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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쌍화점 속의 고려왕들 - 개혁가인가, 변태들인가?

1. 영화 쌍화점?

유하 감독이 만든 쌍화점이 극장가에서 화제라고 한다. 19세 이상 볼 수 있는 작품인데,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란다. 개인적으로는 유하 감독의 작품은 머리 아파서 잘 보지 않는다. 예전에 전직 대통령과 한국 정치 상황을 <무림>이라는 코드로 때려맞춰 만든,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집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이디어는 기발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박정희가 무림최고수, 무림인들이 먹는 금단의 술 <에이주 AIZu>, 5.18을 풍자한 듯한 무림의 난?.... 뭐 그 정도 껴 맞추기 수준?

압구정동이나 말죽거리 잔혹사같은 영화에서 뭔가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의도보다는 이슈가 앞선 감독이었다. 쌍화점에서도 동성애 코드에 뭔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는데, 일단 보고 와서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해야 하니 볼 수 밖에 없다. 결국 다 보게 되는 건가?

영화 쌍화점이 히트 상품이라니까, 쌍화점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적어보야겠다. 고려의 왕들이 과연 동성애자인가?

2. 무신보다는 몽골쪽을 택했던 원종

영화 쌍화점은 어느 왕의 이야기인지 밝히지 않고, 그냥 그랬다라는 여운을 남기는 포스트모던 코드를 지향한다. 왜냐면, 역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 코드와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스토리를 꾸미기 위한 배경으로 역사를 차용한 것 뿐이니까...

그럼 실제 역사에서의 쌍화점은 어떤 분위기에서 만들어졌을까?

<쌍화점>이라는 고려 가요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최초로 <충>자 항렬을 사용한 <충렬왕>부터이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몽골에 저항하던 최후의 세력인 삼별초가 완전 타도된 직후, 왕이 되었다.

충렬왕의 아버지 원종은 몽골에 항전한 <무신정권>을 뿌리뽑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쪽에 협조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1264년 몽골에 가서 몽골왕의 신임을 얻음으로서 고려가 망하는 것만큼은 방지하려고 했는데, 사실 국내 무신들들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무신 임연을 시켜 실세인 무신정권의 김준을 죽여 버렸고, 다시 임연을 죽이려다가 왕에서 쫒겨났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몽골의 원조를 위해 원종은 동녕부(서경을 비롯한 서북부 영토)를 몽골에 바치기도 하였다.

몽골과 마지막으로 항전을 준비한 임연과 무신들은 결국 원종과 몽골(원)의 연합부대에 밀려, 결사항전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삼별초의 최후 항쟁>이다.

   삼별초가 탐라(제주도)에서 모두 제거당하자, 몽골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일본 원정을 위한 비용을 고려에 전가하기 위해 정동행성이란 임시기구를 만들고, 고려의 부녀자들을 몽골에 보내기 위해 결혼도감을 만든 것이다. 고려의 풍속은 문란해졌고, 부모들은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린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기 시작한다. 

   원종이 삼별초를 제거한 직후 죽자, 그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아예 몽골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충>자를 붙여 <충렬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충>자 돌림의 왕들...

왕이 된 충렬왕은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다. 왕비는 몽골 쿠빌라이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였다. 신하들 역시 친원파들이 대세였다.

그나마 고려가 망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인 <원종> 덕분이었다. 몽골은 1대 징기스칸 - 2대 오고타이에 이어 다시 칸을 뽑아야 했는데, 고려 원종은 후계구도에서 멀었던 비주류 왕족 쿠빌라이를 적극 밀어주었고, 쿠빌라이는 고려의 도움을 받아 <원 제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원종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고려는 망하지 않았지만, 충렬왕은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다. <종>을 붙이던 왕호는 <충>자가 붙은 <왕>으로 격하되었다.

황제국의 예법은 부마국(사위국)인 고려에 적용되었다. 태자는 몽골이, 세자는 고려가 사용하였다. 왕을 칭하는 <짐>은 몽골이, <고>는 고려가 사용했다. <폐하>는 몽골이, <전하>는 고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나마 충렬왕은 원종이 실시했던 <전민변정도감> 사업 등 토지개혁을 하면서 친원파에게 소극적으로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 조그만 반항만으로도 친원파들에게 크게 찍히고 말았다. 충렬왕의 유일한 보호막인 몽골 부인이 죽자 마자, 충렬왕은 바로 폐위당한다.

