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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블로그이전_보호글처리) 일제시대에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대중가수들이 있었다.

일제시대 대중가요 이야기 : '나는 가수다'

NO. 008

일제시대에 국민의 사랑을 받았는 가수는 누구일까?

*** 배경 : 1920-1930년대 일제 강점기  ***

2011년.... 한국의 대중가요 시장은 일부 거대한 기획사가 장악했습니다. SM, JYP, YG 등 영어 이니셜을 쓴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들이지요. 그럼, 대중가요가 처음 등장한 시기에도 이런 기획사들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당시 대중가수들은 어떻게 해서 가수가 되고 인기를 얻었을까요? 자,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역사 속에서 살펴볼 거랍니다.

일제시대에도 대표적인 기획사들이 있었는데, 이 때에는 유성음반시대이기 때문에 음반회사가 음악유통과 시장 흐름을 주도했지요. 그 대표적인 6대 회사가 <콜럼비아, 빅타, 시에론, 오케, 포리돌, 태평> 이였죠. 그리고 나머지 음반회사들은 중소 회사였는데, 그나마 <잠자리표>라는 회사와 유일한 한국인 회사인 뉴코리아 정도가 유명하답니다.

그 중에서도 현재 SM 처럼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 회사가 바로 미국 콜럼비아 회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첫 상업 음반도 1907년 콜럼비아 회사에서 제작했다고 합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 소속가수들

자 그럼 이제 우리 나라의 대중 음악은 언제 등장했는지 한번 볼까요?

조선 후기, 우리 나라의 서민 음악은 민요, 잡가, 판소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서양과 만남이 잦은 개항기부터 서양 음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죠. 특히,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찬송가>를 대중들에게 전파했는데, 이건 대중음악이라기 보다는 종교음악에 가까웠습니다. 아무튼, <찬송가>처럼 전통음악과 다른 새로운 서양식 노래를 <창가>라고 불렀죠.

따라서 개항기인 1880년대부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까지는 판소리, 민요, 잡가 등을 녹음한 음반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교회음악도 미국 콜럼비아사가 음반 제작을 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이건 대중가요라고 보기 어려웠죠.

그나마 이런 음악들을 대중들이 들을 수 있었던 건 에디슨의 1877년 발명품인 <유성기> 때문이랍니다. 1899년, 대한제국에서 피리, 거문고 소리를 유성기로 재생하자 사람들은 크게 놀랐지요. 전화, 전기와 더불어 유성기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볼거리였답니다.

발명왕 에디슨과 그의 발명품은 축음기

이 유성기 덕분에 <대중음악> 이라는 개념이 생긴 거랍니다. 원래 전통음악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천하고 듣는 사람이 귀했습니다. 기생이나 광대는 양반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도구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답니다.

그것은 바로 음악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자본>이었지요. 유성기를 통해 대중음악이 널리 전파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음반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기획사가 <가수>와 <대중>을 통제하기 시작했답니다. 그 대표적인 회사가 아까 말한 콜럼비아와 빅타를 비롯한 6대 음반사였죠.

유성기 광고

하지만, 조선인이 노래를 부른다고 조선의 자본력이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답니다. 당시가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이죠. 1930년대, 레코드판은 불티나게 팔렸지만, 그 중 조선 사람이 만들고 부른 것은 1/3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일본 음악이었답니다. 당시 음반시장은 일본과 미국 유통사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죠.

또 조선인이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 장르가 <트로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1920년대 일본의 엔카 음악을 번안한 음악이 트로트 장르로 바뀐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조선의 가수들은 트로트를 우리 전통 박자인 3박자로 편곡해서 불렀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친숙한 노래가 되곤 했답니다. 대표적인 노래가 1932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 옛터>였죠.

반대로, 우리 전통 민요 형식으로 새로운 노래를 창작한 <신민요>라는 장르도 있었습니다. 문호월의 <노들강변> 과 같은 노래였죠. 또, 도시문화라는 새로운 형태의 삶 등을 꼬집은 풍자 형식의 <만요>라는 노래도 있었답니다.

