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고등학교 과정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역사의 분야가 아니라 고고학적 분야라 학계의 유행에 맞춰나가지 못하는 면도 없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제가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여러 자료들을 통해 만들고 있음으로 교과서에 큰 개편이 가하지지 않는 이상 특별이 틀린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근현대사 정리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약 제가 서술한 것과 다른 필자분들이 서술한 것이 서로 다르다면, 다른 필자분의 서술을 우선순위로 쳐주시기 바랍니다. 시험볼 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대학 이상에서 '제대로된 공부'로 말하자면, 상식 수준에 머무르는 것들이거나 혹은 전혀 판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역사 인식
역사는 그 사실을 인식하는데,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또 하나는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말 그대로 역사 자체를 객관적인 사실로 인식한다. 즉, 역사 서술에 있어, 그것을 기록하는 역사학자는 자의적인 해석 등을 함부로 곁들여선 안되며, 역사는 현재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근대 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랑케에 의해 제창되었다. 여담이지만, ‘근대’라는 것은 ‘과학적, 객관적, 이성적’인 사고와 또 그러한 행동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그들은 그렇게 주장하였다.).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오랫동안 내려온 역사 해석의 방식으로, 현재까지 있었던 사실 중에 역사적 가치 있고, 후세에 교훈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 역사가가 선별하여 기록하고,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현재 교육과정에서의 역사도 이러한 견해를 차용하고 있다. 이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대표되는 견해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장점이 있는 관점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느 정도 역사왜곡을 용인한다는데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Tip.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 역사의 예
나는 오늘 밥을 먹었다. -> 사실로서의 역사
나는 오늘 맛있는 밥을 먹었다 -> 기록으로서의 역사
정보와 통신의 발달은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사실 기록
2) 인류의 출현과 구석기 시대
원인(猿人) 화석의 발견은 진화론의 근거로써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선 최초의 인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남방의 원숭이’라는 이름에서처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아프리카 최남단 쪽에서 발견되었다. 약 300만 ~ 150만 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며, 최초로 직립 보행을 하였다. 자갈돌 석기를 사용하였다곤 하지만, 그다지 크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직립한 인간’이라는 호모 에렉투스는 하이델베르크, 자바, 난티엔, 베이징에서 각각 발견되어 그 지명이 붙여졌다(하이델베르크인, 자바인, 난티엔 인, 베이징 인). 이를 통해 그들은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활동범위를 넓혔으며, 불과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구가 발달하여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구석기 시대의 특혜를 받기 시작한 것도 이들부터이다. 이때부터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즉 한반도의 구석기 지도는 일본이나 중국과 연결되어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네안데르탈 인’이라고 불린다. 그런 만큼, 구석기 시대의 문화를 굳혀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들은 양날면 석기와 같은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었으며, 종교 관념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였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크로마뇽인’, ‘그리말디인’, ‘산둥인’도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4 ~ 3만년 전에 등장하였으며, 발달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도구가 다양해졌다. 사냥을 위해 잔석기와, 이음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린 동굴 벽화(쇼베, 알타미라, 라스코 동굴 벽화)와, 풍만한 여인상(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조각하여 사냥감의 번성과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나타냐고 있다.
3) 중석기 시대
당연히 세계사 교과서에선 다룬 바가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국사 교과서에선 우리나라의 중석기 시대에 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그 이유를 증명할 고고학적 사료가 빈약하기 때문인데, EBS 수능 특강 같은 경우, 국사에서도 중석기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정리하도록 하자.(마침 내용도 많이 없다.)
중석기는 구석기와 신석기 사이의 기간을 뜻한다. 약 1만 년 전 빙하기에서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날씨가 따뜻해짐에 따라, 큰 동물이 사라지고 몸집이 작은 동물이나 어류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석기를 만들 게 되는데 그것이 잔석기와 잔석기를 활용하기 위한 이음도구이다. 돌창, 돌화살, 슴베찌르게 등이 이에 속한다. 국사 교과서에선 주먹도끼와 슴베찌르게가 같은 크기인 양 사진에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둘의 크기는 상이하며, 주먹도끼가 훨씬 크다. 슴베찌르게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때 이후로는 한반도와 중국, 일본이 바다로 인해 분리 된다
4) 신석기 시대
기원전 8000년 경에 일어난 변화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것이다. 농경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였고, 이를 ‘신석기 혁명’ 혹은 ‘농업 혁명’이라고 하며, A. 토플러는 이를 ‘제 1 물결(The First Wave)'라고 하였다. 농경의 시작으로 인해, 인류의 생활양상도 많이 변화하였다. 구석기 시대의 이동, 채집 사회였던 것에서 정착, 농경 사회로 바뀐 것이다. 이들은 간석기를 이용하여 농작물을 수확하였으며, 수확한 농작물들은 토기에 보관하였다. 또한, 농경이 가능하기 위해 강변 등지와 바다에 살면서 이음도구를 통해 사냥과 어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가락바퀴나 뼈바늘을 통해 의복이나 그물을 제작하였으며, 움집에 살았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씨족으로 된 부족 사회로, 족외혼을 하였으나, 아직은 평등한 사회 계층을 유지(* 주의)하였다. 애니미즘, 영혼, 거석, 조상 숭배나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의 종교의식도 이 때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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