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보통 역사에서는 김춘추의 즉위를 놓고, 성골계통에서 진골계통으로 왕위가 이전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김춘추 계통의 진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골과 진골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전에 자세히 정리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김춘추를 중심으로 성골과 진골 개념을 정리해보죠. 1. 진흥왕 시기 진골의 성립 진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신라 사회에 성립된 것은 보통 진흥왕 때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은 정복군주로서,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으며, 불교교단, 화랑도 정비를 통해 <부족적인> 국가체제를 <행정적인> 국가체제로 전환시킨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왕입니다. 진흥왕은 이전 왕들이 각 소속 부족들과 <공동하교>를 내리던 관례도 없애고, 왕 혼자 단독하교를 내리는 전례를 보였던 왕이기도 합니다. 이 진흥왕기에 원래 소부족의 소족장 계급으로 신라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던 각 <부>들이 왕권을 옹호하는 행정적인 귀족들로 변모하면서 <진골>이라는 국왕을 옹호하는 계급이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흥왕의 아들은 동륜, 사륜이었습니다. 동륜은 일찍 죽어서 사륜이 왕이 되었는데, 사륜(전지왕)은 음란하다고 하여 쫒겨난 왕입니다. 사륜이 쫒겨나자 동륜의 아들 백정이 왕이 되었는데 이 아들이 바로 진흥왕의 적손자인 진평왕 이였습니다. 이후, 진흥왕의 장자인 동륜의 직계들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동륜의 자손만이 성스럽다는 관념이 생겼고, 이것을 보통 성골이라고 불렀습니다. 성골은 사륜의 후손 진골 및 다른 부족의 진골과 차별된 신성한 족속이었죠. 2. 성골의 신성함과 여자의 부정함이 충돌하다 그러나 진평왕은 아들이 없이 죽었고, 딸인 덕만이 선덕여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당시는 여왕이라서 왕이 안된다는 관념과 성스런 족속이므로 여왕도 괜찮다는 관념이 충돌하는 시기였습니다. 선덕여왕은 결국 여자라서 나라가 어지럽다는 이유로 당시 진골 세력에 의해 축출됩니다. 그러나 당시 왕위계승에서는 한발 뒤처져 있던 김춘추는 자신의 입지를 다질 시간이 필요했고, 다시 여자인 승만을 진덕여왕으로 추대하여 즉위시켰습니다. 이 진덕여왕이 마지막 동륜계의 자손인 최후의 성골입니다. 진덕여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자는 계승 1순위인 상대등 알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알천은 당시 실력자였던 김춘추를 왕에 추대합니다. 김춘추는 왕위 추대를 3번 거절하는 삼양지례를 치른 후 당당히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김춘추가 바로 사륜의 손자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최초의 진골로 알고 있는 김춘추는 진흥왕 이후 동륜계 성골, 사륜계 진골의 왕위 계승 문제 속에서 즉위한 최초의 진골 귀족입니다. ---------------------------------------------------------------------- 관련 사료 진덕왕이 돌아가자 군신들은 이찬 알천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거부하며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고 덕행도 없다. 덕망으로 볼 때는 춘추를 따를 자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결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춘추를 왕으로 받들었다. 춘추는 세 번 사양한 끝에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즉위년 진덕왕 8년에 왕이 돌아갔으나 뒤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이에 유신은 재상인 이찬 알천과 모의하여 이찬 춘추를 맞아 즉위시키니, 이가 태종무열왕이다. 삼국사기 권 42 열전 2 김유신 중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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