도의가 망해져서 선왕(先王)의 전장(典章)과 법도가 다 찢기고 없어지니, 임금된 자는 천하를 자기 한 몸의 사사로운 물건인 양 여긴다. 대저 천하는 큰 물건이요, 천하의 이(利)는 큰 이인데, 이것을 제가 오로지 하고자 생각하므로 진실로 천하 사람을 위엄으로 협박하고 통절하게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하여 제 요령껏 혹독한 형벌을 제정하여 천하를 호령하면서, 그것을 법이라 하였다. 이 법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사리(私利)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하늘의 질과 서가 아니었다. 예란 제사에 제기나 벌여놓는 것처럼 대단하지도 않은 일뿐이고, 법이란 형벌과 옥송(獄訟) 따위뿐이다. 이러하니 그 예가 되는 근본을 잃은 것이 어찌 예뿐이리요? 법도 또한 법이라 하기에 부족하다. 왜냐하면 법의 근본이 하늘에서 나왔고, 사람은 명을 하늘로부터 품수(稟受)했은즉, 법 앞에는 귀한 사람, 천한 사람의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법의 규제를 받아서 감히 스스로 방자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참으로 선왕의 예법인 것이다. 지금은 법을 제정할 때 하늘에 근본을 두지 않고 사람의 사심으로써 만든다. 사람이 제 마음대로 만들었으니 그 규제를 기꺼이 받겠는가? 그러므로 후세의 법은 오직 신민(臣民)에게만 시행될 뿐이고 천자에게는 상관이 없다. 오직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천자가 제 하고 싶어하는 데에 따라서 법을 만든다. 게다가 제 의사를 한껏 반영해서 음란함을 부리며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만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면서, 오히려 방자하게 민중에게 호령하기를, “이것이 진실로 법이다.” 한다. 아아! 법을 만든 그 근본이 어찌 참으르 그러했으리요? 세상 선비들은 보고 들은 것에 익숙해졌고, 임금의 위엄을 겁내어서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군신(君臣) 사이의 의(義)에는 죽음은 있어도 버림받음은 없다는 것과,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장차 하려는 뜻이 있으면 반드시 베어 죽인다.”라는 말을 망령되게 인용하고, 뜻을 굽히고 세상에 아부하며 경전(經傳)을 인용하여 억지로 갖다 붙인다. 무릇 힘으로 항거해내지 못하면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천지의 상도(常道)요, 고금의 대의(大義)라 한다면, 이것은 또 2천 년 이래로 학문을 강론한 자의 허물이다. 그리고 그 예와 법의 근본을 능히 깨달은 사람도 드물었다. 하물며 우리 동방은 궁벽지게 한 모퉁이에 있어 그것을 존숭(尊崇)하고 흠모한 이는 오직 중국 진(秦)촵한(漢) 이후의 선비였다. 이를 본받고 이를 법하면서 그들의 조잡한 학설만을 배울 뿐이고, 진리는 탐구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형적(形跡)만 비슷하도록 모방할 뿐이며, 몸소 실행하지는 않은 터인즉, 선왕의 전장(典章)을 어찌 급급히 말했겠는가. 이러므로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한 번도 좋은 시대가 없었다. 내가 더벅머리 아이 적에, 근세의 큰 선비인 다산(茶山) 선생이 저술한 글이 수십 종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 같은 것은 모두 옥송(獄訟)을 불쌍하게 여기고 백성에게 편리하도록 하는 절실한 글이거니와, 더구나 《방례초본(邦禮艸本)》은 나라를 경영하고 다스림을 마련하여, 지난 세대를 잇달고 내후(來後)를 개발하는 큰 전장이니 주관(周官) 법도에 근본하여 그때의 형편과 인정에 알맞도록 참작하였다. 바야흐로 고요한 마음으로 독특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어서는, 비록 맹자(孟子)의 말이라도 따르지 않음이 있었는데, 하물며 그 이하인 마(馬)촵정(鄭)촵공(孔)촵가(賈)이겠는가. 자신의 서문에, “선왕은 예로써 법했는데, 후왕(後王)은 법으로써 법했다.” 했으니, 여기에서 선생의 학문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미 예를 법으로 할 수 있음을 알았으면, 예 아닌 것을 법으로 할 수가 없음도 또한 당연히 알아야 한다. 이러므로 이 말은 질서의 근본이 모두 천칙에서 나왔고 예와 법이 한 가지라는 것으로,후세가 함부로 사욕을 부리면서 억지로 법이라고 이름한 것과는 다르다. 선생 같은 분은, 호걸스러운 사람이 문왕(文王)의 시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왔다고 할 만하지 않겠는가. 