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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중세의 미술 - 1.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

중세의 미술 - 1.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

이 글에 대한 원문 포스트 : http://blog.naver.com/tori2984?Redirect=Log&logNo=10013241401

위 블로그를 클릭하시면 유럽 미술사에 대한 많은 자료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유럽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미술사를 정리하사는 것 같아요. 좋은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위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제가 정리하는 것보다 100배는 나은 듯 하네요. 역시 제 사이트는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해요. 근데, 마우스 방지 스크립트랑, 그림 개체 방화벽이 있어서 가져오는 게 더 어렵더군요. 차라리 포스트를 작성하고 말지.... 하지만 넘 좋은 글이라서 탐이 나더군요. 그래서 그림은 일일이 캡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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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중세는 서양의 4세기부터 14세기까지를 일컫는 '中世'(middle age)라는 말 그대로 중간시대라는 뜻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대를 현대(modern era)라 부르고 그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고대라고 ㅋ부르며 그 사이의 시대를 중간시대라 일컬은 데서 유래한 용어이다. 중세를 역사 한 구간의 중간에 끼어있는 시대라고 인식한 것은 르네상스인들의 편견이며 자기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인식의 결과이다.

 중세의 시작 연대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달리 잡고 있으나 3세기경에 중세의 징후가 이미 나타나기 때문에 3세기를 시작으로 삼는 이도 있고, 서 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기준으로 삼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중세의 공통된 특징이 기독교이므로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삼는 학설이 일반적이다. 중세의 끝 경계는 분명히 자를 수 없지만 이탈리아의 경우 르네상스의 시작을 15세기로 삼으므로 그 이전 즉 14세기까지로 볼 수 있겠다.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의 미술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술 자체에 대한 자각이나, 문명의 진단이나 예견을 요구하는 현대미술과는 달리 중세의 미술은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필요와 주문에 따라 만들어졌다. 중세 미술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예나 조각들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장인의 생산품이었으며 이러한 익명성은 중세미술을 폄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19세기 이후 순수미술 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술은 예술자체를 목적으로 한 소위 순수 미술(fine art)과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응용 미술(applied art)분야로 크게 나뉘었으며 현대 미술에서 이 분류는 회화, 조각 위주의 소위 주요 미술(major art)과 공예나 상업 디자인의 부수 미술(minor art)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중세 미술은 모두 응용 미술이며 대부분이 부수 미술이니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미술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사회 생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모든 조형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 미술은 무궁무진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세의 미술품은 예술가 혼자의 몸짓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종교와 사회의 주문에 의한 것이어서 당시 사회의 특별한 관심들을 정확히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의 미술이 고대의 것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객관적인 사실묘사를 무시하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힘을 높였다는 점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비사실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였으나 20세기 초의 미술사 연구에서는 큰 전환을 이루어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전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3세기이후 로마는 급격히 붕괴되어 정치와 경제면에서 위기에 놓여 있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5월 제국의 수도를 경제적, 전략적 요충지인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불려지는 비잔티움으로 옮겼나 이 수도 이전은 제국을 동, 서로마로의 분할을 초래하였으며 서로마 제국은 얼마가지 않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세인 527년에서 565년에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7세기 이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북아프리카를 잃어버렸고, 15세기 중엽 1453년에 오스만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은 고대 그리스어로 된 철학과 문학과 과학의 위대한 저작들을 지키고 베끼며 끊임없이 연구하여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비잔틴 예술은 헬레니즘, 고대 아시아, 사산조 페르시아 등 다양한 예술을 흡수․발전시켜 나갔다. 비잔틴 예술의 특징은 강한 종교적 색채로, 그리스 정교의 정통 교리와 강령에 충실한 신학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종교 예술과 강력한 왕권의 결합은 비잔틴의 독특한 궁전 예술을 꽃피우게 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고대의 위대한 학문적, 예술적 성과는 오늘의 서양에 전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

 천도 이전, 말기 로마의 상황은 불과 50여년(235~284년)동안 26명의 황제가 나타나는 등 아무도 앞날에 대한 확신을 갖을 수 없을 만큼 혼란하였는데, 현실에서의 이러한 불안감은 내세신앙을 낳게 하였다. 로마말기에 유행하였던 많은 사교들은 내세와 부활을 약속하는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도 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다른 사교들 보다 도덕적인 설득력이 있고 포교가 조직적이라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가 되기 이전까지의 기독교 미술은 거의 모른다고 해야할 것이다. 기원 후 5세기까지의 기독교 미술을 초기 기독교 미술이라 하는데, 이 시기의 기독교 미술의 면모는 카타콤catacomb이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배장소인 지하묘지에서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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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카타콤의 그림