충렬왕 24년....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자, 충렬왕의 아들이 <살아있는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니, 이 사람이 유명한 <충선왕>이다.

그런데, 충선왕은 충렬왕보다 더 친원파들을 미워했다. 충선왕의 부인은 쿠빌라이의 황태자인 친킴 가문의 공주였다. 충선왕은 대놓고 몽골 공주를 구박하였다.

여기서 쌍화점의 줄거리로 알려진 <바람피우는>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시작된다. 충선왕은 부인을 구박하기 위해 보란 듯이 바람을 피워 5명의 첩과 비를 두었다. 특히, 몽골의 천한 여자인 <의비> 등과 바람을 피워 몽골 공주를 자극하였다.

실제로, 27대 충숙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의비가 낳은 아들이다. 거기에 친원파들이 아닌 신진 유학 세력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개혁조서>를 발표해 버린다. 그 개혁조서는 친원파들의 불법점유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 아버지 충렬왕은 다시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들에게 여자를 붙여주거나, 바람 피는 것을 묵인하였고, 심지어 며느리인 몽골 공주에게 이혼과 재가까지 권유하였다. 몽골 공주는 충선왕에 맞서 계속 맞바람을 피웠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고갔다.

결국, 원나라 왕실은, 충선왕을 단 4개월만에 다시 짜르고, 충렬왕을 왕으로 재즉위 시켰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마저도 적으로 돌린 충렬왕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4. 아들의 개혁정치를 뒤로 하고...

충렬왕 본인도 개혁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 충렬왕도 초기에는 능력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친원파를 숙청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원나라에게 패한 치욕을 갚기 위해 영토 수복도 원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개혁정치를 무산시키고 다시 왕이 된 이후,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충렬왕은 불교도였던 제국대장공주가 살아있을 때에는 눈치보며 바람을 피웠지만, 이젠 눈치볼 사람이 없어졌다. <쌍화점>이라는 속요가 원래 민간 속요였는지는 모르지만, 늙고 할 일 없는 국왕이 즐기기에는 딱 좋은 뮤직컬이었다.

쌍화잠이 처음 궁중에 들어온 것은 충렬왕 5년부터였고, 충렬왕은 이 공연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연을 궁궐내에서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극적인 공연을 찾았고, 왕위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후에는 거의 공연에 미쳐산 듯 하다.

일설에는 충렬왕의 신하인 <오잠>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쌍화점을 뮤직컬로 개편하여 공연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오잠이 누구일까?

대표적인 <친원파>였다. 그는 고려라는 나라를 원나라에 바치자고 말한 <입성운동파>였다. 입성운동이란, 몽고의 행정단위인 <성>으로 편입하자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자는 것과 같다.

이 입성운동은 공민왕 직전까지 집요하게 진행된 운동이었다. 친원파 입장에서는 까질한 고려왕에게 아부하는 것보다는, 몽골 부족에 편입되는 것이 더 빠른 출세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입성책동운동은 <원나라>가 거부하였다. 우리가 나라를 미국에게 넘기자는데, 부시가 거부했다고나 할까? 이유는, 명분과 실리 때문이었다.

고려를 원왕조로 편입한다면, 삼별초의 40년 항쟁을 책임져야 했고, 끔찍한 내란이 일어날 경우 뒷감당도 해야 했다. 또, 고려를 자주국으로 둔다는 것은 고려에 은혜를 입은 쿠빌라이칸의 유언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원 입장에서는 고려를 편입해서 제국화하려는 시기가 아니라, 점령한 중국인들에게 신경써야할 시기였다. 이 입성운동을 행했던 일파는 훗날 공민왕이 시시비비를 따져 척살해 버린다.

아무튼, 친원파 오잠은 쌍화점을 국립 뮤직컬로 만들어 버리곤, 왕의 총애를 받으려 노력하였다.

5. 쌍화점은 변태적인 궁정 공연일까?

쌍화점에 쌍화병을 사러 갔더니 / 회회아비(몽고인, 혹은 아랍인)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에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번지면(소문나면) / 조그만 어린 광대(심부름하는 아이)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 / 그 절 사주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번지면 / 조그만 어린 상좌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두레박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 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우물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두레박아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 그 집의 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바가지야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쌍화점은 궁중악 대본이었고, 실제 공연은 기생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자배우들이 노래, 춤, 미모 등을 뽑내며 남장을 하고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으로 단순히 <동성애 코드>가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왜냐면, 유목국가인 몽골에서 바지를 입는 것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풍이 몽골에 유행했듯이, 몽골 양식이 고려에 유행하였다.