아아, 선생의 재주와 학문도 이미 세상에 펼쳐져 시행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과 빗맞고 남들에게 따돌림당해서 거친 산, 장기(?氣) 있는 바닷가로 귀양까지 가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늙어서 죽기까지 한갓 빈말만을 세상에 남겼은즉 이것 또한 이미 슬픈 일이다. 그런데 세상의 도의가 더욱 나빠지고 선비의 기풍이 더욱 비루해져서 오직 녹봉(祿俸)과 이욕(利慾)만을 도모하여, 권세와 임금의 총애가 있는 사람의 집에 부지런히 드나들거나, 그렇지 않고 산림에서 도덕을 강구하고 학문을 담론하는 자도 또한 악착스럽게 고비(皐比)에 앉아서 문호(門戶) 하나 수립하여 제 한 몸 사사로이 계획하는 데 급급하다. 선생의 말씀은 저 은하수 같이 아득하게 여겨서 일찍이 지나치는 길에서도 묻지를 않아, 선생의 글이 상자 속에 담긴 채로 먼지와 그을음이 앉고 좀벌레만 배부르게 한 지가 벌써 1백 년이나 되었으니, 나는 여기에서 그윽이 느낀 바가 있다. 일찍이 들으니, 서양 사람으로서 몽테스키외는 《만법정리(萬法精理 : 법의 정신)》를 저술했고, 루소는 《민약론(民約論)》을 저술했는데, 정부에서 그 책을 급히 구해서 시행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한다. 학설이 한번 나오자 바람이 일 듯이, 우레가 움직이듯이 하여 세상 사람들의 보고 들음을 불끈하게 한번 새롭게 하였고, 또한 그에 따라서 더욱 깊이 연구하고 더욱 정밀하게 강론하였으니, 지금 유럽 여러 나라가 나날이 부강하게 되는 것은 모두 학술의 공이다. 지금 선생의 글로써 몽테스키외와 루소 등 여러 사람의 학술을 비교하여, 그 사이에 경중을 가늠하기는 진실로 쉽지 않으나, 다만 저들은 모두 분명한 말로 바로 지적하고 숨기거나 꺼리는 바가 없는 까닭에 가슴속 기이한 포부를 능히 죄다 발표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생의 말은 완곡하면서 정당하고, 정밀한 중에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가끔 노출되어서 지극히 이치가 있다. 이따금 문장을 대하면, 여러 번 탄식하면서 감히 말을 다하지 못했는바, 이것은 선생이 만났던 시기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이유로 선생이 저 사람들보다 못함이 있다 한다면, 사리에 합당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선생의 학술은 오직 당시에 시용(施用)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구구한 공언(空言)처럼 취급되어 강론하지 않았다. 몽테스키외와 루소 같은 여러 사람들의 도(道)와 말이 시행되어, 그 공적이 한 세상에 아름답고 광채가 백대에 드리운 것과 비교하여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이 점에서 나라가 선생의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나는 거듭 슬퍼하고, 동서양이 서로 비교되지 않음을 깊이 한탄하는 바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 사람의 때를 만나고 못 만남에 따라서 나라의 성쇠와 존망이 매였은즉 내가 선생을 위해 슬퍼함도, 어찌 다만 그의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위한 것뿐이겠는가. 근래에 동지 여러 사람이 회사를 세우고 국조(國朝)의 문헌과,산림에 숨어 살던 기숙(耆宿)의 저술을 수집하면서 이 글을 첫째로 간행하였다. 선생의 글이 끝내 묻혀버리지 않을 줄은 내가 진실로 알고 있었거니와, 그 먼지와 그을음 앉은 상자 속에서 나와서 천하에 공포되게 된 것인즉, 제군의 애씀이 부지런했다 할 수가 있다. 오직 그것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에 사람들이 강론할 수 없었고, 오직 강독하지 못했으므로 또한 시행될 수가 없었다. 진실로 널리 유포되어서 강독하는 자가 많아진다면, 취하여 정사에 시행할 자가 없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무릇 선생의 글이 정사에 시행되어서 질서와 전례의 근본을 밝히게 된다면, 그것이 겨우 한 나라의 법이 될 뿐 아니라 천하 후세의 법이 될 것임도 의심할 바 없다. 그런즉 선생이 비록 당시에는 불우했다 하더라도 후세에 대우받음은 쉽게 요량하지 못했으리라. 무신(戊申)년 4월 초하룻날 아침에 후학 이건방(李建芳)은 삼가 서문한다. - 경세유표, 방례초본 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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