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사치의 사화
王莽(왕방) 지황년간(地皇年間) 서기 20~23년에 염사치가 진한우거수(右邊渠帥)로 있을 때 낙랑의 토지가 기름지고 인민이 다 잘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투항(歸化)하려 하여 자기의 읍락(邑落)을 탈출(脫出), 순망중(巡亡中), 밭 가운데 새(雀)를 쫓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용어가 한인과 다르므로 이유(理由)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되, "우리는 본래 한인인데, 나의 이름은 호래(戶來)라 한다. 우리들 1천5백인이 재목을 벌채하다가 한인에게 잡히어 머리를 깍고 종(奴隸)이 된지 3년이 된다" 라고 하였다. '치( - 위략 - |
사료해석 : 염사치는 진한의 족장입니다. 이 사료는 진한의 족장이 낙랑의 의책을 받으로 가다가 중국인을 구조하여 관택과 전택을 하사 받았다는 내용과 관련있습니다. 즉 한인들은 목재를 갈망하엿음을 알수 있으며, 한거수들은 한군현에서 관직을 누르기를 회망하고 있다는 내용이죠. 이 사료의 핵심적 내용은 결국 <한의 분열정책이 성공>하여 예족(부여족), 한족(3한족)들이 중국 한나라의 의도에 넘어갔다는 걸 보여주는 사료이죠. 그러나 맥족(고구려족)은 이 분열책에 넘어가지 않고 저항의식이 많았다고 하는데, 다른 사료에서는 고구려가 <책구루>를 쌓고, 중국의 조복과 의책을 거부하였다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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