   남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곧 변태적 취미라고 몰아붙이기에도 이상하고, 일상적인 동성애 코드라고 보기에도 좀 그렇다. 몽골인들도, 그들과 다른 고려의 사냥술 등을 새로운 문화인 양 받아갔기 때문이다.

쌍화점은 궁중악으로 연출되기 위해 대화식으로 구성되었다. 한명이 <만두 사러 갔더니 내 손목 잡더라>라고 말하면, 다른 한 명이 <나도 가고 싶어..> 하는 식으로 되받고, 후렴구를 같이 노래하는 형식이다.

원래 이 노래가 민중 속요에서 비릇된다고 볼 때는, 왕궁은 우물, 왕은 용 등으로 풍자해서 혼란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짓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의 지배 속에서 충렬왕 때만 혼란한 시기였을까? 충자 돌림의 모든 왕들은 개혁정치와 자주정치, 그리고 친원파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25대 충렬왕은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며 개혁을 실패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살았고, 26대 충선왕도 아버지가 죽은 뒤 개혁정치를 하기 위해 <사림원>을 만들었지만, 결국 친원파들이 제공(?)한 미녀들 속을 허우적거리며 고뇌했다. 심지어 유학자 이제현은 충선왕이 사랑한 여자가 다른 곳에서는 창녀와 다를바 없이 즐기고 산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하면서 왕의 여자들을 떼어놓으려고 노력하였다.

27대 충숙왕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버리고 몽골 공주와 살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이유없이 몽골 공주를 때리고 구타했다고 한다. 몽골 공주가 골병들어 죽자 17살의 어린 몽골 공주를 데려와 아이를 낳게 했는데, 그 공주도 어린 나이에 출산하다가 죽고 만다. 결국 충숙왕은 몽골 여인들을 학대한 죄로 왕에서 쫒겨나게 된다.

28대 충혜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고려 여인이 어머니였다. 그러나, 몽골의 정권이 바뀌자 빽없는 충혜왕은 쫒겨났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왕이 되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충혜왕은 여기에 앙심을 품고, 훗날 다시 왕이 되어 아버지의 부인이었던 왕비를 공개적으로 성폭행하고, 외숙모, 황태후도 욕보인다. 결국 충혜왕은 엽기적인 행각으로 나라 망신을 시킨 죄로 원에 압송당하였는데, 가는 길에 쓸쓸히 죽어 버린다.

충혜왕이 죽고서, 고려의 왕은 친원파가 선출하는 분위기였다. 충목왕, 충정왕은 나이 어린 꼬마였고, 어린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원에서는 친원파 기철의 누이가 <기황후>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는 친원파 세상이었다.

이 때 등장한 공민왕은 왕위계승과 거리가 멀었지만, 원의 노국대장공주와 원의 수도에서 정략결혼을 함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전의 왕돌과 다르게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몽골 공주를 적대시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 공주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할 정도였다고 한다.

왕호에 <충>자를 사용하는 저주가 없었기 때문일까? 공민왕은 드디어 <충>자 왕들을 따라다녔던 <몽골 여자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몽골 공주 외에는 몽골 여인이 없었으며, 유력 신하들과 신돈의 딸만을 귀비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혼란한 시기가 서서히 끝나면서, <충>자 돌림 왕돌의 엽기적인 행각도 끝이 났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들 <충>자 돌림 왕들의 행적은 <남녀상열지사>로 기록되어 나쁜 왕의 선례로 거론되었다.

  쌍화점은 단지, 충렬왕 때의 엽기적인 행각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충>자 돌림의 왕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었던 좌절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토록 몽골 여인이 싫었을까? 몽골 공주들은 부인이 아니라 원의 황제가 보낸 감시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실제 고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자 돌림의 왕들처럼, 왕권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왕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어떻게든 원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각종 개혁안을 발표했다. 친원파를 대신할 세력을 찾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고, 유학자들과 끊임없는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원나라만 물러가면 만주와 요동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어두운 시기를 참고 견뎌내었다.

