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계곡(谿谷) 장 상군 지국(張相君持國)은 어린 나이에 아비를 여의고 자라나 겨우 15세 소년 때에 이미 사부(詞賦)로 이름을 떨쳐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어른들과 선배들이 다투어 초대하고 칭찬들을 하였으며 다른 집 자제들은 물론 선비들까지도 잇따라 찾아와 마치 난봉(鸞鳳)을 대하는 것처럼 그의 자태를 한번 보려고 하였다. 그러고는 하룻동안이나마 기쁨을 만끽하고 그와 교유하는 인사들의 말석에라도 끼이고 싶어하면서 오직 자기들을 무디고 거칠다 하여 내치지 않을까 걱정들을 하였는데, 공은 온화함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단속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더듬거릴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서는 반걸음도 자리에서 떠나지 않은 채 계속 질문하러 오는 자들을 상대하여 변론하면서 조금도 숨기는 것이 없이 답변하자 모두들 물러가 한목소리로 공을 자랑삼아 말하기를 ‘문장도 문장이지만 기량은 더욱 훌륭하다.’고 하였다. 공은 20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23세에 대과(大科)를 통과하였는데, 그런데도 오히려 이야기하는 자들은 공이 일찍 뜻을 얻지 못하고 늦게야 되었다고 유감스럽게 생각하였으니 얼마나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젊어서 도성 서쪽에 가정을 꾸몄는데 그 집은 바로 공이 살던 옛집이었다. 그때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의 경칭)께서 거처하시던 곳이 그 옛집과 담 하나를 끼고 가까이 있었으며 얼마 뒤에 대부인께서 도성 남쪽에 집을 사셨는데 그곳은 또 본인의 친가(親家)와 잇닿아 있었다. 공은 나를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외람되게 오거(伍擧)와 성자(聲子)의 교우관계처럼 대해 주었으며 또 문장이나 행실 면에서 서로 연마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정해 주는 영광을 얻었는데 1편(篇) 1구(句)마다 서로들 바로잡으며 토론을 벌이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런데 아, 머리 돌리는 사이에 어느덧 나이 50이 지나가더니 공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인간 세상 어디를 봐도 실의(失意)에 잠겨 살맛이 전혀 나지 않는 판에 공의 아들 선징(善?)이 공의 문집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해 왔다. 아, 이것은 모두가 평소에 서로들 고치고 논란을 하던 것들로서 이미 공의 전모를 알고 있는 터에 어찌 끝까지 다 읽어 볼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외람스럽게도 내 마음속에 ‘어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더니 난삽하고 어긋나기만 하여 늘그막까지 문장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떻게 감히 멀리 현안(玄晏)을 자처하며 억지로 불결한 것을 가지고 부처의 머리에 끼얹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공은 병이 위독해져 이미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도 오히려 내가 그 즈음에 지은 글 몇 통을 요구해 거듭거듭 비평해 마지않았고 보면 내가 또한 어떻게 감히 끝내 사양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에 마침내 눈물을 훔치고 한마디 말을 해 보려 한다. 글[文] 속에 내재해 있는 도(道)의 속성을 과연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대저 글과 도는 효용(效用)이라는 면에서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니 분리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글이 아니다. 삼대(三代) 이전에는 이러한 도가 크게 행해져서 글은 곧 말이요 말은 곧 법이었으며 법은 곧 말이요 말은 곧 글이었으니 《서경(書經)》의 전(典)촵고(誥)촵모(謨)촵훈(訓)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삼대가 쇠하고 나서는 도가 위에 있지 않게 되었으므로 우리 부자(夫子 공자(孔子))께서 하늘이 마음대로 풀어놓으신 성인(聖人)의 자질[天縱將聖]을 가지시고도 옛것을 전하기만 할 뿐 창작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述作]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으셨으며,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언사를 닦아 정성을 표한다.[修辭立其誠]’라고 하고 ‘언사는 서로 통하게만 하면 된다.