또한 서양 대중 가요들도 많이 소개되었는데, 일제시대에는 서양의 모든 노래를 묶어서 <재즈송>이라고 불렀답니다. 즉, 미국식 팝송이나 유럽식 비트송, 프랑스의 샹송이나 스위스의 요들송은 모두 재즈송인 것이지요. 지금의 재즈음악과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혼동할 수도 있답니다.

자, 지금까지 간략히 몇몇 노래 장르를 이야기했는데, 이것들은 사실 대중가요는 아니랍니다. 왜냐면, 이들 노래는 전통가요를 유성기로 다시 불렀거나, 외국곡을 번안한 노래에 불과하고, 또 작사, 작곡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대중가요라고 하면, 그 노래를 부른 <인기 가수>가 있어야 하는데 이들 노래는 <가수> 위주의 노래가 아니였거든요. 즉, 1930년대 이전의 노래들을 <대중가요>라고 부르지 않는답니다.

예를 들어, 연극 부활의 주제가인 <카츄사의 노래>, 나운규의 영화 주제가 <아리랑>, 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인 <낙화유수>는 크게 히트를 쳤지만, 번안가요이거나 영화 주제가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대중가요라고 보기엔 어렵답니다. 단지 낙화유수는 김서정이라는 작사, 작곡자가 명시되어 있는 한국식 창작곡이기 때문에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카츄사의 노래 송민도 / 아이랑의 나운규 / 영화 낙화유수

그럼 우리 역사에서 대중가요 첫 히트곡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라는 곡이었답니다.

이 노래에는 사연이 있답니다. 1920년대, 기성세대는 보수적이었고 젊은 사람들은 자유연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연애는 문제가 많았어요. 왜냐면, 당시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풍습 때문에 신여성들이 연예대상으로 삼은 멋진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유부남이었거든요. 남자는 첩을 거느리는데, 여자는 왜 자유연예를 하는 것도 안되는 것인가? 당시 사회는 여성들에만 가혹했지요.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은 일본 음악학교에서 성악교육을 받은 재원으로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이라는 노래를 번안하여 <사의 찬미>를 불렀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번안가요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중가요는 아니죠) 그리고 음반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애인 김우진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1926년의 일이었습니다.

 

최초의 대중히트가요 사의 찬미(윤심덕)

이 쇼킹한 사건은 당시 큰 파장을 일으킨 연예뉴스(?)였죠. 이 사건으로 그 때까지 생소했던 유성기 음반이 폭발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이랍니다.

이 사건으로 음반을 좀 팔아서 돈을 번 <일동축음기 주식회사>는 다음 해, <강명화가>라는 앨범을 내놓습니다. 기생 강명화가 부잣집 아들과 연애하다가 자살했다는 내용의 노래였죠. 그래고 여급원 봉자과 유부남 의사 병운의 사랑과 자살을 다룬 <봉자의 노래>, <병운의 노래>도 히트를 쳤답니다.

   강명화 : 평양출신 기생으로 강향란이라고도 하며, 신극에 많이 등장하는 비련의 여인이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으나 기생이라는 신분상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여인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단발 여인으로 유명하다. 기생 시절의 자유연애와 실연,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 자살 사건 등 다양한 사건으로 당시 언론에 핫이슈로 종종 등장했던 인물로 그녀의 행적이 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였다.

그러나, 1930년대를 넘어가면서 남녀의 비극적인 연예 이야기와 관련된 노래는 줄어든답니다.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등 무의미한 전쟁을 시작하면서 전시체제를 강화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미 레코드판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가수>라는 직업은 대중의 선망을 받는 직업으로 자리매김 한답니다.

특이한 것은, 가수 출신 중에 이북출신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조선시대에 남부지방은 양반의 집안이라는 개념이 좀 강했고, 이북지방은 직업에 대한 인식이 한결 자유로웠기 때문이죠.