  고려 전시기를 통털어 각종 제도 개혁을 가장 많이 발표했던 시기도 이 시기이고, 조선왕조를 건국한 유학 세력이 태동한 시기도 이시기이다. 그러나, 그들의 다양한 개혁은 모두 원나라와 친원파에 의해 실패했으며, 그들은 좌절감에 묻혀 살았다. 몽골 공주에게나 한풀이하면서 살았던 그들의 행적은 <엽기>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남겨진 <고려사> 등의 기록은 그들을 방탕한 왕으로 기록하였다.

  언젠가는 공민왕이나 신돈 뿐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충>자 왕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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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중매 2009.01.04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녕부까지 때주겠다고 하면서 원황제의 의심을 없애고을 만주와 요동을 고려가 가지게끔 했다면(심양왕)

    충렬왕은 천재일듯...

    지금으로선 확인하기 어렵겠지만요...

  • ddd 2009.01.04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 영어 이론이 잘못 되어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이제//영어의///의문이//풀렸다'라는 책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책에 대해서는 인터넷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영어 이론이 잘못 되어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이제//영어의///의문이//풀렸다'라는 책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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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아덕회 2009.01.04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윗분들의 논쟁하는 기본 자세가 한쪽은 대단히 전투적이네요...
    이 포스트를 쓴 분은 기본적으로 고려에 대해 비하할 의도가 있지 않아 보이는데요..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고 첫 댓글 자체가 대단히 냉소적인데..
    그 글의 참인지 거짓인지를 떠나 글의 태도에 저는 대단히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약간 정정합시다' 라고 쓰신 분..
    좀 차분하게 글을 올려주실순 없는지요?
    누가 님의 말을 한방에 근거없는 허튼소리로 몰면 별로 기분 유쾌하지 않을거 같은데요..
    더구나 그냥 자기가 알고 이해하고 있는 측면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풀어낸 블로그같은곳에 등장해서 말이죠.

  • 공감합니다. 2009.01.04 1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약간 정정합니다;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아국의 역사서도 아닌 중국 자기들의 역사서(남송)에 그것도 정사에 기록된 백제의 요서 2군 경략설을 아국에서 인정하지 않은 나라의 역사도 역사입니까?
    일본은 저렇게도 하얀 대낮에 독도를 자기네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비교되지 않나요. 일말의 희망의 불씨를 끝까지 살려놓을 속셈이지요..
    갑자기 히스님이 '약~정'님의 공격적인 문체에 흥분하신 것 같은데, 저는 이렇게 읽히네요. 충렬왕이 고려의 힘있는 왕으로 몽골의 군사를 빌려(외할아버지 빽과 본인의 공과 영향력으로) 일본정벌에 나선 것으로 말입니다. 몽골이 아닌 고려을 위해서요. 전리품도 고려가 다 가지고. 그런데 왜 그런 왕이 죽이넘나쁜놈인가요. 백성을 전쟁터에 내몰아 죽이는 정복전쟁을 해서.. 그럼 광개토태왕도 나쁜 놈... 테무친 알렉산더 다 죽일넘나쁜놈이지요..

    • Favicon of https://xn--2n1bk9rtmh26jp7fdva.com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2009.01.04 2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백제의 요서 경영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신중하게 논의 중입니다.

      중국 남송의 자료를 놓고 요서가 우리땅이라고 치고 들어갔을 때 감정 싸움 외에 남는 게 없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우긴다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되질 않습니다. 일본은 그냥 생트집으로 우기는 거구...

      낭송 역사서에 적힌 정확한 진위와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싸워야 될 것 아닙니까?
      남송인도 중국인인데 뜬금없이 요서가 백제 땅이라고 했을리가 없죠.
      북조과 남조의 대립이라던가, 당시 중국 남북간의 마찰, 그리고 남사 외에 다른 책에 그런 언급이 한줄이라도 있는가 등등 따질 것들이 많습니다.

      중국 기록 한줄을 믿고 덤빈다면, 일본은 중국 기록에 나온 왜인전을 증거로 우리한테 따질 것이 무지 많아집니다.

      우리 역사에서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성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예로, 신채호가 주장한 고조선의 3조선설이라던가, 민족이론이 다음 교과서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식민사학의 잔재를 감정적으로 일거에 청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같은 아마추어가 보기에도 답답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견해>도 등장했다 까지를 적어야지... 새로운 이 견해가 <진리>이다.. 라고 적으면 그 다음은 할 말이 없잖아요...

