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헤로도토스의 페르시아 전쟁사(그리스 이야기 편 참고자료)

헤로도토스 (Herodotos)와 페르시아 전쟁사


헤로도토스 (Herodotos)

BC 484(?) 소아시아 할리카르나소스(지금의 터키 보드룸)~BC 430(~420). 그리스의 역사가.


고대에 창작된 최초의 위대한 이야기체 역사인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 Historiae〉(〈페르시아 전쟁사〉라고도 함)를 썼다.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 남서부의 그리스 도시인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모두 확실하지 않다. 그는 아테네에 살았고, 거기서 소포클레스를 만났으며, 그후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남부에 건설한 식민지 투리로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역사〉에 언급된 마지막 사건은 BC 430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후 언제 어디서 그가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BC 431년부터 몇 년 동안은 아테네가 그리스 중부 지방에 있었고, BC 425년 이전에 아테네에서 그의 저서가 출판되어 널리 알려졌다고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헤로도토스는 널리 여행을 다녔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 지역을 방랑했고, 이집트로 가서 남쪽의 엘레판티네(아스완)까지 내려갔으며, 리비아, 시리아, 바빌로니아, 엘란 왕국의 수사, 리디아 및 프리지아도 방문했다. 또한 헬레스폰토스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비잔티움까지 올라갔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가서 북쪽으로는 도나우 강 너머까지, 동쪽으로는 흑해의 북해안을 따라 스키티아까지 여행했으며, 돈 강 유역을 지나 좀더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런 여행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역사〉의 구성과 범위

〈역사〉에서 헤로도토스가 다룬 주제는 페르시아 전쟁과 그 전쟁의 예비단계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는 9권(이것은 헤로도토스 자신이 구분한 것이 아님)으로 나뉘어 있다. 제1~5권은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고, 제6~9권은 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제7권)과 그리스가 BC 480~479년에 살라미스·프라타이아·미칼레에서 거둔 대승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역사〉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는 BC 499년부터 시작된 예비 단계(제6권에 묘사된 이오니아의 반란과 마라톤 전투를 포함)와 함께 BC 480~479년의 전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부분이고, 후반부는 페르시아 제국의 성장과 조직, 지리와 사회 구조 및 역사를 기록한 부분이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는 헤로도토스가 애초부터 전·후반부의 배열을 염두에 두고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처음에는 페르시아나 전쟁의 역사 가운데 하나만 묘사할 계획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만약 그랬다면 두 부분 가운데 어느 부분을 기술할 계획이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럴 듯한 견해 가운데 하나는, 헤로도토스가 처음에는 전쟁의 역사를 쓸 계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나중에 페르시아 제국 자체를 기술에 포함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입장에서는 페르시아가 주도하는 침략군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방대한 크기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병사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성격의 군대이면서도 단일 지휘체계를 갖춘 페르시아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스군은 공통된 언어, 종교, 사고방식, 전쟁목적에 대해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데도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사령관들은 걸핏하면 논쟁을 벌였다. 이런 점에서 페르시아군과 그리스군은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그는 이 차이점을 독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때문에 페르시아 제국 자체를 기술하고 있다. 전후반을 잇는 논리적 연결점은 제7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이 사르디스에서 헬레스폰토스 해협까지 서쪽으로 행군한 다음, 배다리를 이용하여 그리스 본토로 건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크세르크세스의 오만함과 성급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이어서 행군하는 페르시아군의 여러 부대가 마치 열병식을 벌이듯 장황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거대한 침략군 집단을 이루고 있는 모든 민족과 인종이 하나씩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제1~4권은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와 구성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을 설명할 때 헤로도토스는 제국의 각 측면을 지리적인 순서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역대 왕들(키로스·캄비세스·다리우스)이 정복한 순서에 따라 기술하는 방법을 채택했다(이 배열법에서 한 가지 예외는 리디아이다. 리디아는 맨 처음에 다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리디아가 맨 먼저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공격하여 정복한 첫번째 나라였기 때문임). 제1권의 서두에서는 리디아 왕국에 대한 설명과 페르시아의 리디아 정복을 다루고 있다. 이어서 키로스 왕이 메디아인을 무찌른 이야기와 페르시아에 대한 설명, 키로스의 마사게타이(카스피 해를 향해 북동쪽) 공격, 키로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2권에서는 왕위를 계승한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 계획을 다룬 뒤, 이집트의 국토와 정복, 남부(에티오피아)와 서부 침략 실패, 캄비세스의 광기와 죽음, 페르시아의 권력 투쟁과 내분, 왕위를 차지한 다리우스의 거대한 제국 건설, 그리고 다리우스가 진압한 국내의 반란들을 다루고 있다. 제4권의 서두에서는 유목 민족인 스키타이인에 대한 설명과 그들의 역사, 도나우 강에서 돈 강에 이르는 그들의 활동 지역(스키티아)과 흑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다리우스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이들을 원정하려고 했다. 다음에는 페르시아의 스키티아 침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침략과정에서 비잔티움을 비롯한 몇몇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항복했다. 페르시아는 스키티아를 공격하는 동시에, 이집트를 기점으로 하여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를 건설한 리비아를 공격했다. 제4권 마지막에는 리비아와 그 식민지 건설에 대한 기술이 나온다. 제5권에서는 페르시아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그리스 본토로 깊숙이 진격하는 과정,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및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굴복하는 과정이 기술되고, 이어서 BC 499년에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킨 이야기가 나온다. 이리하여 이야기는 작품 전체의 주요주제로 넘어간다.


