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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근현대사 13장) 동학농민운동 3 - 동학농민들의 2차 봉기

동학농민운동 3 - 동학농민들의 2차 봉기

1. 1차 농민전쟁의 결과

자, 이제 농민들의 1차 봉기는 끝났습니다. 농민들은 <집강소>를 구성하여, 스스로 자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정부도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개혁을 약속하였습니다. 정부가 개혁을 위해 마련한 기구가 바로 <교정청>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은근히 헷갈려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1894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중 어느 것이 먼저냐고 물어보면 다들 고민을 하더군요.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답이 없으니까요.

동학농민운동은 1, 2차로 나눠야만 다른 사건들과의 개연성이 생깁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부분을 나누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탐관오리 숙청, 부당한 조세제도 혁파, 토지개혁 등을 주장한 1차 동학 농민운동은 1894년 3월부터 5월까지입니다. 1차 동학운동은 전주화약을 맺으면서 정부와 농민들의 화해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과 일본은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적은 동학농민운동 때문이 아니라 <조선의 실질적 주도권>을 누가 가지는가 였으니까요.

특히 일본은 그동안 청과 나누어 왔던 한반도의 정치, 경제적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속셈이었지요. 일본은 서울과 부산까지 연결하는 전기선을 가설하면서 전쟁에 대비하였고, 1894년 6월 경복궁을 무력으로 장악합니다.

일본이 경복궁을 장악하고 요구한 것은 조-청간 경제 무역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요구는 <조청상민무역장정>의 폐기였지요. 일본은 또 우리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꾸며 아산만에서 청의 함대를 기습하여 청군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이 때 죽은 청나라 군사만 1200에 달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경북궁을 장악한 채로 조선에 개혁을 요구합니다.(갑오개혁) 189년 6월 23일 조선에 주둔하던 청일군이 전면전을 하였는데, 일본군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때부터 1895년까지 청일전쟁이 조선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청일전쟁은 조선정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전쟁이었지만, 농민에게는 더욱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겨우 자유를 얻고, 농민의 힘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분위기를 일본이 망쳐놓은 것이지요.

갑오개혁도 처음에는 교정청에서 농민의견을 많이 반영하면서 진행되는 듯 하였지만, 교정청이 사라지고 일본이 개화파를 앞세워 군국기무처를 신설하면서 일본의 의견이 더 많이 들어가는 개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본군은 전쟁을 이유로 우리 농민들에게 식량을 징발하고, 헐값에 조선인들을 인부로 채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농민들의 분노는 이제 탐관오리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죠. 동학농민의 2차 봉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2. 1차, 2차 동학농민운동 사이의 7월 - 내정 개혁이 강요되다!

일본은 1차 동학농민운동이 끝날 무렵, 청과 전쟁을 하면서도 조선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죠. 한번 일본의 속셈을 분석해 볼까요?

1. 전주 화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명분도 없었고, 청과 전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청일전쟁을 장기화하면서도 조선에 머물 수 있는 최선책이었습니다.

2. 조선에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서, 훗날 청,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우선적으로 침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필요한 것은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였으니까요.

3. 조선의 개혁을 방해하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청군을 조선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개혁의지를 청이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전주화약 후 일본군은 바로 서울에 침입하면서 <청>에게 청일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이 보기에 일본의 속셈이 뻔하였으므로 이것을 거절하였죠.

일본공사는 바로 조선 정부에게 내정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개혁을 강요합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군이 선철수 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1,2차 회담을 열어 이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하였습니다. 이 때 개혁기구로 창설된 것이 바로 <교정청>이지요. 우리는 3차 회담을 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 개혁을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당황한 일본은 경복궁에 무단침입을 한 뒤, 민씨 세력을 궁 밖으로 강제 추방하고 흥선대원군을 표면에 내세워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물론 흥선대원군은 허수아비였고, 개혁의 주체는 일본이 내세운 김홍집, 김윤식 등 개화파였죠. 이렇게 실시한 개혁이 바로 갑오개혁입니다.

3. 농민들은 다시 일어나다!

1차 동학농민봉기 이후, 일본의 힘이 세지자 농민들은 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본이 조선 농민의 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농민들은 다시 일어납니다. 2차 동학농민봉기는 일본을 추방하기 위한 반외세 운동이었습니다. 그럼 자세한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이 땅의 살아있는 동포에게 포고한다. 우리는 왜놈을 이 땅에서 축멸(逐滅)코자 다시 기포한다! 관 민을 불문하고 우리의 창의에 합세하는 것은 충의(忠義)요 이반하는 것은 반역(反逆)이다. 충의지사(忠義之士)는 모두 삼례역으로 모여라.

- 2차 동학농민운동 출정문 -

일구(日寇)가 구실을 만들어 병사를 움직여 우리 임금님을 핍박하고 우리 국민을 어지럽게 함을 어찌 그대로 참을 수 있단 말이오.…지금 조정의 대신은 망녕되고 구차하게 생명을 유지하며, 위로는 군부를 위협하고 밑으로는 국민을 속여 왜놈, 오랑캐와 연결하여 삼남의 국민에게 원한을 사며, 망녕되게 군대를 움직여 백성을 해하려 하니 참으로 그 무슨 뜻이오.    

