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초기의 정복전쟁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8월에 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도를 알리고 영토를 명확히 정하였는데, 북으로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 웅천에 이르렀으며 서로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 주양에 이르렀다. 24년 7월에 왕이 웅천책을 만드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와서 살 만한 곳이 없어 내가 동북쪽 백리 땅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터웠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온전해지고 인민들이 모이니 나와 적대할 자 없다고 말하며 성지를 크게 설치하여 내 영토를 침범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의로운 일인가?> 라 하니, 왕은 부끄러이 여겨 그 책을 헐었다.
26년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 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국읍을 병합하였는데, 다만 원산과 금현 두 성을 고수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 27년 4월에 두 성이 투항하여 그 인민들을 한산의 북으로 옮기니 마한은 마침내 망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1 -
근초고왕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오니, 왕이 듣고 패하 강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오는 것을 기다려 갑자기 쳐서 고구려군을 패배시켰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힘껏 싸워 막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니 왕이 군사를 이끌고 왔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2 -
근구수왕 2년(377)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오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으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2 - | |
사료해석 : 백제 초기 영토 확장에 대한 사료입니다. 백제 초기에는 미추홀 연맹 집단에서 점차 위례집단이 주도권을 잡으며 발전하였는데, 동예나 낙랑, 마한 내부의 투쟁을 통하여 발전하게 됩니다. 초기 세력은 토착세력고 고구려계 유이민 세력이 결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수한 철기의 유이민이 지배층을 이룬 것으로 파악됩니다. 특히 한군현과의 투쟁 속에서 발전하였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