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머리가 유행인가요?
상투머리의 간략한 역사
1. 상투머리의 재발견? 최근 연예인들의 머리 모양을 보면 특이한 상투 모양을 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웬 상투 머리가 유행??? 하지만 주변머리를 쑥~ 올려서 깔끔하게 단장한 이 머리 모양은 간편하기도 하지만, 잘못 묶으면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 특히 여자연예인들, 그것도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연예인들은 이 머리를 통해 귀여움을 강조하는 듯 싶다. 특히 일본에서 간단히 머리를 말아올린 스타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상투머리라 불리면서 더욱 다양한 스타일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 일본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한류의 영향으로 이 머리 스타일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일본의 아요이 유우라는 배우로 상징되는 일본식 머리가 한국에 들어와 남성들의 머리 패션으로 자리잡았다. 원래 인류의 역사에서 머리모양은 기본적인 신체적, 생리적 역할 외에도 미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함께 하였다. 인류가 의복생활을 시작한 시기부터 머리 모양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으며, 머리 모양은 그 사람의 외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까지 가늠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인류가 도구를 사용한 이후, 몇만년전의 인류들도 손을 이용하여 머리를 손질할 수 있었으니, 다양한 석기구 중에는 머리를 짜르기 위한 도구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뼈바늘이 옷을 입기 위한 도구였다면, 갸름한 반달돌칼은 충분히 이발도구로도 이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동물 뼈로 만든 비녀가 등장하였다. 서기 19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헤브라이족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머리를 삭발한 뒤, 죄를 뉘우칠 때까지 머리가 자라는 것을 지켜봐 주었다고 한다. 이 때 이용사들은 재판관이자 죄를 정화시켜추는 신관이었다. 고대인들은 전쟁 등으로 부상을 당한 사람이 있을 때, 머리에 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치료법이라고 믿었고, 머리 카락은 우주의 기가 주입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러한 관점에서 머리모양을 다듬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나라의 머리 역사를 보면 머리카락을 아무 이유없이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다. 2. 고구려의 상투틀기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위만이 상투를 하고 조선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위만이 상투를 튼 것은 조선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 전통이 고구려에 연결되어 초기 고구려인들도 상투를 하였다. 고구려 안악 고분 벽화 사진들(위)을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외상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상투는 일반적으로 외상투가 많았고, 간혹 쌍상투가 보이기도 한다.(중국 집안현 5호 벽화의 문지기 사진) 쌍상투는 생머리를 2갈래로 땋은 뒤, 말아올려 뒷통수의 머리 위까지 올린 상투를 말한다. (좌) 상투를 튼 석상 (중) 고구려 각저총에 나타난 상투 (우) 신라인의 상투를 보여주는 작품 벽화의 시기를 보면, 오래된 것일수록 상투가 높고, 시기가 지나가면서 상투가 낮아진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정치적 변화 때문이다. 4-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성기 때 중국 한나라와 다양한 교류를 하였고, 6세기 이후에는 중국 남북조 및 돌궐, 유연 등의 민족과 교류하면서 이질적인 헤어스타일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점차 가벼운 단발을 하거나 북방식 변발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중국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상투튼 병사들의 훈련장면(좌)과 복원도(우) 남쪽의 삼한에서는 괴두라고 하여 동글동글하게 말아올린 상투를 틀었는데, 이것이 백제 남성의 머리 모양으로 이어진 듯 하다. 신라는 정수리를 뽀족하게 만든 상투를 볼 수 있으나, 점차 삼한 시대의 머리 모양을 벗어나 독자적인 형태를 이어간 듯 하다. 특히 삼국을 통일 한 이후 지배층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으로 화려한 머리 모양을 한 듯 하다. 발해는 <머리를 땋아 길레 늘어뜨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3. 조선 시대의 상투틀기
고려시대 말기, 몽골의 침입으로 변발이 성행하였다. 몽골인들은 머리의 앞부분 반을 모두 밀어 버렸는데, 고려인들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투를 트는 풍습은 중지되었지만, 그렇다고 몽골식으로 앞머리를 모두 밀지도 않았다. 조선시대에 이 변형된 변발 풍습이 소위 말하는 <백호치기>로 연결된다. 상투를 틀때 정수리 부분의 중앙 머리(소갈머리)를 깍아 버린다. 가운데 머리가 뻥~~ 하니 사라지면, 주변머리를 가운데로 말아올려 상투를 트는 것이다. 소갈머리를 없애는 것은, 상투 머리의 부풀어오르는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투를 감싸주는 망건과 동곳이 잘 고정되게 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또, 결정적으로는 머리를 안깍을 경우 여름철에 너무 덥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상투는 결혼을 하거나 성인식을 거쳤을 때 올리기 때문에 상투를 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성인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양반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양반이지만 결혼을 못한 이들은 대놓고 상투를 하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것을 <건상투>라고 한다. <소갈머리 없다>나 <주변머리가 부족하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소갈머리는 상투를 틀어야만 생긱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양반이 아닌 계층은 소갈머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문이 미비한 중인들이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면 신분 파악을 못하는 놈이기 때문에 <소갈머리 없는 놈>이 되는 것이다. <주변머리가 없다>는 것은, 상투를 틀지 못한 아이들이 머리를 땋아서 말아올린 쌍상투를 튼 것에서 이야기 된다. 아이들은 주변머리가 아닌 생머리를 땋아서 <새앙머리>를 만들어 다니는데, 만약 주제 파악을 못하고 양반집 자제와 같은 머리를 하는 평민이 있다면 눈치, 코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4. 단발령 상투가 사라진 것은 1895년 고종황제의 단발령에 의해서이다. 이 때, 유생들은 <부모님이 주신 머리를 베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따라서 단발령은 국내 여론을 고려해 일부만 실시되었고, 성년식을 거친 유생들이 몰래 상투를 하는 것까지 제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상투가 사라진 것은 1910년 한일합방 때였다. 반면, 상투가 사라진 조선 사회에서 유생들은 짧은 머리를 부끄러워 해서 모자를 쓰고 다나기 시작했다. 신여성들이 다양한 악세사리로 첨단 패션을 보여주고, 개화파들이 멋진 양복과 구두를 뽐낼 때 이들의 유일한 악세사리는 머리를 가리는 모자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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