- 전봉준 격문(1894. 10) -

묵은밥은 새밥에 섞지 마소서.

묵은 음식은 반드시 끓여 드소서.

침을 뱉지말며, 뱉거던 반드시 땅에 묻으소서.

노변에서 대변을 보았으면 파묻고 가소서.

물을 끓여 먹고 구정물은 아무데나 버리지 마소서.

집안과 내몸을 하루에 두번씩 청결히 닦으소서.

그리고 춘추로 이회씩 정기적으로 사십구일기도를 하소서.

- 2차 동학농민운동 최시형의 통유 -

위 사료를 보세요. 2차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은 전봉준이 전라도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시작되었습니다. 전봉준은 동도창의소란 이름으로 조선민들의 거병을 촉구하였고,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해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남접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1차 때부터 전국적 무력봉기를 자제할 것을 주장하였던 교주 최시형 등의 북접 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추구합니다. 최시형도 통유문을 발표하고 가세하였죠.

경주황오리에 고아로 태어나 가사여의치 않아 배움도 얻지못하고

이집저집 머슴살이 영일군오덕동 제지소에서 종이를 떴다

마북동검등꼴 화전민되어 신유년 서른다섯살 수운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늘님소리 듣고파서 가진고행 마다하지 않았다

허나나는 들을수 없었다

하늘님의 소리를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하늘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옳다 사람의 소리 곧 하늘의 소리구나

그때부터 천지가 열렸다 나는 쉬지않고 일했다

자나깨나 도인들의 고통을 나누며 죽도록 일했다

평생토록 보따리하나 걸머지고 조선팔도 도바리 아니 도망다닌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 최보따리 그 보따리엔 하늘님이 계셨다

이제 나는 그 보따리를 불사르고자 한다

개같은 왜적놈 총부리앞에 불사르고자 한다

이게 나의 천명이요 이게 너의 천명이다

나 너에게 이르노니 나는 이제 가노라

천명을 다하고 허나 나는 말한다

너는 너는 높이 날으고 멀리 뛰어라

너는 너는 높이 날으고 멀리 뛰어라

- 최시형의 기포 명령문 -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할 정도로 군사력이 막강한 일본군에게 열악한 무기를 가진 농민군은 점차 밀리게 되었습니다. 전략적 요충지인 전주와 논산을 빼았기고, 금구, 태인 전투 등에서도 전봉준 군은 일본군에게 밀렸습니다.(우금치 전투, 태인전투) 또 농민들의 봉기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는 것이라 생각한 양반들이 농민군에게 저항함으로서 산발적인 농민군의 봉기(기포)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잡혀 죽고 말았죠.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가할진대 어찌 컴컴한 적굴속에서 암연히 죽이는가?

때가 오니 하늘과 땅이 다 힘을 합치는데 운이 가니 영웅이라도 어찌해볼 도리없다

나라위한 붉은 마음 그 누가 알리 교수대에서 헛되이 외로운 넋이 되려는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에 대한 탄식 -

새야새야 녹두새야

웃녁새야 아랫녁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함박쪽박 열나무딱딱

-녹두장군에 대한 노래 -

법무아문(法務衙門) 대신(大臣) 서광범(徐光範)과 전봉준의 독대

  공초사료(供草史料)중에서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자는 누구냐?

전: 명숙은 나의 자(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전: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난을 일으켰으냐?

전: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서: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전: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전: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서: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전: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서: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전: 삼년전이다.

서: 왜 입당하였는냐?

전: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전: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전: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전: 면식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전라일도 도집강(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친척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전: 그는 본시 부랑자로 홀왕홀래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서: 동학에 남접 북접이 있다는데 그 구별은 무엇이뇨?

전: 그것은 호남과 호서의 지역적 구별일뿐 동학이 두개인 것은 아니다. 동학은 삼십년전 경주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시작하였고 동학의 모든 접주는 최법헌(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최법헌이 팔도(八道)의 접주의 직책을 총괄한다.

서: 최법헌이 누구인가?

전: 해월 최시형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기포의 허락을 최법헌으로부터 받았는가?

전: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서: 최법헌을 언제 처음 만났는가?

전: 작년 춘삼월 보은 장내리에서였다.

서: 그때 그대는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전: 나는 그 대집회에 참석한 전라도 도인들의 식량을 운반하는 운량도감의 책임을 맡았으며 또 금구 원평집회를 주도했다.

여기서 어이없는 것은 일본군이 외국 혁명군인 농민군을 학살한 것에도 모자라, 양반층들은 전쟁에 진 농민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을 학살하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부터 일본군과 기득권을 가진 양반부호들의 연합은 시작되었고, 이것이 일본군의 전략상 정책으로 채택되면서 훗날 <식민지 지주제>라는 형식의 민족분열정책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음 마지막장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의 문제, 동학이 주체인가, 농민이 주체인가에 대한 주체 문제, 동학이 추구한 이상향이 근대화인가에 대한 논쟁들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찬/반의 의견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동학의 의의와 폐정개혁안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겠습니다. 짧게 하려고 했음에도, 동학에 대한 내용이 4번의 글로 이어져 버리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