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 대 귀족들의 반란으로 김유신계 귀족도 제거되다
37대 혜공왕 때, 대력 14년 기미 4월에 문득 회오리 바람이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 속에 준마를 탄 한 사람은 장군의 모습과 같았으며, 갑옷을입고 모기를 든 사람 40여 명쯤이 뒤를 따라와서 죽현릉(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능 속에서 진동하며 우는 소리가 나는 듯하고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말은 이러했다. [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며,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진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나간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론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군신들이 저의 공열을 생각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겠사오니 임금께서는 이를 허락해주소서 ] 삼국유사 권 1 미추왕 죽엽군 ---------------------------- 사료해석 : 혜공왕 대 대대적인 귀족의 반란은 안 그래도 입지가 좁아진 김유신 계열의 진골들도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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