      그리고 그냥 영화 이야기 연장선에서 적은 글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슈가 되는지도 모르겠네요.

      전 고려 왕들을 비하할 목적으로 글을 적은 것이 아닌데요.

  • 공감합니다. 2009.01.04 1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약~정님'의 글 중, 누루하치가 자신들의 조상은 신라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아마, 청의 건륭제때 나온 '만주원류고'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전의 '金史'에도 나오는 모양인데 약간 다르게 기술 된 모양임다. 즉, 신라와 고려로 각각 다르게 기술된 것으로 압니다. 참고하시길..
    그리고, 정성스런 본문 글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s://xn--2n1bk9rtmh26jp7fdva.com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2009.01.05 2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만주원류고를 놓고 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주원류고에는 한가지 목적이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여진족의 청은, 조선과 동일한 조상이였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만주와 요동의 옛 조선 땅은 여진과 공유하는 땅이였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즉, 핵심은 만주와 요동이 여진의 땅이라는 것이죠.

      여진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나왔다는 것은 고대 한반도와 만주, 요동의 민족과 <토지>를 공유한다는 것, 즉 자신들도 재산권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만주원류고의 동일민족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 정통유학을 반대했던 정약용 등 신유학파들도 만주원류고가 주장한 <조선과 여진은 같은 뿌리>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만주와 요동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여진과 같은 민족일 수 없다고 주장했죠. 그 이유는 당시 우리의 주적이 여진이였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일본이, 병자호란으로 여진족이 주적인 국가에서 여진이 주장한 <같은 민족>이다라는 주장은, 북한이 주장하는 <주체사상> 정도로 파악한 것이죠.

      만주원류고에 나오는 주장은 정말 복잡한 역사적 상황들을 모두 고려해야 그 본뜻을 알 수 있을 정도이고, 아직도 <여진족의 진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무턱대고, 여진족들마저 <여진과 한민족이 같다>라고 주장했는데, 왜 우리만 그런 글들을 무시하는가?

      ... 라고 주장하시면 그것만 가지고 엄청난 논쟁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만큼 많이 알고 있지도 못하구요. ㅋ

  • Favicon of https://hungryan.tistory.com 구름~ 2009.01.04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약간정정합시다님과 히스토리아님의 논쟁을 지켜보고 있자니 무척 흥미롭습니다.
    히스토리아님은 기존의 역사관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고 약간정정합시다님은 기존의 역사관에 문제가 많다는
    전제하에 말씀하고 계시네요. 제삼자가 보기엔 약간정정합시다님의 의견에 더 공감이 됩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소위 주류 역사가들은 늘 사대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역사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역사가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엄연한 사료조차 무시하며 이루어진 사관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비록 이 글이 쌍화점과 관련해 고려왕들의 알려진 기행을 다루는 포스트이긴 하지만
    두 분의 논쟁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논쟁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따로 토론을 진행해 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 되겠군요.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 Favicon of https://xn--2n1bk9rtmh26jp7fdva.com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2009.01.04 2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솔직히 제가 쓴 글은 제가 봐도 문제가 있긴 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쓴 글이라기 보다는 고려 후기 왕들의 엽기적인 행동들을 다룬 글이기 때문에, 실제 연구된 역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현재 교과서에 실린 역사가 불만족스럽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배우는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이게 진리니깐 외워라~> 식으로 구성된 교과서...

      분량은 많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입장이 반영되지 않은 교과서... 교과서라기 보다는 역사개론서의 축소판이라고 하는게 낫죠.

      교과서도 바뀌어야 하고, 낡은 역사적 관점들도 새롭게 바뀌어야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옿고 그름을 떠나 옛날 지식이 틀렸으니 무조건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고 보자고 한다면, 일본이나 중국이 주장하는 민족주의와 우리의 민족주의가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겠죠.

