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세기 : 장원이 몰락하다.
1. 장원 몰락의 전체적인 배경 14세기 이후 장원제도가 몰락하는 배경을 서유럽 전체 사회 속에서 바라볼까요? 장원제도란 쌍무적 계약관계로 규정되는 봉건제도에서 비롯된 경제체제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다루어온 장원제도란, 봉건제도 밑에서 봉토로 받은 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13세기후반 이후부터 장원이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럼 13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유럽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를 살펴보아야겠죠? 13세기 후반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 끝났다는 점입니다. 11세기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원정은 10세기 이전 항상 아시아에 참패당하던 유럽이 복수혈전을 꿈꾸며 기획한 야침찬 프로젝트였습니다. 교황은 성지탈환과 교황권의 확장을, 기사는 봉토확장을 통한 장원제의 지속을, 상인들은 동방무역을 꿈꾸며 각자의 뜻을 위해 아시아로 떠난 것이지요. 그러나 200년간의 싸움으로 얻은 것은? 유럽사회의 참패 뿐입니다. 유럽은 1차 십자군 원정 외에는 이렇다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아시아 세력에게 밀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만 했죠. 그러나, 봉건 세력은 교황과 기사들은 십자군의 실패로 인한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교황권은 십자군 실패 이후, 유럽 안에서의 교황권 강화만을 추구하였고, 기사들은 동유럽쪽의 영지를 개간하여 장원을 넓히려 하였죠.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군 원정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동방 무역의 루트를 확실히 알게 된 상공계급이었고, 십자군 전쟁 이후 도시가 급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주들이 추구한 새로운 영지 확보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 13세기 후반 이후 기사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영지들은 이미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좋은 개간지는 모두 개간된 상태였죠. 또 엘베강 동쪽의 동유럽 땅마저도 이미 개간이 끝나 버려 십자군에 실패한 유럽 기사들이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영지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유럽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먼저 당시 동유럽으로 인식되던 동부 독일 쪽으로 식민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자, 유럽 내부에서의 상공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은 자체 무역권이 붕괴되는 현상을 맞이합니다. 영국의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물과 프랑스의 상파뉴 무역권은 백년전쟁의 여파로 몰락하였습니다. 이것은 이탈리아 대은행들의 파산으로 이어졌고, 이들과 거래하던 영주들도 몰락하게 됩니다. 영주들은 금전적인 문제가 심각해지자 농노들에게 재산을 기부받고 농노를 해방시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서유럽에서 농노가 해방되고 장원이 해체되는 첫단계였습니다. 2. 식민지가 없는데다가 병까지 돌기 시작하다. 14-15세기에 새로 개간된 동유럽의 식민지들, 즉 동유럽의 개간지들은 서유럽과는 달리 아주 자유로운 농업지역이었습니다. 동유럽의 개간지들은 아시아와 무역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여건도 확보된 지역이었습니다. 또 14세기 이후 중세 도시 경제는 플랑드르, 상퍄뉴 지역의 몰락으로 침체되었지만, 도시는 원거리 무역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무역이 성행하였으니까요. 동방무역으로 등장한 거상들은 장원이 아닌 도시경제를 이끌어가려고 하였습니다. 일부 영주들은 동방무역을 하는 상인들을 후원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영주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에는 몰락하는 영주와 갑부가 된 영주들이 공존하는 시기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영주가 부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장원이 잘 되지는 않습니다. 영주들이 부자가 되고 사치품이나, 수입품을 계속 열망할수록 장원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고혈을 계속 원했으니까요. 농노들은 다른 지역의 농노들이 해방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부유한 영주 밑에 있던 농민들이 더욱 많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더 큰 문제는 14세기부터 유행한 전쟁과 전염병이었습니다. 특히 흑사병은 유럽 전체 인구의 30%이상을 죽음으로 몰았으며, 백년전쟁은 서유럽 전체의 경제구조를 파탄으로 몰아갔습니다. 일부 부유한 영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영주들은 수입이 줄었습니다. 