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의 토지제도 분석 : 둔전제, 점전제, 과전제, 균전제
이번 장에서는 북위의 토지제도인 균전제도에 대하여 심도있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북위의 균전제도는 이후 포스팅 될 당나라의 <균전제도>와 비교해서 파악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하네요. 이후 당나라의 <균전제도>에서도 북위 균전제를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1. 중국 전통의 <공유, 균분 정책>은 계속되어야 한다. 북위의 토지제도를 다루기에 앞서 한나라 멸망 후 토지제도의 변천을 간략히 다뤄보겠습니다. 한나라는 한무제의 <억상정책>으로 상인들이 <토지를 사서 이익을 챙기는> 호족화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실제 후한은 지방의 토지와 군사를 가진 호족들이 연합한 <호족연합정권>이었고, 왕망의 신이 멸망한 것도 <호족들의 반발> 때문이었습니다. 후한말 황건적의 난의 원인도 <호족들의 대토지 소유>에 대한 반발이 원인이 되었고, 이 황건적을 진압한 자들도 <무장한 호족>인 조조, 원소, 동탁 등이었습니다. 중국의 토지 제도의 역사는 이 <호족>들의 토지 소유를 축소하기 위한 국가의 총체적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는 호족의 대토지 소유 자체가 국가의 위협이자, 조세원의 감소였으므로 철저한 <중농정책>과 함께 <한전책>을 실시합니다. 한나라 애제 때의 한전책부터 시작한 이 <토지소유제한> 정책은 중국 전통의 토지정책으로 자리잡습니다. 중국 전통의 토지 제도는 주나라 때의 <정전제>가 모델입니다. 정전제도는 <주나라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이 제도는 900무의 땅을 8가가 100무씩 나눠갖고, 중앙에 남은 100무를 국가를 위해 경작한다는 <공유와 균분>의 원리로 이루어진 토지제도입니다. 중국의 한전제, 둔전제, 점전제, 과전제 등 모든 토지제도는 공유, 균분의 정신을 이념상 원칙으로 하고 있고, 호족의 <대토지 소유 제한>을 실제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공유와 균분, 토지소유의 제한>을 완성한 토지 제도가 바로 북위 - 수당으로 이어지면서 완성된 균전제도입니다. 2. 조조의 토지제도 : 유민을 먹여살리고, 전쟁을 준비하라! 삼국을 통일한 조조, 조비 일가의 <위>는 통일을 위한 정책으로 <둔전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둔전제도는 <위나라>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둔전제의 가장 큰 목적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하여 조세원과 군역원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조조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화북 지방에서 어떻게 하면 <세금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조는 <진나라> 시기 상앙, 진시황이 실시하였던 법가적인 <변법책>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중 핵심적인 것이 <군공수작과 분가정책>이었죠. 조조는 주인이 없는 황무지를 강제로 유민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이사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들 유민들은 황무지의 둔전민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유민들은 둔전민이 되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먹을 것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조조는 처음에는 적은 세금을 걷었지만, 점차 개간지가 넓어지자 5-6할의 세금을 걷어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민들은 절반의 세금에도 불구하고 개간된 땅에서 나오는 수입이 <유민생활>보다 훨씬 윤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유민들은 전시에는 교대로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조조는 전쟁에 참여한 유민들에게 아주 적은 보상을 하였습니다. 군역에 대한 <보상>이라는 획기적인 방법은 유민들의 사기를 높여주었습니다. 이 둔전이 있는 지역에 따라 <청주병, 유주병, 진병> 등으로 불린 유민들로 인해 조조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자영농 육성이 국내 호족들의 토지 겸병을 막는 데 효율적인 <명분>이었다는 점입니다. 조조는 둔전으로 유민문제를 해결하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면서, 군사력을 마련함과 동시에 <반항적인 호족>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는 효과도 얻었습니다. 3. 서진의 토지제도 : 토지소유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정하라! 서진의 토지제도는 둔전제도를 더욱 발전시킨 제도입니다. 서진에서는 <농민에게 일정한 토지를 부과>하여 <호족이 대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는 방법을 이용하였습니다. 즉, 자영농 육성으로 호족의 성장을 억제하는 것이죠. 