  • 우왕 2009.01.04 1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에서 좀 논쟁이 있는것 같긴하지만...
    아무튼 본문 글 자체는 굉장히 잘 쓰신것 같아요
    문체도 읽기좋고 흥미롭게 잘쓰시는 것 같네요 긴글이지만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ㅎㅎ
    주제랑 별로 관계는 없지만 공민왕이랑 신돈... 몇년전에 본 신돈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나네요
    드라마 거의 안보는데 그 드라마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봤더랬죠 ㅎㅎ 그리운 느낌? ㅜㅠ
    아무튼 글들 잘 읽었습니다 ^^

  • 피보나치 2009.01.04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틀리셨습니다.
    우선 쿠빌라이는 몽골의 5대칸 입니다. 3대가 아니죠.
    2대 오코타이가 죽은뒤엔 '그유크'가 3대칸으로, 4대는 쿠빌라이의 형인 '몽케'가 칸이 됩니다.
    몽케칸이 죽자 그 형제중 '아리크부카'와 쿠빌라이가 경합하는데 원종이 이때 쿠빌라이를 찾아가죠.
    태자 신분이었던 원종이 찾아가니 '당태종도 정복못한 고려의 태자가 나를 따른다'며 무척이나 호의를 베품니다.
    원종이 동녕부를 바쳤다기 보다는 쿠빌라이가 안전장치(고려가 근 30년이나 몽골에 대항했으니..)로 강제병합한게
    맞습니다. 충렬왕때 도로 찾아오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대까지 남지만요.

    • Favicon of https://xn--2n1bk9rtmh26jp7fdva.com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2009.01.04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구 그렇군요. 지금보니... ㅋ
      근데 제가 아는 바로는 징기스칸 - 툴루이 - 오코타이를 1,2,3으로 계산해서 쿠빌라이가 쿠조-몽케의 뒤를 잇는 걸로 치면 6대가 되겠네요. 몽골에서는 툴루이도 2대로 계산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 제국은 독자적인 왕조니깐 쿠빌라이가 원의 시조로 봐야겠구요.
      지적 감사드립니다.

  • Favicon of http://인현에게물어봐 dlsgus35 2009.01.04 1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는마지막왕 경순왕 고구려는 마지막왕은 보장왕 백제 마지막은 의자왕 가야 마지막왕 구형왕 발해 마지막왕은 애황제 후고구려는 궁예 후백제는 견훤 고려는 마지막왕 공양왕
    조선은 마지막 왕은 순종....

  • 마야 2009.01.04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힘이 없는 나라의 왕이라는 자리는.....언제나 너무 슬프고 고통스럽고 비극적이네요.
    차라리 왕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 텐데....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는 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s://xn--2n1bk9rtmh26jp7fdva.com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2009.01.05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고, 꿋꿋하게 왕조를 유지했습니다만,

      이미 몽골의 간섭을 받았던 충렬왕 때부터 막장 시대에 접어든 듯 합니다. 정말 눈물겨운 개혁들을 끊임없이 이어졌고, 공민왕 때에는 그 노력들이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친원파들을 비롯한 막장 세력들에 의해 국가 근간이 무너졌죠.

      고려시대의 국가 근간은 토지입니다. 지금 이명박 정권에서 <달러>에 목숨걸듯이요. 토지는 곧 돈처럼 매매할 수 있는 재산이였으니까요.

      그러나, 토지라는 국가 생명줄이 집권층에 의해 멋대로 유린당할 때 왕조의 생명력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 2009.01.05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뭉쿤 2009.01.05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 부전공인 저보다도 더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
    일목요연은 물론이고 구성도 재밌어서 잘 읽고 갑니다~

  • 마고 2009.01.05 1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너무 흥미롭고 두 분의 논쟁도 볼만하구요...^^

    평소에도 관심은 있었지만 어떤 주제로 어떤 책을 골라봐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던중인데

    님 글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하나만 추천해주세요 .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글 마니 부탁합니다^*^

    • Favicon of https://xn--2n1bk9rtmh26jp7fdva.com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2009.01.05 2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서점에 가보면

      <한권으로 읽는 ***> 시리즈와
      <하룻밤에 읽는 ***> 시리즈가 유행하더군요.

      재미로 읽기에는 이야기 고려사도 볼만 하구요.

      좋은 책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와서 딱히 찍어드리기는 그렇네요. ㅎㅎ

  • Favicon of http://businessman.tistory.com/ 짝짝 2009.01.05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쌍화점을 보고나서 여러가지 의문점이 많았는데,
    속이 후련하네요.

    허구에 의한 내용일거란 생각은 했지만, 사실과는 다르군요.