[辭達而已矣]’라고 하고 ‘글은 명백하게 분수껏 지어야 한다.[文明以止]’라고 한 것들이 하나만 기록된 것이 아니니, 이로써 통하게 한다는 것은 당시의 세상을 다스리기[經世] 위함이요 분수에 맞게 한다는 것은 뒷세상에 전해 주기[垂世]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그러다가 세도(世道)가 없어지면서 글이라는 것도 빈 수레가 되고 말았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이 그래도 삼대의 기상을 떨쳐 두 개의 출사표(出師表)를 지은 것은 훈명(訓命)과 방불한 것으로서 글과 도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릴 만하고, 후대의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 증공(曾鞏) 등 몇 명의 군자가 ‘글을 통해 도를 깨닫는다.’고 말한 것도 진정 꾸며 낸 말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는 각 시대마다 제자(諸子)가 수풀처럼 일어서고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네들이 이리저리 짜맞추고 아름다운 글귀를 따먹은 것들이 온통 현란한 것 일색이고 구미에 맞도록 잘 요리를 한 것이라 하더라도 양(羊)고기에 호랑이 껍질만 덮어씌운 것과 같으니, 언사는 통하게 하기만 하면 그뿐이고 글은 명백하게 분수껏 지어야 한다고 하는 정신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돌아보건대 교묘하게 짓는 자들은 인위적으로 기교를 부려 하늘의 조화를 탈취하려 하면서 스스로 불후(不朽)의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고 하니 조자환(曹子桓 조비(曹丕)의 자(字)) 같은 무리가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조자환이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3분의 2의 영토를 차지하는 등 거리낄 것 없이 위세를 행사하였으면서도 으레 대업(大業)을 이룬 성대한 일을 하찮은 일로 돌려 버리고는 글 짓는 일을 영화의 즐거움이나 수복(壽福)으로 비유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것 또한 ‘아무리 좋은 말도 글로 남겨 놓지 않으면 멀리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는 뜻과 합치된다 할 것인데, 더구나 글과 도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효용을 발휘하게 되는 경우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가령 계곡 상군 같은 자라면 대업을 이루게 한 장한 일에 있어서도 꿀릴 것이 없겠거니와 그를 두고 경세(經世)하고 수세(垂世)했다고 하더라도 그 누가 부정하겠는가. 대체로 공은 나이 스물이 되기 전에 벌써 사서(四書)와 이경(二經)과 《이소경(離騷經)》촵《문선(文選)》촵《장자(莊子)》촵《한비자(韓非子)》 등의 책을 모조리 독파하였는데, 읽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반드시 끝까지 구명(究明)하여 은미(隱微)한 점까지 다 파헤쳤으며, 그 속에 푹 빠져 음미하면서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였다. 그리하여 사부(詞賦)는 물론이고 산문(散文)에 있어서도 바르고 우아한 글이 거침없이 펼쳐져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호)의 방에 불쑥 들어간 격이 되었으니 그만하면 글과 도를 논할 즈음에 탄식을 자아내게 할 정도의 경지가 되었다고도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머리를 굽히고 민(? 주희(朱熹)), 관(關 장재(張載)), 낙(洛 정호(程顥)와 정이(程?))촵염(濂 주돈이(周敦?))을 좇아 사수(泗洙 공자(孔子)의 학문을 말함)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이기(理氣)와 성정(性情)의 나누어짐에 대해서 세밀히 분석하였는데, 평소 학문을 연구한 흔적을 보이려 하지 않았음은 물론 자존심에 구애받지 않고 늘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으며 느슨하게 풀어 주고 죄어 당기는 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였다. 그런가 하면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두 방면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말하자면 천지간의 크고 작고 드러나고 숨은 온갖 물상(物象)이 모두 그의 심안(心眼)에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관각(館閣)에 몸을 담고 있다가 곧바로 당화(黨禍)를 입어 한직(閑職)에 거하면서 곤란한 처지에 있게 된 뒤로는 더욱 힘을 쏟아 선진(先秦), 양한(兩漢), 황명(皇明)의 대가(大家)들의 글을 읽고 문장으로 발현시켰는데, 이는 이른바 인의(仁義) 도덕(道德)에 훈습되어 환하게 된 사람만이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운율(韻律)이 있는 글들은 조금도 지어 보려 하지 않았으나 오언(五言)의 경우만은 한두 수씩 간간이 지어 내곤 하였는데 왕왕 진(晉) 나라 시대의 작품을 능가하는 것도 있는 등 음미하기에 족하였다. 