이러한 서진의 토지제도는 점전제와 과전제도가 있습니다. 점전제도부터 볼까요? 점전제도는 결혼한 가족에게 100무의 땅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일단 성년남자에게는 모두 70무의 땅을 지급하는데, 부인이 있으면 30무를 추가 지급합니다. 따라서 한 가족은 100무의 땅을 지급받습니다. 또 관등이 있는 자는 관인 품계 1품관당 5경정도의 토지를 추가로 가질 수 있습니다. 9품관은 10경, 1품관은 50경의 토지를 가질 수 있죠. 어떻게 보면 관직있는 자가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것은 관직이 많은 자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조치입니다. 즉, 가장 높은 직관을 가진 관리도 50경 이상 토지를 못 갖는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이것은 중국 전통 토지제도인 <한전책>을 의미합니다. 점전제는 쉽게 말하자면, 토지, 전객에 대한 소유의 상한선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의 한전책이라고 하면 보통 <토지 상한선의 규제>를 뜻하는 한전책입니다. 다음으로 과전제도를 볼까요? 이 제도는 의무적으로 모든 성년 남자에게 50무의 땅을 강제 경작시키는 제도입니다. 만약 부인이 있다면 20무를 추가하여 총 70무를 경작하여야 합니다. 이 제도는 사실 <점전법>에 포함되는 제도입니다. 점전제도에서 이미 남자 70무 + 부인 30무를 통해 100무를 주었는데, 그 100무 중에서 남자 50무와 부인 20무인 70무는 받기 싫어도 강제로 받아서 경작해야 함을 뜻합니다. 결국 점전제도가 자영농민의 특권이라면, 과전제도는 자영농민의 의무경작을 규정한 제도입니다. 이 제도가 생긴 이유는 어떤 백성이라도 토지를 일정량(70무)이상 경작하게 함으로서 <유민을 방지하고, 국가 조세원의 최소량 이상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토지의 <하한선>을 정해 최소한의 영업전을 보장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즉 서진의 제도는 토지 상한선 제한의 점전제도와 토지 하한선 제한의 과전제도를 합친 <한전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국가 권력이 직접 모든 민, 토에 개입하여 <토지소유에 대한 국가 간섭>을 확립함으로서 <균전제도>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4. 북위의 균전제도가 시작되다. 북위의 균전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둔전제, 점전제와 과전제 등의 토지제도의 장점들을 따온 것입니다. 이 제도는 중국 전통의 <공유와 균분 원칙>을 이민족 왕조가 지키려고 노력한 토대 위에서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를 철저하게 억제>하는 기본 정신이 포함된 제도입니다. 특히 북위는 이민족 왕조로서 철저한 한화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유목민족의 성향을 농민사회 성향으로 개조할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중국 영토의 절반이상을 차지한 북위로서는 세수원의 확보가 절실하였는데, 유목기반의 제도로서는 세금을 공정하고 꾸준하게 걷을 방책을 마련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북위는 조조의 <둔전법>을 강력 적용합니다. 유민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어 강제 경작 시키고, 그 제도를 <과전법>처럼 의무적으로 실행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세원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둔전병을 얻게 되어 국가 조세와 군사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제도는 이미 조조 이래 계속된 화북지역 개간을 가속화하여 북방사회의 안정을 가져오고, 발전하는 남조 경제력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제도였습니다. 균전제도는 북위 이래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하지만, 논란이 많습니다. 일반적인 통설은 북위 이래 당나라까지 300년 이상을 계속 시행되면서, 각 왕조의 사정에 맞게 일부 내용만 수정되어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중서성>에서 입안만 되었을 뿐, 귀족들이 <문하성>에서 봉박권(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제도가 호족 세력이 약한 일부 남부지역에서만 시행되었다고도 주장합니다. 하지만, 균전제도가 시행되면서 북위사회의 제민지배체제가 성립되었고, 농민사회가 안정되었으며, 화북 경제력이 유지되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는 듯 합니다. 또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서 선비족의 유목사회는 농경사회로 전환되어 북위 정권이 남조를 능가하여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균전제도는 효문제의 한화정책에서도 핵심적인 정책이었습니다. 5. 균전제도의 내용 - 북위 편 초기 북위의 균전제도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이 제도는 이후 300년간 지속적으로 변화였고, 당대에는 상당히 달라지므로, 북위 효문제기를 기준으로 한 사료상의 균전제도의 내용입니다. 