삼류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보이는 그것들은 그리스ㆍ로마 벽화의 화법을 이어받아 그리고는 있으나 그 기법이 치졸하고 단순하다. 그 이유는 미술의 전반적인 수준 저하와 무엇보다도 기독교 미술이라는 것이 세련된 화법이나 기술을 이용하여 자연스러운 가시적 현실상을 표현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공인되자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엄청난 것이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기에는 공공 예배 장소를 건립할 필요도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가 재검토 되어져야했다. 새로 지어질 예배 장소의 모델을 신상을 모시는 작은 사당의 규모인 고대의 신전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교회는 사제가 높은 제단 위에서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회중을 수용하기 적합한 구조를 갖추어야 했다. 그리하여 이런 용도에 적합한 건물인 로마에서 집회소로 쓰였던 바실리카basilica가 새로운 예배당의 모델이 되었다. 바실리카는 직사각형의 큰방과 이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기둥들로 구분된 긴 복도로 이루어졌는데, 방의 맨 끝에는 애프스apse가 있어 여기에 집회 의장이나 재판관이 자리를 잡게 되어 있었다. 건물의 중심부를 이루는 직사각형의 큰방은 배를 뜻하는 동랑(胴廊,nave)이라고 하고, 동랑 좌우에 있는 동랑보다 낮은 천장을 지닌 긴 복도는 측랑(側廊,side-aisle)이라고 한다. 동랑의 양옆 벽면 상단부에는 아치형 창문을 촘촘히 뚫어놓아 자연광을 실내로 끌어들이게 했으며 지붕은 목재로 만들어졌다. 그 동안 수많은 수리와 변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초기의 바실리카는 없지만 이 건물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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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베드로 대성당 평면도

 바실리카 구조의 건축물이 세워지면서 대두된 문제는 그 벽면들을 어떻게 장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 대부분이 이교도들의 신상과 너무도 비슷한 조상(彫像)이 교회당에 세워지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커다란 실물과 같은 조각상에는 반대하였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상기시켜주고 성경의 이야기를 기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6세기말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 그림은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라고 하며, 많은 수의 문맹 신도들을 교화시키려면 이러한 형상들이 마치 어린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에 있는 그림들처럼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745년 한때 동로마에서는 우상 파괴론자들의 주장이 득세하면서 교회에서 종교미술이 금지되기도 하는 등 형상 사용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교황과 같이 막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회화를 옹호하고 나섰다고는 하지만 회화의 내용은 될 수 있는 한 명확하고 단순해야 했으며, 또 성스러운 주된 목적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것이 배제 되어야하는 상당히 제한된 범위의 표현이 가능할 뿐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술가들이 로마시대의 설명조 이야기 방식을 사용하였으나, 점차 엄격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림 85는 이러한 원칙이 매우 일관성 있게 적용된 작품으로 성경의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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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오병이어-520년경/이탈리아 라벤나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 소장

 이 작품은 붓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풍부한 색채를 발산하는 색유리로 만들어진 테세라tessera를 이용한 모자이크 그림이다. 모자이크는 원래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 인들이 건축물의 장식에 사용했고, 헬레니즘기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도 대리석의 테세라를 사용한 바 있지만, 색유리라고 하는 강렬한 색채를 발산하는 테세라 모자이크는 비잔틴, 즉 콘스탄티노플 시대의 창안물 이었다.

 풍부하고 심오한 색채를 발산하는 색유리와 돌의 입방체를 꼼꼼히 짜 맞춘 모자이크의 반짝이는 표면효과는 거대한 교회당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만들었으며, 교회당의 내부를 신성한 기운으로 감싸 안아 들어오는 신자들의 종교적 심성을 고조시키는 효과적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모자이크화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된 표현을 드러내고 있다.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명확성을 중요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난 듯하다. 이런 그림들을 처음 볼 때에 상당히 딱딱하고 엄격하게 느껴지며, 여기에는 그리스 미술의 자랑이었고 또 로마 시대까지 지속되었던 운동감과 표정의 완숙한 표현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인물들의 정면 배치 방식은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느낌마저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제작한 미술가들은 그리스 미술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옷의 주름사이로 신체의 주요 관절이 보일 수 있도록 몸에 의복이 어떻게 걸쳐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피부나 돌의 빛깔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의 모자이크 안에 상이한 색상의 돌을 혼합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림자를 땅위에 표시하고 단축법을 이용해서 그리는 데에도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이 모자이크화들이 다소 원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미술가들이 단순함을 원하고 의도한 것이지 결코 실력이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그들이 사용한 원시미술의 단순한 형식은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으로, 이리하여 중세의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방법과 세련된 방법이 기묘하게 혼합되어지게 된 것이다.

 비잔틴Byzantine은 현재의 이스탄불을 가리키는 옛 이름으로, 비잔틴 문화라 하면 1453년 터키에 멸망하기까지의 동로마제국 문화를 말한다.

