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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로마사 이야기 11 - 로마 크리스트교의 성립과정과 발전과정 1번째...

로마제국과 크리스트교 이야기 1번째

1. 초기 로마의 종교

초기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로마 문화 자체가 그리스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들었고, 그리스 문화는 이집트 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인 탓에, 로마의 신화를 보면 거의 그리스 신화와 체계가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 등의 영향을 받은 신화 이야기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신화는 제우스 신을 쥬피터라고 부르는 등 명칭과 풍습, 일부 줄거리 등이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신화내용도 유사한 부분이 많죠.

이러한 다신교의 풍습이 로마 초기부터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황제 예배를 시도합니다. 즉, 그리스 신화의 가장 상위신인 쥬피터(제우스)를 황제의 권위와 맞먹는 권위로 신격화한 상태에서 나머지 신들은 각각 로마의 지배층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이유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초기 신앙을 황제예배 신앙과 결부하여 국가종교화 시킨 것이지요.

이렇게 로마 제정 초기까지는 고유 신앙이 견고하였고, 그 고유신앙이 황제예배와 결부되어,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후기 사회혼란으로 이러한 황제중심의 전통신앙이 흔들리게 됩니다. 특히, 제우스 위주의 신의 위계질서보다 그리스식 디오니소스 신앙이 대두되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에서 영향을 받아 영생, 불멸, 구원, 재생 등을 강조하였습니다.(그리스인 이야기 편을 보면 자세히 설명했었습니다.) 또, 오리엔트의 밀의 종교가 도입되어 로마 신앙은 다양한 신앙이 각 계층의 이해관계 속에서 난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배층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로마 특유의 강건함을 잃고 향략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에피쿠로스 학파적인 쾌락주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에피쿠로스의 이념은 경건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로마의 지배층은 이 사상을 단순한 쾌락주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기독교적 이념의 로마인들은 에피쿠로스 학파는 악마의 학파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정 후기 로마의 사회 전반적 향략주의와 기강 문란은 민중들의 종교적인 경향을 기독교쪽으로 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교양있는 로마의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점을 신플라톤 철학의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신플라톤 철학은 지상 세계의 세속적, 향락적 생활보다, 더 높고 가치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여 로마인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죠. 이러한 이상주의적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신비주의적 사상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2. 크리스트교의 성립

크리스트교가 등장한 것은 로마의 제정 초기입니다. 크리스트교는 일단 유대교의 구약성경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는 유대교가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유대인만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상이라는 것에서 탈피하려고 했습니다. 즉,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신약성경을 새로이 정립하여 더 많은 민족을 포용할 수 있는 도덕주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 바울 등이 로마에 크리스트교를 적극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로마 민중들은 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유대교의 특징이 율법주의, 선민사상이라면, 크리스트교의 특징은 그것을 벗어나 사랑주의, 인류주의를 추구하는 세계종교로서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출현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전도가인 후계자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고, 당시 세계제국인 로마라는 전파 매개체가 있었으며, 그리스 사상이라는 민주주의적 사상 기반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실제 유대교는 바빌론 유수 이후 강대국들의 압박으로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었고, 그것은 철저한 선민사상과 구원주의, 메시아 사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등장과 예수의 탄생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테두리를 거부하는 것이였죠. 예수가 유대교를 벗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당시 선민사상을 가지고, 민족적 우월성을 따지던 사두케인, 파리세인을 모두 비판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는 민족주의라는 테두리는 결코 유대인에게 이롭지 않음을 역설합니다. 자신은 구세주로서 부활의 믿음을 유대인에게 보여주어 민족주의보다 사랑이 우선임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의한 크리스트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은 역사상으로는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바울>에 의해서입니다.

크리스트교에 대하여 로마 황제들은 초기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인들의 교세가 날로 늘어났고, 이들이 사랑과 세계구원을 주장하면서 황제의 요구를 거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중 가장 황제가 싫어했던 것은 병역거부문제, 황제숭배거부(우상거부)문제입니다. 제정시대 황제들은 로마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크리스트교의 소행으로 돌려 그들을 죽임으로서 황제권을 더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하자 그것을 모두 크리스트교 소행으로 몰아 죽였으며, 이후 황제들 역시 비슷한 방법을 자주 동원합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아예 칙령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인들이 종교적 활동을 하느라 국가 대업을 경시하는 것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후기가 되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자 황제들을 생각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로마 후기에 오면 충실히 생업에 종사하면서 세금 납부을 꼬박꼬박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크리스찬이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이제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경건함을 이용하여 로마의 국가 기강을 바로잡을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밀리노 칙령(313)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합니다. 단, 집권층과 황제 자신도 그들의 종교는 제우스교였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목적에서의 크리스트교가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크리스트교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훗날, 테오도스우스는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하면서 모든 지배층에게 크리스트교를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역시 정치적인 목적이였기에,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는 황제와 기존 신앙(제우스교, 디오니소스교 등)을 옹호하는 원로원파는 극심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배교자라 불리는 초기 신앙 옹호파들이 정권을 잡기도 하였고,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는 파가 정권을 잡기도 하면서 상대파를 죽이기도 합니다. 실제, 로마가 동서로 갈리는 시기에 동서로마에는 각각 종교적인 대립이 극심하였고, 이것이 황제로 하여금 로마 분열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투쟁과 대립을 통하여 황제들은 반 크리스트적 계파를 완전 제압하였고,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의 영광이 남아있는 한 로마 제국의 전역에 교회조직을 성립시켜 퍼지기 시작합니다.

3. 로마 교회의 조직 구성

로마 교회의 교세 성장은 교회 관리자가 도시와 주변농촌에 행정 기능까지 관리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로마 교회는 단순히 <장로>가 다스리는 지역교회라고 보면 됩니다. 이들은 로마황제에 의해 핍박받고 음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 교세는 급격히 확장됩니다. 특히 교회조직을 <로마제국의 행정조직>과 일원화하는 방식은 크리스트교의 세계화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 구성 방식을 한 번 볼까요? 크리스트교 구성방식은 로마 행정조직에 따라 3단계로 설정됩니다.

1. 도시와 주변 농촌 지역 : 가장 기본적인 교리 전파 지역으로 주교가 책임을 집니다.

2. 로마의 속주지역 : 로마의 속주는 몇 개 도시와 농촌을 포괄하는 식민지로서, 이 지역의 총책임자는 대주교입니다. 대주교가 주교들을 총괄합니다.

3. 로마제국의 5교구 : 로마제국의 가장 거점이 되는 5개의 수도에 각각 수좌대주교가 있어 대주교들을 총괄합니다. 이 5개의 5교구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입니다.

이러한 5개의 교구 중 가장 상위의 교구가 <로마>로서 로마의 교황은 다른 교구 및 모든 크리스트교 지역을 총괄하게 됩니다. 이 로마교구를 책임지는 자는 교황으로 불리며, 서방교회의 책임자이입니다. 로마가 가장 상위를 차지한 이유는 로마제국의 실질적 수도였으며, 로마교회가 예수의 직계인 베드로에 의해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게 망하게 되면서 5개의 교구중 로마(서방교회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동로마교회의 중심지)만 남게됩니다. 이 2곳이 동, 서 유럽의 종교 중심지가 되며, 나머지 3곳은 이슬람 세력으로 넘어가 교회중심지로서 구심점은 잃게됩니다. 나머지 3곳을 탈환하려는 노력은 훗날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자, 다음장에서도 로마 교회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단과의 논쟁, 교부철학 부분을 역사적으로 논해봅시다. 고고 싱!!

(이 파트는 종교사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부분이니까 종교적으로 덤비지 마세요. 난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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