1. 노전을 지급하다 노전은 곡식을 심는 땅입니다. 쉽게 말해 서진시대의 <점전제, 과전제>에서 주었던 토지를 말합니다. 이 토지는 매매와 세습이 불가하므로 사망하거나 70세가 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며, 살아 생전에만 경작할 수 있습니다. 일단 15세 이상의 남자들(정남)에게는 40무를 경작하도록 토지를 지급합니다. 그러나 부인이 있으면 20무를 추가 지급합니다. 즉 60무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만약 황무지를 개간한다면, 이 황무지를 2포작이나 3포작으로 경작할 것을 국가가 배려하여 2배로 노전을 지급하는데, 이렇게 2배로 노전을 주는 것을 <배전>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노전에 지급할 남자에 <노비>가 포함된다는 점입니다. 노비에게도 똑같이 1명당 40무를 지급하며, 소도 노동 가치를 인정하여 소 1마리당 30무를 더 지급합니다. 단, 소에게 지급되는 토지는 120무로 제한됩니다. 이 노비와 소에게도 토지를 준다는 점이 바로 북위 균전제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즉, 토지는 <사람> 기준이 아니라 <노동력> 기준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될 경우 가장 큰 이득을 보면서 대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노비 등 일가를 거느리고, 많은 우마를 가진 <대호족>입니다. 즉, 북위의 균전제가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했지만, 이 제도 역시 대토지 소유 호족을 실질적으로는 인정하는 제도라는 점이 한계점으로 작용합니다. 2. 상전과 마전을 지급히다. 상전은 뽕나무 밭을 말합니다. 15세 이상 남자(정남)는 20무의 상전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은 국가가 사망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연립을 인정하여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습니다. 마전은 삼을 심는 땅으로 10무를 남자에게 지급하는데, 부인이 있으면 5무를 추가 지급합니다. 원택지는 호당 3인마다 1무, 노비 5인마다 1무를 지급하는 땅입니다. 공전은 관리에게 지급하는 <수조지>입니다. 관리들은 관품에 따라 일정량의 땅을 받는데, 이것은 <직역의 대가>에 해당하는 것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거나, 죽으면 반납해야 합니다. 6. 수나라에서 바뀐 균전제의 내용 수나라의 균전제는 북위와 달리 부인, 노비에 대해서는 급전이 없어집니다. 즉 성년 남자 위주로 균전을 주기 때문에 <호족>에 대한 특권이 점차 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수나라가 통일왕조로서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모든 관리들에게는 100결 이하의 영업전을 지급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00결 이하>라는 점으로 이 <영업전>이 지급됨으로서 관료들이 <대토지 소유>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 제거합니다. 또 통일왕조인만큼 균전제를 화북에서 화남으로 점차 확대하여 토지 개간에 힘쓰고, 대운하 완공으로 화북 - 강남의 경제적 연결을 시도하였습니다. 7. 당나라에서 바뀐 균전제의 내용 당의 균전제는 당의 경제제도를 포스팅 할 때 아주 자세히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변화된 부분만을 간략히 다뤄 보겠습니다. 당의 균전제는 북위, 수와 비교할 때 경제적으로 한층 발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생활의 안정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황무지도 상당히 줄어들었으며, 수대 대운하 완공과 개간사업으로 조세원이 늘어났습니다. 당대의 균전제는 호족적 특권이 거의 사라져 갑니다. 그 내용을 보면, 18세 이상의 남자에게 구분전을 지급하였는데,, 60세가 되면 절반 반납, 사망시 모두 반납을 원칙으로 합니다. 또한 여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지급하지 않았으나 실제 과처첩이나 불구폐질자에게는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균전은 원칙적으로 임의처분을 할 수 없으나 예외 경우를 두어 처분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균전제도는 시행과정의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이 당의 균전제에서도 귀족, 대관의 대토지 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으며, 호족의 토지소유를 그대로 둔채 시행되었습니다. 또 개간 가능한 황무지, 토지를 국가가 보유하고 농민에게 주어야 하지만 인구증가, 귀족의 미개간지 점유를 토지가 부족해지고, 사원전의 증가, 관전의 사유화로 인한 토지사유화가 촉진되었습니다. 게다가 불법매각으로 지배층 토지사유화가 심화되었고, 당대 후기에는 이 제도가 원할히 운영되지 않아 결국 송대 형세호라는 새로운 <대토지 소유자>가 출현하는 역사적 변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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