 현대 정치사에서는 이 지역의 중요성이 약화되었지만, 고대 말에는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즉 동서 무역이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비잔틴이라는 지명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고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김으로써 이곳에 동로마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비잔틴미술은 동서 문화를 절충한 기독교 미술로 동방미술과 서야 헬레니즘 미술을 혼합시킨것이다. 로마제국이 콘스타티노플에 수도를 정한 후 서양 미술의 중심은 점차 동방으로 옮겨졌고 약 1천년에 걸쳐 서양과 동양 미술이 융합된 문화를 이루었다.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재임527-565)황제는 재임기간 중 확고한 동로마의 기독교 문화를 정착시켰다.

 532년의 시민폭동을 제압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정일치(祭政一致)를 확립함으로써 절대군주일 뿐만 아니라 神이 택한 이 땅의 대리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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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의 하기아 소피아-532-37/ 콘스탄티노플 현재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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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하기아 소피아 옛모습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폭동 진압 후 바로 건립하기 시작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ia(성스러운 지혜)는 비잔틴교회양식을 대변한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면에, 중앙엔 거대한 도움을 얹고, 양쪽에 반원의 도움을 둘러쌓음으로써 전체가 마치 거대한 동산같이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테네의 스카이라인을 결정하였듯이 하기아 소피아는 바다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콘스탄티노플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터어키 지배 후 회교의 모스크로 쓰일 때 사방의 탑이 세워지고, 내부의 모자이크가 많이 훼손되었지만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되어있다. 마치 하늘 지붕 같은 거대한 도움은 금으로 도금되거나 반짝이는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대리석 벽과 기둥은 마치 레이스같이 잔무늬로 새겨져 있다. 내부에서의 성스러움이 중요시된 비잔틴의 돔은 실용성보다는 종교적 상징이 강조된 건축물로 이후의 종교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로마지역의 미술품들은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이 소멸되었다. 성상파괴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 반대 세력의 반목은, 843년 황후 테오도라(Theodora)에 의해  성상우호정책으로 완전히 우회한다.  

 이탈리아반도 내의 동로마 영토였던 라벤나(Ravenna)에는 5-6세기의 미술, 특히 모자이크가 비잔틴미술의 형성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산 비탈레San.Vitale교회의 모자이크 배치는 예수와, 제정 일치의 수장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부부의 정치, 종교적 위치를 실감나게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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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산 비탈레 성당 내부의 ‘우주의 지배자 예수’-546-48년경/라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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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우스티니아누스황제와 일행들-546-48년경/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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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데오도라 황후와 일행들-546-48년경/산 비탈레 성당

 역시 온 벽면이 모자이크로 되어있던 비탈레 교회의 후진엔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짧은 머리의 예수가 있고, 제단 양쪽엔 황제부부가 빵과 포도주를 헌납하는 모습으로 새겨져있다. 우선 모두 정면이며 왕관과 두광까지 한 황제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산 비탈레의 후진을 보면 하늘아래 예수가 있고, 그 아래 제단 양쪽에서 예수에게 헌납하는 황제 부부상이 있는 배치에서 우리는 황제이면서 또한 교회의 수장인 제정일치제도의 군주상을 볼 수 있다.

 성상파괴운동의 시련을 겪은 후의 성상은 더욱 성스럽고 교리와 밀접해져야 했다. 다프니에 있는 도르미션 교회의 그림들은 중세 미술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온통 금빛으로 둘러싸인 천장 한 가운데 존엄한 <우주의 지배자>가 무섭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다른 한쪽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새겨져 있는데, 시간과 공간의 묘사가 최대한 배제된 그림이지만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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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우주의 지배자 예수- 1080-1100년경/모자이크/다프니도르미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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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11세기 말/모자이크/다프니도르미션교회

예수의 발에서 떨어지는 피가 해골을 적시고 있는데, 이 해골은 바로 아담의 해골이며, 예수의 피는 아담의 원죄를 씻었다는 교리를 설명하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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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 블라디미르 마돈나-12세기/나무에채색/77.5×53.3cm/모스크바국립역사박물관

 그림 11의 비잔틴 성상을 대표하는 <블라디미르 마돈나>를 보면, 황금색의 넓은 테두리가 우선 그림을 성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검은 바탕에 금장식이 놓인 옷을 입은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데, 이 마리아는 바로 예수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는 마리아인 것이다. 비잔틴 성상은 사실의 설명이 아니라 교리의 전달과 시공을 초월한 성스러움을 지녀야 했던 것이다. 종교성과 서술성을 동시에 지닌 비잔틴 미술은 그리스 정교의 미술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12-13세기, 즉 중세 말의 이탈리아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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