농촌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심각한 수준까지 진행되었고, 농업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합니다. 일부 영주들은 이러한 현상 속에서 농노해방으로 자금을 확보하려던 정책을 포기하고 농노들의 부역을 강화하면서, 농노들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농민들은 병과 전쟁과 가혹한 세금 때문에 더욱 많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장원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영주들은 어떻게 대응하려 했는가? 14세기 이후, 위축된 유럽의 경제 속에서 영주들은 제각기 살기 위한 방법을 다양하게 전개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영주들은 새로운 사회에 대처하기 위해 장원제의 시스템을 바꾸려고 합니다. 이것은 곧 <노동지대의 소멸>을 통한 <부역의 금납화>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영주들이 장원제가 흔들리자 대응한 방식을 한번 볼까요? 1. 부역제를 소멸시키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부역제도를 <생산물 지대>로 받는 것입니다. 즉, 죽으라고 내 땅에서 일해! -- 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일은 니 맘대로 하고, 대신 생산물의 1/3만 바쳐!>로 바뀌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생산물 지대로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돈으로 받는 <금납화>가 이루어집니다. 금납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일정 조세만 내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가지는 것으므로, 장원이 무너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납화를 하지 않고 많은 <생산물 지대>를 받거나, 노동을 통한 부역을 강요하는 경우에는 훗날 농민들에 의해 어마어마한 저항을 받게 됩니다. 영국은 금납화가 쉽게 이루어지고, 농노해방이 순조로왔습니다. 특히 와트타일러의 난 이후 봉건적 공납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농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훗날 큰 혁명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봉건적 공납을 받으며, 생산물 지대를 계속 올려받으려고 했던 프랑스에서는 농민들의 큰 저항을 받게 됩니다. 이 봉건적 공납이 곧 프랑스 혁명기의 <구제도의 모순>에 포함된 것으로, 프랑스 혁명에서는 이 <봉건적 공납의 유상폐지, 무상폐지>라는 항목이 혁명의 필수 내용으로 포함됩니다. 독일 및 러시아, 기타 동유럽 국가들은 아예 생산물 지대를 강화하였는데, 16세기 이후 영주가 대농장을 경영하면서 더욱 가혹한 농노제도를 확립시킵니다. 이 동유럽의 대농장은 농노를 통하여 시장생산을 하고, 상품성 있는 작물을 생산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러한 대농장을 초기 장원(고전 장원)과 구분하여 신 장원(구쯔헤르샤프트)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동유럽은 19세기까지 농노제가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러시아는 19세기 알렉산드르 2세가 크림전쟁을 할 때까지도 농노제가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2. 농노제도를 소멸시키다. 서유럽의 영주들은 장원 몰락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농노를 해방시키기 시작합니다. 농노해방이란, 영주가 농노에게 일정한 자금을 받고 농노를 풀어주어 도시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농노에게 노동 부역을 면제해주고, 일정한 세금을 받는 <금납화>도 농노해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을 동유럽과 서유럽으로 나누는 기준이 엘베강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여러차례 강조하였습니다. 엘베강 서쪽의 서유럽인 영국 부근에서는 이 금납화가 잘 이루어져서 농노가 해방되었고, 시민사회로 빨리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빠른 이유중의 하나로 금납화가 빠르고 농노제가 빨리 사라지면서 산업사회의 일꾼으로 뛸 수 있는 많은 노동력을 확보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농노제에 기반한 장원보다는, 인클로저 운동에 기반한 모직물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농노해방이 빠르다는 점과 연결시킬 수 있겠네요. (반면, 초기 인클로저 운동 및 모직물 산업의 발달과 같은 산업적 발전이 농노해방을 촉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동유럽은 농노해방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13세기 이후 개간된 땅들은 많은데, 농사지을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유럽에서는 자유로운 농민들을 점차 예속하여 <농노제를 오히려 강화>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또 동유럽은 서유럽과 같은 도시문화가 없던 개척 식민지였기 때문에, 대토지 소유자(융커)의 입김이 상당히 강하였습니다. 동유럽과 러시아의 농노제도는 상당히 견고하면서도 오래갑니다. 