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어느 강제징용자의 증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된 후 다음해 7월에는 국민징용령이 발표되어 대대적인 노동력 동원이 시작되었다. 한국인 징용은 1941년 군요원 관계로의 연행에서부터 다음해 일본내 한국인 노동자의 징발, 1943년 학도징용, 1944년 한국내 주요 공장, 사업장에서의 현원 징용 등 갈수록 확대되었다. 강제 연행된 한국인들은 일제가 패전할 때까지 짐승과도 같은 착취와 학대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 자료는 홋카이도의 스미토모 탄광감옥에 강제연행된 최천수씨의 회고담이다. (……) 기차 안에서도 경찰이나 다코 감방의 두목이 온 줄 알고 몇 번이나 변소로 숨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하코다테에서는 연락선을 탔다. 연락선이 출항하자 마자 남자 3명이 와서 "어디까지 가느냐"라고 물었으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오모리에 도달하자 수갑을 채워 아오모리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어디에서부터 도망쳐 왔는가"라고 물었지만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조선인 통역을 데리고 오자 "나는 말도 글도 모르고, 기차 안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어디에서 도망쳤는지 모른다"라고 말해 주었다. 경관한테 죽도와 채찍으로 사정없이 매를 맞았다. 등의 상처가 낫지 않아 상처에서 진물이 질질 나는 것을 보고 어디에서 생긴 상처냐고 물었다. 도망하다가 삿포로 근처의 노무자 합숙소에서 일할 때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가 떨어져서 생긴 화상이라고 말했다. 거짓말 하기도 힘들었다. 3일동안 매를 맞았다. 그러던 중 주머니 속의 편지를 들켜버렸다. 그러자 그들은 나이강으로 전보를 치고, 나이강에서 데리러 왔으나 나이강에 가면 죽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안 간다고 버티었다. 그러나 별 수 없이 나는 수갑을 차고 밧줄로 묶인 채 연락전에 태워졌다. 하코다테부터는 기차를 타고 갔다. 삿포로를 지나니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에 안절부절하지 못하였다. 변소에 가겠다고 하니까, 신을 벗어놓고 가라고 했다. 변소에 들어가서 안에서 문을 잠그고 창문으로 빠져나가려 하니 창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때 소변을 누어 소변의 온기로 창문을 녹였다. 그리고는 맨발로 창을 뛰어내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 가운데 알몸뚱이로 나둥그러져 있었다. 이시카리천 부근에서 농가가 눈에 띄었다. 한 할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하고, "잠깐 기다려"하더니 퇴비더미의 콩을 많이 가지고 왔다. 쌀가마니에 앉히더니 발을 퇴비 속에 40분 가량 넣어두라고 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발을 갑자기 덥게하면 살갗이 벗겨져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었지만 돈도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랐었다. 그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지붕의 눈을 쓸어 내리는 것으로 일당을 받았다. 그 후 할아버지의 소개로 조선인 노무자 합숙소에 가서 개천의 폭을 넓히는 공사를 했다. 그리고는 농가에서 지하배수로를 팠다. 5윌 21일, 목욕탕에 들어가 있는데 경찰이 왔다. 발가벗은 채로 벽장에 머리만 파묻고 궁둥이는 내놓고 있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비바이탄광으로 끌려갔다. 거기는 전에 있던 노무자 합숙소 보다 더 무섭다는 하라타구미합숙소로서 경찰과 결탁된 곳이었다. 머리에는 이가 우글거리고 등허리의 상처는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거기에서는 조선어를 하면 1끼 식사를 굶어야 했다. 식사라고 해봤자 콩을 쪄서 남경쌀과 섞어 먹는 것이다. 국은 소금국으로 건데기는 하나도 없었다. 갱내에서 목이 마르면 갱내의 붉은 물을 마시고는 설사하기가 다반사였다. 그래도 끌고가서 아침 6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일을 시켰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에도 나이강에서 젊은 아이들이 계속 죽어갈 때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하라타구미에서는 서울에서 온 학문있는 좋은 가문의 자식이 도망치다가 붙잡혀와서 혹독하게 두들겨 맞고 정신이 돌아버렸다. 집단탈주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얼어붙은 하천의 폭을 잘못 보고 빠져 죽은 예가 많았는데 봄이 되면 눈이 녹아 시체가 이시카리천가의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것이 종종 눈에 띄었다. 1943년 6월 오타루에서 치시마로 끌려갔다. 도중에 미군 비행기가 폭격을 했기 때문에 치시마에서 호위 비행기가 왔다. 도착한 곳은 카사발섬. 치시마에서 가장 큰 군용비행장이 있어 비행기를 격납하는 장소를 만드는 공사를 하게 되었다. 수송선 다카지마마루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조선인 천 수백 명, 일본인까지 합쳐서 4천 수백 명이 있는 것 같았다. 격납고는 200여 개나 만들었다. 12윌에 작은 배로 그 섬을 빠져 나왔는데 도중에 잘못하여 소련으로 가기도 하였다. 오타루에 도달하면 정산해 준다고 하였지만 계산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하라타구미에 가서 통사정을 하니 300원을 가족에게 보내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 조선에서는 회답이 없었다. 1944년 8윌에 또 그곳을 도망쳤다. 그후 미쓰이탄광으로 들어가 보통 노무자 합숙소에서 일하고 있으니 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다. 전쟁이 끝났을 때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1주일 동안 술을 마셔댔는데, '앗'하고 정신을 차려 일한 돈을 찾아야겠다고 비바이와 나이강에 가보니 이제 합숙소도 없고 아무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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