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혁명이 내 신념이라는 것을 믿고 죽음을 택하겠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장. 혁명은 끝났으나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유럽을 한바탕 뒤흔든 이후..... 나폴레옹이 유배되면서 유럽의 국왕들은 혁명이란 단어를 너무나 끔찍하게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국왕은 신이 선택한 존재이기에 국왕에게 칼을 겨눈다는 것은 절대 금기로 만들어야 했다. 유럽의 왕들은 비엔나에서 회의를 열고 세상을 <혁명 이전>으로 돌리자고 결의했다. 메테르니히 유럽을 나폴레옹 이전의 시대로 되돌리자고 주장했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서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러시아 대륙까지 깊은 흔적을 남겨 두었다. 나폴레옹과 싸웠고, 혁명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자유와 해방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민중들이 알게 된 것이다. - 나폴레옹의 전쟁과정과 고뇌를 표현한 우표들 - 사실 그건 나폴레옹이 남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폴레옹이 자유로운 여러 나라에 쳐들어왔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국민들은 스스로 뭉쳐야 했고, 그 결과 <민족주의>라는 것이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또한 자유란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자유주의> 사상도 나폴레옹과 싸우면서 배웠던 결과물이었다. 단지, 그 대상이 이젠 나폴레옹이 아니라 수백년간 자신들을 억압했던 국왕이라는 존재라는 사실만 변했을 뿐.... 나폴레옹은 물러갔지만, 혁명과 전쟁이 무엇인지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를 <국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유럽 곳곳에서 자유를 찾기 위한 혁명의 횃불이 곳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총뿌리는 자신들을 억압했던 국왕에게 향하였다. 프랑스의 7월혁명, 2월혁명,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독일의 학생운동, 이탈리아의 까르보니리 혁명 등은 모두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남긴 새 시대를 위한 유산이었다. 2장. 꿈은 다르나 목적이 같았던 혁명 장교들. 그리고 그 자유주의 운동은 유럽보다 한참 후진국이었던 제정 러시아에도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러시아의 군인들은 나폴레옹 전쟁 중 유럽 곳곳을 돌면서 전쟁을 한 탓에 유럽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자유와 평등 사상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던 러시아의 장교급 청년들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들은 조국이 후진국에 머문 이유를 후진적인 황제제도, 즉 제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중세 서유럽에서나 있을 법한 농노제도 때문에 상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자본가 계급이 성장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 낡아빠진 사회제도를 고쳐야겠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러시아에도 조국을 개혁하자는 마음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하려는 군인들의 비밀결사가 생겼다. 특히 남쪽 지방 비밀결사의 리더였던 베스테리는 황제도 왕도 없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가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기 시작했다. 만약 국민들이 공화국의 개념을 알고, 군인들이 혁명에 가담한다면 세상이 바꿀 것이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북쪽지방의 지식인들과 군인들은 현실적인 면이 강했다. 왕은 일단 그대로 두고 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법치국가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북부 지방의 리더인 뮈라뷔에프는 국왕이 백성들을 위해 법을 지키고,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인 입헌군주제도를 꿈꾸었다. 이 두 비밀결사 단체는 마지막 꿈꾸는 결과는 달랐지만,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공감했다. 그래서인지 두 결사단체는 서로 연락을 하면서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비밀 결사 사이에는 러시아의 민족시인인 푸쉬킨이 있었다. 3장. 뮈라뷔에프의 미완의 팜플렛 북부 비밀결사의 지도자인 뮈라뷔에프는 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운 세상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러시아 백성들을 위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두었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세금 제도와 새로운 세상을 위한 산업 발전책을 적고 또 적어가면서 꿈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뮈라뷔에프는 <어느 진기한 회화>라는 팜플렛도 만들어 두었는데, 이 팜플렛은 대중 계몽을 위해 대화체로 구성한 것이었다. 그 내용 중 질문을 제외한 답변만 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이 팜플렛이 미완인 것은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825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죽고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자, 혁명가들은 12월 14일 페테르부르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니콜라이 1세 그러나 혁명은 너무 빨랐다. 팜플렛이 미완이듯이, 아직 일반 대중과 하급 군인들은 혁명가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몰랐으니까... 대중과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한 혁명군은 황제의 군대에게 진압당하고 만다. 이 혁명은 12월에 이루어졌고, 12월을 러시아말로 데카브리라고 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날의 혁명을 <데카브리스트>라고 불렀다. 혁명의 독려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예정보다 빠른 이유는 남부 비밀결사를 이끌었던 이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데카브리스트의 실패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비밀결사를 주도한 지도자들은 모두 사형을 당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평생을 시베리아와 같은 혹독한 땅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혁명의 실패로 러시아의 개혁은 오히려 훨씬 늦춰지게 되었다. 