3. 직영지가 소멸되다. 장원이 흔들리자 영주들은 자신들의 땅을 직접 농사짓기 보다는 농업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면서 경작하게 하는 방식을 택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영국지역을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영주직영지가 사라지면서, 월급 경영자 또는 임금을 받는 소작자가 등장하였습니다. 영주들이 아예 돈을 받고 영지를 판 다음 도시로 가서 도시 귀족이 되어 버리는 현상도 등장합니다. 이 당시에는 정기소작제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영주직영지의 일부를 일정 기한 동안 임대한 뒤, 생산량의 일부 또는 일정 계약량을 지대로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농노들이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여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농노해방이 더욱 촉진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유럽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개간된 토지가 넓어서 이러한 소작제보다는 영주가 직접 농노를 구속하고 지배하는 대농장(구쯔헤르샤프트>가 유행합니다. 4. 농민들은 반란으로 저항하다. 14세기 서유럽의 농민반란의 가장 큰 원인은? 답은 물론 봉건적 부담의 가중이겠죠. 하지만, 봉건적 부담이 가중된 이유는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실제 농민들에게 부담이 가중된 이유는 전술한 사회경제적 구조 자체가 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표적인 농민반란은 프랑스 지역에서 일어난 자크리의 난입니다. 자크리는 사람이름도 아니고, 지역이름도 아닙니다. 실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난 곳인 프랑스 보페지 지역이지요. 그럼 <자크리>는 뭘까요? 자크리는 프랑스 농민들이 입었던 바지를 말합니다. 즉, 리바이스나 니코보코처럼 상표라고 보면 되죠. 프랑스 농민들은 일을 하기 쉬우면서도 값싸게 입을 수 있는 바지를 원했는데, 그것은 요즘 입는 끝이 말려올라간 바지였습니다. 이 반란이 자크리의 난인 것은 그 명칭에서 농민반란이라는 상징성이 있지요. 자크리의 난은 프랑스 사회가 백년전쟁으로 황폐해지고, 흑사병이 돌아 인구가 감소했는데도 영주들이 오히려 봉건지대 올려받으면서 일어난 난입니다. 이 난의 특징은 이 후 설명할 에티엔느 마르셀의 도시 반란과도 연결되면서 전체 프랑스 사회의 모순점을 하나 하나 꼬집어 가면서 일어납니다. 어찌보면 프랑스 제도의 모순에 대한 최초의 심각한 성찰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영국에서는 와트타일러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이 난 역시 원인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영주들의 미비한 대처 때문입니다. 영국에서도 흑사병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임금은 팍팍 인상되고 있었는데, 영주들이 <금납화>를 하지 않고 <부역이나 생산물 지대>를 통해 장원을 부활하려 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 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인두세 때문입니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 필요한 돈을 농민들의 머릿숫자에서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또, 노동조례라는 것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법적으로 막아 버렸죠. 농민들은 점점 성장하고 있는데, 국가가 농민의 성장을 공식적으로 막아 버린 것입니다. 결국 농민들은 반봉건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와트타일러의 난도, 도시와 연결됩니다. 와트타일러의 난 때에는 종교개혁가인 위클리프의 지지자인 롤라드파가 대거 가담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와트타일러의 난도 반봉건 운동이자, 도시 빈민층이 포함된 반교회 운동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당시 와트타일러의 지지자들은 봉건제를 지지하는 교황세력을 부정하면서 <초기 크리스트교의 평등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이 쯤 되면 종교개혁적 분위기도 물씬 나지 않나요? 16세기에도 농민반란은 있었습니다. 특히 16세기 이후의 농민반란은 농노제가 계속되고 있었던 동부유럽, 즉 독일 지역이었죠. 유명한 종교전쟁인 30년 전쟁 때에서 농민들은 종교적인 자유라기보다 봉건사회의 구조를 부정하는 교회세력이 자기편이라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가인 루터같은 사람은 <농민 전쟁은 종교적 신앙이 없는 가난한 빈민과 농민의 투정>이라면서 부정하기도 했지만 말이죠. 그러나, 이러한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기에 중세 사회의 기반인 장원은 점차 무너져가고, 새로운 사회로 서유럽이 변하게 됩니다. 여기까지해서 중세 농촌의 장원 몰락을 간략히 마치고, 다음장에서는 중세 도시의 변화라는 파트를 다루어 보도록 하죠. 2007 비보이 배틀이랑, 국가대표 축구 평가전(네덜란드전)을 보면서 글을 썼더니, 글이 두서 없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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