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벌귀족 사회와 음서제도
왕 16년 12월 5품 이상 관리의 아들 에게 음직을 주었다. <고려사절요, 성종> 양반 6품 이상 관리의 자손 중 한 명을 입사 (처옴 벼슬 자리에 나감)하도륵 하였다. <고려사> 선거지 이자겸은 그 족속을 요직에 널리 앉히고, 관작를 팔고, 스스로 국공이 되어 그에 대한 대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였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바치는 믈컨이 넘치게 모여드니, 썩어저 버리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다. <고려사> 이자겸 김돈중이 아우 김돈시와 함께 아버지 김부식이 세운 관란사를 중수하고 왕을 위해 복올 비는 것이라고 소문을 내었다. 왕이 김돈중 등에게 말하기를 ‘듣컨데 경들이 과인올 위해 복올 빈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장차 가저 보겠노라.'하였다. 김돈중 등이 또 절의 북쪽 산은 민둥하여 초목이 없으므로 인근의 백성을 모아 소나무, 잣나무 등과 그 밖의 진귀한 꽃과 기이한 화초를 심고, 단을 쌓아 임금의 방을 만들었는데, 아름다운 색채로 장식하고 대의 섬돌은 모두 괴석을 사용하였다. 하루는 왕이 이 절에 행차하니 김돈중 등이 절의 서쪽 대에 잔치를 떼풀었다. 휘장, 장막과 그릇이 매우 사치스럽고, 음식이 극히 진기하여 왕이 재상 및 가까운 신하들과 더불어 흡족하 게 즐기고, 김돈증, 김돈시에게 백금과 3정과 비단 각 10필, 거란산 실 70근을 하사하였다. <고려사> 김돈증 이자겸은 풍모가 의젓하고 거동이 화평하고 즐거우며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겁게 여겨,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알아서, 이적(오랑캐) 중에서도 능히 왕실을 도울 줄 아는 자니, 역시 어진 신하라 할 만하 다. 그러나,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토지와 제택(살림 집과 정자)을 치장하여 논발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 웠으며, 사방에서 선물이 들어와 썩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는데,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루하게 여겼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태조왕건 및 그 후손들은 오랜 동안 호족 세력때문에 시련을 당해야만 하였고 따라서 왕실은 가능한 한 무력을 가진자를 견제하였으므로 정치는 자연히 과거로 진출한 문신관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문신관료들은 지배세력을 형성하면서 점차 문벌귀족화하였는데 이들은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과전, 공음전등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력을 확보하였으며, 이들 자제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음서에 의해 관직에 나가고 가문을 배경으로 요직으로 승진하였다. 문공인은 아려하고 유순하였으므로 시중 최사추가 사위로 삼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직사관이 되었는데, 가세가 단한하였으나 귀족과 흔인하여 호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비록 이름이 있는 고관이라 할 지라도 반드시 과목(科目:과거)을 거쳐 진출하는 것만은 아니다. 과거이외에도 천거(薦擧:추천제)와 문음(門蔭), 성중애마(成衆愛馬:왕을 가까이 모시는 관직), 잡로(雜職:궁중의 실무를 담당 )를 통한 길이 있어 관리로 진출하는 길 이 하나만은 아니었다. 양반 5품이상의 자손 중 한명을 입사(入仕: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는것)하도록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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