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의 후손들도 정권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김유신의 적손 윤중은 성덕대왕에 벼슬하여 대아찬이 되고 여러번 은호를 입었는데, 왕의 친속들이 질투를 심하게 하였다. 때는 중추 보름날, 성덕왕이 월성 잠두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면서 시종관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을 부르라 하였다. 그 때 누군가 간하였다. [ 지금 종실과 척리들 가운데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소원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또 어찌 친친(가까운 친척과 친해야 하는 예절)의 경우에 맞다 하겠습니까? ] 왕이 대답하였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더불어 평안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 조부의 덕이다. 만을 공의 말고 같이 하여 잊어 버린다면, 선한 이에게 잘해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는 의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 42 열전 2 김유신 하편 ---------------------------------- 사료해석 : 이 사료의 핵심은 신라 하대로 갈수록 진골의 숫자가 많아지자, 진골 내부에서 1골, 2골로 등급을 나누게 된 것을 보여줍니다. 김유신계 진골은 이 때 배제되기 시작하며, 왕의 직계 진골에서 소외당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라 하대 진골의 분화 양상은 김유신계의 배제로 극명하게 증거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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