콜롬비아 등 6대 음반사들은 작사가와 작곡가들을 자신의 기획사에 소속시켜서 월급을 주고, 작곡을 할 때마다 약간의 수당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한 가수들도 섭외해서 <전속가수제도>를 만들었답니다. 그러나 전속가수들도 음반 인세만으로는 먹기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소속사에서 주는 월급과 공연 수당을 받았는데, 이 월급과 수당은 가수레벨 뿐 아니라 <신분>에 따라서도 달랐답니다.

똑같이 노래 앨범을 취입했을 때 수당부터 달랐죠.  기생음악은 <하>의 급료인 10원~70원을 받았고, 일반 가요음악은 <중>은 20원~ 100원을 받았습니다. 가장 급료가 쎈 것은 연극음악출신 배우들인데, 최하 30원에서 120원가지 받았답니다. (당시 일반여성의 급료는 20원, 여교사나 여간호사 등 선망직업의 월급료는 50원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기생들이 돈을 못벌었을까요? 그건 또 아니랍니다. 여배우 출신으로 고급 이미지를 가진 이애리수가 200-300원을 벌었다면, 기생가수인 왕수복은 잘나갈때 700-800원을 벌었답니다. 왜냐면, 기생출신들은 본업인 기생 생활도 같이 하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행사>가 많았기 때문이죠. 요즘으로 따지면, 잘나가는 건 소녀시대지만 돈 잘버는 건 행사의 여왕인 <장윤정>이라고나 할까요?

이애리사와 왕수복

그러나, 1930년 후반으로 가면 기생가수나 배우출신 가수보다는 <직업가수>가 더 많아진답니다. 가요를 듣는 수준이 높아지면서 대중들도 이젠 노래 자체를 잘하는 가수들을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죠. 아이돌 가수들을 계속 보다가 노래에 몰입하는 <나는가수다> 출신의 가수들을 더 선호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러다 보니 1930년대 중반부터는, 기획사들이 직접 나서서 <노래를 잘하는 가수>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오디션>을 보기 시작합니다. 소위 말하는 <가수선발대회>를 공개적으로 시작한 거죠. 콜럼비아 기획사는 당시 10대 대도시를 모두 돌면서 각 지역에서 3명 정도의 가수를 선발하고, 그 가수들 중에서 일부를 데뷔시키는 대회를 열었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슈퍼스타 K>를 연다고 홍보한 뒤 가수들을 지역단위로 모은 것이지요.

이러한 가수선발대회는 실력있는 가수를 선발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가수의 꿈>이 대단하고 치열한 것임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한, 선발된 가수는 당대 인기스타가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는 만큼, 기획사로서는 홍보 효과가 매우 큰 것이었죠. 고복수, 박향림과 같은 가수들은 오디션 스타로서 한 달에 수백통씩의 편지를 받고, 직접 찾아오는 팬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팬돔>가수들이자, 오빠부대의 시초라고 볼 수 있겠네요.

고복수와 그의 슈퍼앨범 / 얼짱가수 박향림

음반사들 역시 이런 슈퍼스타 가수들을 빼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겠죠? 그만큼 가수들의 위상이 올라갔고, 몇몇 가수는 당대를 이끌어간 스타가 되었답니다.

이렇게 일제시대 대중가요는 전통가요부터, 일본노래의 번안곡, 트로트, 재즈송 등을 거치면서 조금씩 발전하였고 점차 우리식 창작곡과 대중가수들이 활약하면서 그 폭을 넓혀갔답니다. 일제시대, 특히 1930년대는 대중가요가 태동한 시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p.s : 대중가요 역사를 굳이 사상적으로 봐야한다면, 일본의 의도라는 점도 짧게 짚고 넘어갈 수 있답니다. 일제는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하자 한국인들의 불만과 독립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음악, 스포츠, 교육, 남녀평등 등을 신사상이라면서 홍보합니다. 전두환이 군부쿠테타를 감추기 위해 3s(스크린, 스포츠, 섹스)를 개방한 것과 마찬가지죠. 일제시대 대중가요는 일본 자본과 미국 자본이 한국의 경제권을 침탈하고,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음악으로 해체시키는 전략전술도 가미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더 좋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