혁명군과 황제군의 싸움 그리고 니콜라이 1세는 반란을 진압한 뒤, 뮈라뷔에프가 쓰다 만 팜플렛을 읽은 뒤 이렇게 적었다. '도대체 얼마나 뻔뻔스런 짓을 한 것이냐' 라고. 그러나 그날 이후, 시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팜플렛을 대중들에게 돌렸다면 혁명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지도 모른다고... 이 이야기는 훗날 톨스토이라는 대문호에 의해서 소설로 남겨졌다. 그 소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부터 시작한다. 민족과 자유, 평등을 알게 된 한 지식인이 나중에 데카브리스트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표현하였는데, 그 유명한 대작이 바로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이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전쟁과 평화 4장. 난 신념이 아닌 것에는 굴복하지 않겠다.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푸쉬킨은 단지 글을 잘 적었기 때문에 대문호가 된 것이 아니었다. 톨스토이가 데카브리스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표현해서 대문호가 되었다면, 푸쉬킨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인물이었다. 푸쉬킨은 시인이자 유명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인 <스페이드의 여왕>은 그가 어떤 운명을 이끌어갈지 암시하는 작품이었다.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주인공 헤르만은 빠져나올 수 없는 도박의 유혹과 세 장의 카드의 비밀을 풀기 위해 한 때 스페이드의 여왕이라고 불렸던 백작부인을 총으로 협박하다가 백작부인을 죽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자신도 스페이드의 여왕이라는 카드 때문에 결국 백작부인을 따라 죽게 된다. 그는 자신의 소설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스스로 걸어간 인물이었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러시아 카테리나 2세 여제의 통치기 이야기이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니콜라이 1세의 독재 시대였다. 그리고 그는 비밀결사의 친구들과 함께 전제군주가 없는 자유로운 러시아를 꿈꾸었던 문학가였다. 그러나 1825년. 그의 친구들은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에 가담하여 모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푸쉬킨은 반정부적인 시를 적었다는 이유로 추방을 당했기 때문에 혁명에 참여하지 못했다. 어느 날 니콜라이 황제가 푸쉬킨을 불러 물어보았다. 만약 추방당하지 않았다면 혁명에 참여했을 것이냐고 말이다. 푸쉬킨은 이렇게 대답했다.
황제 앞에서 그는 죽기를 각오하였지만, 황제는 국민시인인 그를 죽일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혁명에 실패하고 차디찬 시베리아에 유배된 친구들을 위해 용감하게 시를 적었다.
푸쉬킨은 자유로운 조국을 만들고자 하는 신념이 없다면 이미 자신은 죽은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결국 황제는 국민 시인을 직접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시기는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일어난지 13년이나 지난 때였다. 그 방법이란 것은, 단테스라는 군인이 푸쉬킨을 모욕해서 둘이 총을 들고 결투를 벌이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그 결투를 중지시킬 마음이 없었다. 총소리가 들렸다. 스페이스의 여왕에서 죽음을 예감한 주인공이 <슬픔에 지친다>는 말을 했듯이 그는 오랜 세월동안 죽음을 생각하면서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시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5장. 죽는 날까지 난 그를 애도하겠다. 푸쉬킨이 비열한 결투로 죽게 된 뒤, 사람들은 국민 시인을 애도하면서 황제가 너무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황제는 절대적이라는 믿음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 시인이 황제의 절대권 앞에서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러시아의 대문호들 : 톨스토이, 푸쉬킨, 레르몬토프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르몬토프는 푸쉬킨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시인의 죽음>이라는 시를 적었던 것이다.
니콜라이 1세는 이 시를 혁명을 부추키는 팜플렛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레르몬토프는 위험한 코카서스 전선으로 1년간 파견되어 유배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민중들의 가슴에 대시인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그는 신념을 위해 끊임없이 시를 적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를 계속 코카서스 전선으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추방당할 때마다 그는 작품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담은 소설 <현대의 영웅>을 남겼다. 그리고 또 다시 코카서스 전선으로 추방되던 중 함정에 빠지고 만다. 푸쉬킨이 죽었던 것처럼, 레르몬토프도 음모에 빠져 총을 들고 옛 친구와 결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웃었다. 상대는 바로 총을 쏘았고, 그는 총을 들어올리는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푸쉬킨과 똑같은 신념을 갖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던 또 다른 대문호 역시 푸쉬킨과 똑같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독재에 반발하는 개혁가들을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발전은 없었다. 그가 서아시아 진출을 위해 시도했던 오스만 투르크와의 크림전쟁은, 러시아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고, 대중들은 그를 원망하였다. 니콜라이 1세가 죽은 뒤 이후 독재자들은 새로운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여서 러시아를 후진국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지만, 데카브리스트 이후 황제의 독재체제가 계속된 백여년간 러시아는 서양 세력에 비해 계속 후진국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이상적인 개혁가들. 그리고 그들의 뜻을 존중하고 그 신념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친 대문호들. 근현대 러시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대 작가들이 계속 나온 이유는 바로 옳은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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