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격문
평서대원수가 급히 격문을 띄워 알리니라. 무릇 관서 지방은 단군 조선의 단정이었고, 양난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난 자랑스러운 곳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땅을 천시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현재의 국왕은 나이가 어려 외척 권신의 농단으로 정치가 어지럽고 인민은 도탄에 빠져 헤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 홍경래의 격문 중 - |
사료분석 : 1811년 12월 22일에 선포된 반란군의 격문을 보면, 지방적 차별대우를 반대하는 평안도 몰락양반·토호들의 요구가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안동김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민의 생활에 끼친 폐단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으며, 조선왕조 멸망의 불가피성과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격문을 보면 농민들의 절실한 문제인 토지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신분제도를 반대하는 사상도 철저하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적극 유도하거나 농민전쟁에 가담한 농민층의 투쟁열기를 북돋아주지 못했는데, 이는 반란군이 쉽게 무너진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외에도 반란군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토호와 상인들이 반란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곧 배반한 사실과, 반란군이 속전속결을 못하고 중간에 4일이나 지체하여 관군으로 하여금 전열을 정비하게 하는 등의 전략상 오류를 범한 것이 난이 실패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홍경래의 난은 실패했지만 세도정권의 부패와 무능성을 폭로했으며, 일반민들에게 조세거부나 무력항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함으로써 조선 중세사회의 해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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