서술방법

지금까지 헤로도토스의 〈역사〉 전반부를 간단히 설명했지만, 이런 간단한 설명은 이 책의 무한한 다양성을 드러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책이 페르시아라는 다양한 제국의 지리·사회·역사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는 명백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역사〉의 구조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헤로도토스의 서술 방법 역시 복잡하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의 지리나 관습, 또는 정치체제를 그리스 독자들에게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중에 전쟁에 개입한 수많은 그리스 도시들의 정치적 상황을 적절한 시기에 기술하고자 했다. 그는 관련된 도시들의 정치적 상황을 서술의 줄거리 속에 여담처럼 교묘하게 끼워넣는 방법으로 이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크로이소스는 이오니아 본토의 그리스인들을 정복했지만 그 자신도 페르시아에 정복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서 다시 옆길로 빗나가, 이오니아인과 도리아인의 지난 역사와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두 도시, 즉 이오니아인이 세운 아테네와 도리아인이 세운 스파르타의 분열에 대해 이야기한다. BC 6세기 아테네의 복잡한 정치적 전개 상황이 간단히 언급되고, 스파르타인들의 보수적인 성격도 잠깐 언급된다. 이 모든 설명과 그밖의 많은 이야기(그중 일부는 오로지 헤로도토스의 개인적인 흥미 때문에 포함되었음)는 마라톤 전투가 벌어진 BC 490년과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략한 BC 480년에 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놓여 있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중요하고 참으로 주목할 만한 한 가지 특징은 호메로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체 역사에 대한 그의 집착과 타고난 재능이다. 이 점에서 그는 재미있는 짤막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대화나 연설까지도 서술 속에 삽입했는데, 그가 시작한 이런 방법은 그후 고대의 역사 기술 과정 전체를 통해 지속되었다.


인생관

제1권에 나오는 크로이소스의 이야기는, 솔론과의 대화에서 예를 볼 수 있듯이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전체적 의미, 즉 〈역사〉 전체가 지닌 의미를 암시한다. 그 의미는 큰 번영은 '불안정한 것'이고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특히 그 번영이 크세르크세스의 경우처럼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수반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략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도덕적 관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크세르크세스는 인간의 모든 이성적 판단으로 미루어볼 때 당연히 승리할 수 있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헤로도토스가 생각하기에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는 교훈은 보편적인 것이고, 그 당시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으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불신앙과 오만함 및 잔인성에 벌하기 위한 신의 징벌이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역사적 사건을 기술할 때는 항상 신들의 개입보다는 인간의 행동과 성격을 강조했다. 근본적으로 합리주의적인 이런 접근방식은 서양의 역사학에서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역사가로서의 자질

헤로도토스는 자세한 것을 빠뜨리지 않는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위대한 여행가였고, 훌륭한 지리학자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관습과 과거 역사에 지칠줄 모르는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은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그는 순진하지도 않았고 쉽게 남을 믿지도 않았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작품 전반부를 읽기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중요성을 갖게 해준다. 후반부에서 그는 주로 전쟁사를 다루고 있지만 결코 전쟁 이야기만 쓴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군사 문제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즉 페르시아군은 육로로 침입했지만 함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따라서 헤로도토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와 같이 그는 정치적 상황을 개괄할 경우에는 대체로 사소한 개인적 동기를 근거로 하여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여기서도 몇 가지 중요한 본질적 요소를 이해하고 있다. 큰 영토를 가진 페르시아 제국과 작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그리스의 독립성만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법의 지배가 그 전쟁 결과에 달려 있었다. 마라톤 전투가 그리스 세계에 대해 갖는 정치적 중요성은 이 전투를 계기로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동등하고 경쟁적인 지위로 올라섰고(이 지위는 살라미스 해전으로 더욱 확고해졌음), 스파르타는 오랫동안 인정받아온 우위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승리는 물론 영광스러웠지만, 이 전쟁은 단순한 승패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의 지도적인 도시 국가들 사이의 내분과 경쟁을 비롯한 몇 가지 문제를 초래했다. 이 내분이 결국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이라는 상호 파괴적인 싸움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헤로도토스는 알고 있었다.


결론

헤로도토스에게는 선배 산문작가들이 있었다. 특히 위대한 여행자인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는 헤로도토스의 책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선배 작가들은 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도시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난 국지적인 사건에 대해 연대기를 쓰거나 이미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여행한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썼을 뿐이다. 그들 가운데 유기적 구조를 가진 완전한 통일체, 즉 전체적 일관성을 가진 하나의 단일체를 창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기적인 통일체를 창조했다는 의미에서,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최초의 역사가이며 유럽 최초의 역사가이다. 헤로도토스의 작품은 예술적 걸작이다. 그 모든 실수(그리고 그 모든 환상과 부정확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중요한 시기인 BC 550~479년의 그리스 역사만이 아니라 당시의 서아시아 및 이집트 역사의 대부분을 알려주는 최초의 중요한 정보원(情報源)으로 남아 있다.


출처 : "헤로도토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