    • Favicon of https://xn--2n1bk9rtmh26jp7fdva.com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2009.01.08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리 포스트모던으로 내달리는 영화라고 해도,
      아무런 근거없이 영화를 만들지는 않죠.
      꼬투리 잡을 수 있는 소재가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전개할 수 있는 부분이 문화 산업의 강점입니다.
      단, 너무 내달려서 역사를 허무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점은 양날의 칼이지만요.

  • 그로우 2009.01.05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 행복독과점 2009.01.07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위엣분들 중 몇 분은 시각이 너무 국수주의적인 쪽으로 편향되신 것 같네요... 기본적으로 고려는 원나라와 전투를 벌였고 패했습니다. 그건 분명 우리의 가슴아픈 역사이지, 그것을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었다, 고려의 충자 돌림 왕들이 원나라 황실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그건 야사에 지나지 않다고 봐요. 당장 충자 돌림의 충 자도 원에 충성하라는 의미에서 붙여준 것입니다. 비록 몇몇 고려 왕들이 원 황실에 인척으로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아픈 과거를 찬란하게 바꿔주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 Favicon of https://xn--2n1bk9rtmh26jp7fdva.com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2009.01.11 1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의 교훈...
      강대국에게 굽신대야 하는 현실과,
      친원파같은 이들이 정권을 잡았는데 아무말 하지 못하는 현실과,
      거짓말꾼들이 누리꾼들을 때려잡는 현실....

      역사의 교훈은 이미 국민 모두가 얻었는데,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 아쉽네요...

      촛불을 들면 빨갱이가 되고,
      진실을 말하면 양아치가 되는 세상이랍니다.

  • Favicon of http://blog.daum.net/weokok 미한인 2009.01.10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정합시다 라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히스님을 미워해서 흠집 내려고 온 사람 같습니다.
    함께 역사를 의논하는 자세가 아니라 남의 약점을 잡는 나쁜태도 입니다.
    역사는 그시대의 사람도 잘 모르는게 역사 입니다

    오늘에 살면서도 청와대의 비밀을 알수 없는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500 년 전의 일을 누가 바르게 알수 있습니까?

    따라서 역사는 공격이 아닌 토론의 자세 이어야 하는데 당신은 시비를 걸러온 사람이지
    사학자로서의 태도가 부족해서 역사를 공부해서는 안되는 사람 입니다.
    여기는 국회가 아닙니다.
    멱살잡고 싸려면 국회로가고
    집단으로 패를 갈라 싸우려면 교회로 가야 합니다.
    여기는 국회가 아님니다.

  • 유다 2010.01.17 2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가한테 들었는데 공민왕은 동성애자 하던 사람을 자기 부인한테 강x하라고 시켰고

    공민왕은 그 모습을 보고 즐겼다고 들었습니다 ..

    이건 뭐 일본야겜도 아니고 ..

  • 꼭두각시 2013.06.21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 Favicon of https://pt10202003.tistory.com pt10202003 2016.10.09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망할 매국노 기황후에 대한 역사왜곡 당장 지우세요!
    근거:
    하지만 그녀의 득세는 고려에는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녀가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 바 있고, 그녀가 득세하면서 고려에 남아있던 그녀의 가족들도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온갖 패악을 부린 것. 결국 공민왕은 참다 못해 기철과 그 일가를 암살하기에 이르고, 고려 본토에서 일족이 전멸한 데 분노한 기황후는 덕흥군 왕혜(王譓)[2]를 앞세워서 원나라의 군대로 고려를 침공하나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한편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하는 헛소리들이 존재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04/2014030404668.html를 보면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말했다. 순제 때 원으로 보내는 공녀가 중단된 사실을 들어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고 단언했다. 뿐만 아니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292016531&code=960801를 보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http://www.encykorea.com/enc/ency_012375.html에는 "1343년(충혜왕 복위 4)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라고 나온다. 동생이 입성론을 일으키는데도 이를 막으려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이곡이 순제에 상소를 넣어 공녀 차출을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불화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 그녀가 황후로 있던 시기 말기는 원 제국 자체가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러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다. 이를 왜곡해서 해석하여 위와 같은 역사왜곡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튼 속지 말자. 또한 고려양 또한 수많은 환관, 공녀들이 끌려가서 저절로 퍼진 것이고 기황후는 그 공녀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 여자가 한류의 원조네 뭐네 하는 것도 참 웃긴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