그러다가 연좌되어 파직된 뒤에 비로소 당(唐) 나라의 시문에 빠져 들었는데,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대편(大篇)은 말할 것도 없고 적요한 몇 마디 말에 대해서조차 반드시 삼가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독송하기를 박사 제자(博士弟子)처럼 하였다. 공이 언젠가 말하기를 ‘나는 불민(不敏)하기 때문에 절구(絶句)를 지으려면 반드시 절구를 읽어 보아야 하고 율시(律詩)를 지으려면 반드시 율시를 읽어 보아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실로 언어로 표현할 때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정신이 독실하게 드러난 것으로서 그야말로 눈으로 처음 보고 귀로 처음 듣는 말이 아니겠는가. 또 일찍이 나에게 말해 주기를 ‘내 시를 보면 운(韻)은 제대로 안 되었어도 치(致)는 있는데, 운은 천부적인 능력에 속하고 치는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내 마음속으로 정말 그렇게 여겨져 이 말을 마치 공령(功令 과문(科文))처럼 떠받들었다. 아, 그릇에 한 번 비유해 본다면 청묘(淸廟)와 명당(明堂)의 호련(瑚璉 서직(黍稷)을 담아 제사 지내는 그릇)과 같다 할 것이요, 말[馬]에 비유한다면 그 소리가 난화(?和 천자 수레에 달린 방울)에 맞고 그 걸음이 마부의 절제에 맞는다 할 것이니, 아무리 말솜씨가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텐데, 이에 대해서는 제대로 변론할 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상군(相君)이 규구(葵丘)의 맹약(盟約)을 주관하면서 손으로 소의 귀를 잡을 때 문필에 종사하는 인사들 거의 모두가 그의 휘하에 들어왔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일을 면하지 못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또한 할 말이 있으니, 나는 일찍 폐고(廢固)된 탓으로 기쁘게 조칙(詔勅)을 받고 일어서는 일에 참여할 길이 없었던 것이었다. 내 생각은, 문장 수업에 있어서는 장차 예술가로서의 마음가짐을 갖고 옛것에 뜻을 두어 거기에서 소재를 찾고 법도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 쪽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공이 일깨워 주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다. 글이라는 것은 말이니,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 곧 글인 것이다. 따라서 글이 작성되었다 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글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 준 것에 대해 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여전히 떼어 내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로 걸음을 배우려 했던 수릉(壽陵) 사람처럼 될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아, 실다운 마음에 뿌리를 박고 실다운 학문에 근거하여 글과 도가 서로 어우러져 쓰임이 되고 사람의 기교와 자연의 조화가 문득 수렴되어 둘 다 온전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단 글을 통해서 깨닫는 정도가 아니게 되었으니 한유, 구양수, 소식, 증공 등도 아마 그 뒤에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볼 것이다. 《맹자(孟子)》에 ‘5백 년쯤 되면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자가 나오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감히 모르겠지만 지금으로부터 5백 년쯤 되어서 과연 지국(持國)과 같은 자가 또 나올 수 있겠는가. 옛적에 왕원어(王元馭 원어는 명(明) 나라 왕석작(王錫爵)의 자(字))가 원미(元美 명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자)의 서문을 쓰면서 ‘나는 나의 원미만을 알 뿐이다.’고 하였는데, 나 역시 ‘나는 나의 지국만을 알 뿐이다.’고 하려 한다. 계미년(1643 인조 21) 4월 16일에 우인(友人)인 나주(羅州) 박미(朴?)는 서(敍)한다. - 계곡선생집 서, 박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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