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 멸망의 원인을 추론해보자.
1. 서로마의 멸망 서로마의 멸망은 강력한 동방 전제군주정치를 실시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황제권의 약화에서 비롯됩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배교자라 불린 율리아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무시하고, 다시 고대 로마의 <제우스신>을 모시는 고유 종교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율리아누스 이후에서 다수의 원로원 의원들도 크리스트교보다는 고유의 신앙을 믿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이미, 일신교적 성격을 가진 <크리스트교>를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로마인의 대다수 빈민들은 이미 크리스트교를 <국교>처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아예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동쪽을 통치하면서 서로마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맡겨버립니다. 이 시기에 동서 로마는 완전히 분리되어갑니다. 또, 5현제의 마지막 왕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게르만족들이 로마에 진출하여 로마의 용병으로 활약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의 기병부대는 이미 게르만 군사들이 장악한 상태였지요. 로마인들은 토지에 결박되어 있거나, 의무적이고 강제적인 직업군인으로 활약하면서 로마 군인으로서의 위상을 잃어갔습니다. 3c부터 로마군은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고, 4c에 들어서자 대규모로 넘어오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로마는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로마 영토 곳곳에 게르만의 왕조가 들어섰고, 로마의 게르만 군대중에서도 반란을 일으켜 로마 주변에 왕국을 만드는 자도 등장했습니다. 서로마는 결국 이러한 게르만 족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476년 멸망하고 맙니다. 2. 로마 멸망에 대한 원인을 모두 꺼내보자. 지금부터 설명하는 내용들은 다 로마사 이야기 1-8편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을 근거로 로마 멸망 원인을 설명합니다. 모르는 내용은 앞편 이야기들을 참조하세요. 로마 멸망에 대한 1번째 원인으로 보통 크리스트교의 유포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약간 문제점이 있습니다. 크리스트교가 로마 멸망기에 로마 원시종교와 첨예하게 대립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많은 로마 지배층들은 크리스트교 보다 원시종교를 숭배했고, 예수의 부활보다는 제우스의 천벌이 더 가슴에 와 닿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의 유포와는 상관없이 로마는 이미 여러 가지 원인으로 쇠퇴해 있었습니다. 오히려,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것은 이렇게 몰락해가는 로마에 기독교적인 신앙심과 정결함, 순결함, 공동체 의식을 불어넣어서 로마 사회를 개혁하려는 개혁적 경향의 황제들의 의지였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는 것 같지만, 저는 크리스트교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저는 교회를 충실히 다니지 않습니다. 역사적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오히려 크리스트교보다는 로마인들의 강건한 기풍이 문란해져 있는 것에서 멸망원인을 찾는 게 더 나을 듯 하네요. 로마 멸망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사실 <정복사업 중단>입니다. 로마는 초기 티베르 강 하류에서 출발하여,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하면서 융성했던 국가입니다. 따라서 국가체제 자체가 상무적이고, 군사적인 단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로마 시민회인 병사회는 100인의 병사단위로 시민을 편제하였고, 로마의 12표법부터 시작하는 법제 정비도 전쟁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토지분배를 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3c이후 로마는 정복사업을 끝내고 평화기에 접어들었죠. 이것은 더 이상 평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상무적인 기풍이 사그러들게 됨을 의미하죠. 이 정복 사업의 중단이 로마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유발하게 됩니다. 로마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 군대의 역화도 결국 정복사업 중단 때문입니다. 로마가 정복사업을 할 때의 군대는 정복지의 토지를 분배받는 자유로운 국민병이였습니다. 마리우스와 시저(카이사르)같은 군벌들은 무산자들에게 많은 토지와 연금을 주었고, 시민들의 생활은 향상되었습니다. 물론 사병화된 군대였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정복사업이 끝난 제정 후기에는 정복사업 중단과 함께, 게르만 군대나 속주민 군대가 로마군의 주력이 됩니다. 이것은 로마 멸망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합니다. 또, 정복사업의 중단은 노예공급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노예가 없다는 것은 노예경영을 통한 <라티푼티움>이 사라짐을 의미하죠. 실제, 로마 제정 말기에는 노예노동이 소작농민 경영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콜로누스>제도입니다. 콜로누스 제도로의 전환은 강건한 로마 시민단이, 힘없는 소작농으로 전락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정복사업의 중단으로 황제권도 약해집니다. 최초의 황제인 옥타비아누스기의 황제권은 황제의 정복사업을 통한 개인재산 확보로 이루어진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정복사업이 끝나가면서 황제의 개인재산은 점점 줄어들게 되고, 국가의 경제권도 줄게 됩니다. 황제권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오히려 어마어마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하게 됩니다. 카라칼라 황제는 제정부담으로 전 로마속국에 시민권을 부여해서 세금을 올려받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재정 부담 때문에 직업의 고정화와 세금 증가를 추진했음을 이야기했었습니다. 특히 군인황제 시기의 황제권 하락은 황제권의 치명적인 결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였습니다. 물론 동방군주제도의 도입으로 개혁을 추진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황제권 약화가 로마 멸망의 원인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3. 로마 멸망기에 이미 중세제도들은 출현하고 있었다. 로마의 멸망기에는 도시라던가 상업이 쇠퇴하고 자연경제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직업 세습화 등으로 도시는 완전 쇠퇴하고, 농민들은 <콜로나투스>에 속박되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트교는 확대되었습니다. 보통 중세의 특징 하면, 자연경제, 도시쇠퇴와 장원경제, 지방분권화, 불입권, 봉건제도 등으로 설명되어집니다. 이러한 중세적 요소는 로마 말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직업 세습화로 인한 도시 쇠퇴와 자연경제로의 전환이 있었죠? 콜로나투스에 속박된 농민들은 중세 농노와 같은 위치로 전락했습니다. 이제 대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주요세력으로 등장하였고, 그들은 자신의 땅에 대한 콜로나투스의 <면세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면세특권이 중세의 불입권의 시초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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